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4)
상도덕의 문제(3)
평탄한 직장 생활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은 나대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나에게 떨어지는 업무가 줄어들거든.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불가항력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애초에 시간 여행자라는 설정이 무리수였다. 딱 봐도 고생만 더럽게 하다가 객사할 것같이 들리지 않는가.
“있잖아요, 선생님.”
“왜?”
“선생님 주 무기는 검 맞죠?”
옆구리에 목검을 달랑 찬 이승연과 순순진이 나한테 다가왔다.
나는 룬을 그리고 있던 공책을 덮었다. 이미선이 내게 요청한 건이었다.
‘공개할 룬을 모두 알려 주세요, 아니, 홍 헌터님은 이런 것도 작업 안 해 놓고 뭐 했대?’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반성했다. 무작정 알아서 공개해 달라고 하고는 아예 손 놓고 있었다니. 그러니 홍석영이 갑자기 내 업적이 어쩌고 하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든 거 아니겠나.
“검? 아니, 난….”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무기는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지만 내 주무기라고 할 수 있는 건 창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어릴 때 각성한 이래로 싸우는 법은 모두 아저씨한테 배웠다. 내 주 무기가 창이 된 것도 그 탓이다. 손에 잘 익지 않은 검이라면 모를까 창을 쓴다면 바로 티가 날 게 분명하다. 방주의 내부자가 홍석영과 똑같이 움직인다면 그건 변명할 수가 없다.
“왜?”
“호옥시, 우리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를 두고 나한테?”
“하지만 저희는 검을 쓰잖아요.”
홍석영이 창을 쓰긴 하지만 그렇다고 검을 못 쓰는 것도 아니다. 검 하나만 들고서도 어지간한 A급 헌터는 눈 감고도 이긴다. 그게 바로 홍석영이었다.
“선생님이 앞으로 종종 학교를 비울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우 쌤한테도 배우라고 했어요.”
“…나한테?”
아니,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홍석영 정도 되는 헌터가 애들을 가르치겠다고 계속 묶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 그 아저씨가 사십 대 중반이다. 민간인이었다면 이래저래 몸이 하나둘 고장 날 나이겠지만 헌터로서는 전성기이다. 여기서 애나 가르치고 있을 게 아니라 던전 공략이나 하러 다녀야 한다.
이승연과 순순진에게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다음 홍석영에게 물었다.
“아, 안 그래도 이야기해 두려고 했는데. 교직원들도 늘었으니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 없어도 되잖아?”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학교에 상주하고 있어야죠.”
“우리 학교는 일반적인 학교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홍석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새끼 법사들은 김 선생이 봐줄 거고…. 룬이야 어차피 자네가 알려 주는 룬을 그리기만 하는 거잖아?”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하는 일 없이 월급만 타는 것처럼 들리잖아. 아직 첫 월급도 못 받았는데.
“룬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외부인을 더 끌어들이기도 힘들고….”
“다선에 헌터들 많잖습니까? 이미선 씨한테 부탁해서 데려오세요.”
“걘 까탈스러워서 자기 사람 안 내줘.”
홍석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암만 그래도 외부인인 건 마찬가지잖아. 그럴 바엔 차라리 자네한테 맡기는 게 낫지.”
“…전 뭘 믿고요?”
“눈을 보면 알아.”
“…….”
“눈이 마음의 창이라잖아. 그 말이 딱 맞다니까?”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안 죽고 최강의 자리까지 올랐을까….
“어차피 애들한테도 마력은 못 쓰게 하고 있으니까 움직임이나 봐줘. 그냥 싸워 주기만 해도 되고. 실전처럼 얻어맞다 보면 깨닫는 게 있겠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수업 방식이다…. 나도 겨우 살아남았지.
“다른 아이들은요? 걔네도 봐줍니까?”
“말은 해 놨으니까 아마 슬그머니 다가와서 자네 목을 노릴 걸세”
“제 목이요?”
“자네 머리를 치면 선물을 주겠다고 했거든.”
“…….”
“…….”
이상하다. 왜 가르치는 처지가 되어서도 살아남아야 하지?
어쩌겠나. 이미 노예 계약서에 사인을 해 버렸다.
“그럼 그 아이는? 힐러요.”
“혜은이? 김 선생한테 부탁하긴 했어.”
마법사와 치료사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김채민한테 배워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나가십니까?”
나는 홍석영이 챙기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딱히 챙길 짐도 없어 보이는데 뭘 자꾸 쑤셔 넣고 있다.
“음. 애들 데려다주는 건 김 선생이 할 거야. 자네도 얻어 타.”
“…여기서 자기 싫으면 그래야죠. 던전 공략하러 갑니까?”
“뭐, 공략이면 공략인데….”
홍석영은 가방을 닫으며 말했다.
“송파구 던전에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려고.”
“…네?”
“수상한 점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저는요?”
“자네?”
“네.”
“방주가 무슨 짓을 해 놨는지 모르는데 위험하잖