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22)
진흙 던전(3)
“어이쿠!”
예상치 못한 진동에 비틀거리던 것도 잠시. 금방 중심을 되찾고 던전을 살폈다.
내려올수록 동굴은 넓어졌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과 진흙은 그대로였지만 공간이 넓어진 만큼 유속이 느려졌다. 거기다 통로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었기 때문에 양옆으로는 진흙이 침범하지 않았다.
홍석영은 발로 바닥을 문질렀다. 신발 밑창에 달라붙은 진흙이 자국을 남겼다.
“이 안에 있는 놈은 더 깊은 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동이 이렇게 심하다고?”
“원래….”
심하다고 했던가?
들어오기 전 읽었던 던전 보고서를 되새겼다. 동굴 바닥을 기어 다니는 놈들 때문에 간헐적으로 진동이 일어난다고만 되어 있었지, 진동의 세기와 빈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쓰여 있지 않았다.
부실한 보고서라고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유지은도 그놈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략하는 데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없었으니…. 다른 의미로 힘들었다고 투덜거리기는 했다마는.
공략하려고 들어오진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차피 덩치가 크다 보니 여기까지 못 올라올 겁니다.”
“하긴….”
던전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악어.
진흙 더미 속을 뒹구는 거대한 악어다.
지네도 그렇고, 왜 하나같이 덩치 큰 놈들만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쪽 행성인지 세계인지는 중력이 약하기라도 한가.
그놈들을 잡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몸집이 작은 게 나은지, 큰 게 나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덩치가 크면 눈에 잘 보이니 좋지 않냐고 말하곤 했었지만.
잠시 기다리자 진동이 멎었다.
“다시 내려갑시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고?”
“진흙이 나올 때까지요.”
“이미 진흙은 실컷 본 것 같은데.”
홍석영은 다리를 가리켰다. 빗물을 헤쳐 오느라 허벅지까지 진흙 범벅이다.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공략을 끝마친 누나의 스트레스 주요 원인은 던전도 몬스터도 아닌 헌터였다. 대체로 신입이 타깃이 되긴 했다. 벌레 던전에 대한 고충을 털어놨던 것처럼 내 커피를 뺏어 먹으며 화풀이했다. 나의 헌터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진 건 솔직히 그런 누나의 탓이 팔 할은 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유지은에게도 좋아하지 않는 던전이 없던 건 아니다.
‘그래도 좋은 아이템 얻었잖아.’
‘희재야. 세상은 물질적인 보상이 다가 아니란다. 그보다는 좀 더….’
누나는 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기분 더러워지는 눈빛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줄 알아야지.’
누나도 아버지의 제자이기는 했다. 간혹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곤 했으니까.
누나가 투덜거린 몇 안 되는 던전.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던전이었다. 좋은 아이템을 준 고마움과는 별개로 누나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 그 지랄 같은 성격에도 아이템을 어떻게 얻었는지 묻는 말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줬지. 다 화풀이라니까.
“보통 탐사하던 헌터들이 인상 깊게 본 걸 던전 별명으로 붙이잖습니까?”
“그렇지. 여기도 진흙이 많아서 진흙 던전이라 불렸고.”
“게이트를 넘은 헌터들을 덮치는 게 비와 진흙이었으니까요.”
“동굴을 발견한 뒤에도 꽤 오랫동안 몬스터 발견을 못 했다지.”
“네. 당시 공략팀을 이끌었던 대장의 말에 의하면 몬스터를 조금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다른 별명이 붙었을 거라더군요.”
“악어잖아?”
홍석영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악어에 뭐… 더 붙일 별명이 있나?”
“악어와 관련된 유명한 전설이 하나 있잖습니까.”
홍석영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그런 게 있어?”
“전설이라기보다는… 도시 괴담?”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앞서 걸어가던 홍석영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지금…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네.”
“냄새가… 마치.”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홍석영은 다급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제아무리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라고 불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건 상정 밖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이 아저씨라면 호탕하게 웃으며 가 보자고 할 것 같아서 솔직히 걱정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그 정도로 비인간적이진 않았군.
“설마 자네가 말하는 괴담이 그건가? 내가 생각하는 거?”
“저는 남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재주는 없어서요. 하지만 맞을 겁니다.”
“이런….”
나는 홍석영을 지나쳤다. 어차피 길은 하나뿐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
악취가 점점 심해진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진다. 누나의 말을 기억하고 준비해 두길 잘했지.
김채민이 이런 잡다한 재료를 많이 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인심 좋은 대마법사는 선뜻 필요한 물건을 제공했다. 이제 아낌없이 주는 대마법사 타이틀은 김채민이 가져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손수건과 물병을 꺼냈다. 물병 안의 물은 금가루를 섞은 것처럼 반짝인다. 대마법사가 손수 정화한 물이다. 그 물로 손수건을 흠뻑 적신 다음 간이 마스크를 만들었다. 악취가 완전히 차단되진 않았지만 이만하면 거의 맡아지지 않는다고 봐야지.
“허?”
홍석영은 나를 배신감 어린 눈으로 보았다. 던전 보고서에 악취에 대한 말이 있었던가.
없었지.
가볍게 코웃음을 짓곤 손수건 한 장을 더 꺼냈다. 홍석영은 반색하며 말했다.
“역시 아들 있으면 좋다니까.”
홍석영은 나와 똑같이 손수건을 머리에 묶어 코와 입을 가렸다.
“냄새가 심해졌으니까 얼마 안 남았어요. 바로 이 앞일 겁니다.”
“여길 가져간 길드가 왜 방치했는지 알겠군.”
“뭐… 이건 벌레와는 다른 의미로 헌터들이 기피하니까요.”
기나긴 통로의 끝이 보였다.
“헌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흘러내리는 진흙을 피해 조심스럽게 형광봉을 비추었다. 내 발 바로 앞에서 바닥이 사라졌다. 하지만 진흙은 여전히 경사를 따라 미끄러지고 있었다.
철퍽.
진흙이 벽을 따라 흘러내린다. 아니, 떨어졌다. 통로의 끝은 낭떠러지. 저 위에서부터 빗물과 섞여 흘러내리던 진흙 더미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홍석영이 쥐고 있는 형광봉을 가져다가 아래로 던졌다. 작은 불빛은 마치 반딧불이처럼 어둠을 잠깐 밝혔다. 형광봉이 밝히기에는 너무나 공간이 컸던 탓이다. 게다가 툭 떨어진 형광봉은 오래 떠 있지도 않고 아래에 고여 있는 진흙 더미에 그대로 파묻혔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이 아래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계곡처럼 깊이 파여 있는 통로이다. 물 대신 진흙이 있고, 그 진흙 속에는 악어들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다. 작은 불빛 따위는 눈치채지도 못했는지 수면 위로 주황색 눈만이 느리게 끔뻑거리고 있었다. 악어가 움직일 때마다 진흙이 밀려났다. 밀려난 진흙은 벽에 부딪혀 파도가 되어 돌아왔다.
철벅.
악어가 내는 소음은 하나도 없는데 진흙이 뒤엉키는 소리만 소름 끼치게 울렸다.
…저게 순수한 진흙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는 저 진흙에서 나고 있었다.
“진흙 던전은 너무 점잖은 별명이지 않나 싶어지는데요.”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몬스터의… 식생 따위는 알지 못하지만, 냄새는 딱 그렇잖습니까.”
“악어라기보다는 그럼… 돼지 아닌가.”
“실제로 돼지는 깨끗한 동물이라던데요.”
“지구산 악어도 저렇게 더러운 물에서 살지 않아.”
“…….”
“…….”
홍석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길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
“아니지?”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참고로 누나는 여길 똥간이라고 불렀다.
‘아, 더러워.’
질색했더니 배를 잡고 웃어 댔다. 꼴 보기 싫었다.
‘알았어, 그럼 하수구? 던전 구조도 하수구랑 비슷하고… 냄새도….’
그러면서 뭐라고 했더라. 하수구에 사는 악어에 대한 도시 전설도 있다고.
누나치고는 제법 똑똑해 보이는 말이었다.
‘아냐, 그렇게 말하면 낭만적으로 느껴지잖아.’
금방 지능이 낮아 보이는 말을 하긴 했지만.
‘…하수구가?’
‘미쳤냐? 도시 전설이라고 하면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말이었어!’
참고로 이 던전의 핵은 저… 진흙인지 악어의 배설물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그 속에 있다.
유지은, 누나가 질색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니까?
“여기 공략하고 싶다고 하셨죠?”
“어? 아니, 안 해도 될 것 같네.”
“핵은 저 안 어딘가에 있습니다.”
“몇 년 뒤까지 안 터진다고 했지? 잠깐 놔둬도 괜찮겠군.”
홍석영은 손수건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풀리지 않게.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든 공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 걸 그랬나. 하지만 나도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다. 그리고 던전을 없애도 몸에 묻은… 오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차를 타고 귀가해야 하는 건 나였고.
“그래서. 자네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겠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바리바리 챙겨 온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이렇게 말해도 준비물이 많지는 않다. 큰 말뚝 몇 개와 로프. 참고로 이 로프도 김채민이 제공한 것으로….
‘이건 어디에 쓰시게요?’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정화한 물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건 아라크네의 실로 만든 거라고요.’
‘홍 선생님 앞으로 달아 두세요. 길드 일입니다.’
김채민이 당장 가지고 있는 게 많아서 다행이다. 내가 구하려고 했다면 시간이 제법 걸렸을 거다. 홍석영이나 이미선을 거치는 것보단 김채민이 더 간편하기도 했고.
말뚝에 로프를 단단히 묶었다. 몇 번을 잡아당겨 풀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다른 말뚝에도 같은 작업을 했다. 말뚝과 로프를 본 홍석영은 내가 할 작업이 무엇인지 알았는지 옆에서 묵묵히 내 일을 도왔다.
“위치는?”
“대략적으로만 압니다.”
“어두워서 가늠하기가 어려운데.”
헌터가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한다. 마법사도 아닌데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재주는 없다.
…김채민을 데려올 걸 그랬나? 하지만 똑같이 생긴 검이 왜 이 던전에 있는지 변명할 거리가 마땅찮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태경을 데리고 여길 오려고 했던 것도 생각이 짧았다.
“그래서 또 따로 준비했죠.”
“준비성이 아주 철저하고 좋아. 근데 이 아빠한테도 미리 말해 준다면 더 좋을 텐데.”
“서프라이즈?”
심드렁하게 대꾸한 다음 길게 자른 종이를 로프에 묶었다. 한쪽을 길게 뺐더니 당산나무에 걸어 놓는 금줄 같은 모습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혀를 한 번 차고, 마력펜을 쥐고서 종이에 룬을 그렸다.
종이에 그린 룬은 금방 망가지는 편이니 이렇게 즉석에서 그릴 수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하나하나 다 손을 쓰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완성된 룬이 빛나기 시작했다. 홍석영은 눈을 반짝 빛내며 내가 그린 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펜이 있으면 나도 룬을 그릴 수 있는 거지?”
“하나 드려요?”
“남는 게 있어? …아니, 나중에. 어차피 당분간 혼자 던전 들어갈 일은 없어서.”
남 앞에서는 쓸 수 없는 물건이지.
홍석영과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룬을 그렸다. 대낮처럼 환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수십 개의 빛나는 룬을 매단 로프는 제법 쓸 만한 광원이 되었다.
“악어는?”
“저 눈은 장식입니다.”
“좋아.”
홍석영은 말뚝을 들고 손안에서 무게를 가늠하다가 별다른 준비 동작 없이 반대편을 향해 던졌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로프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처럼 빛났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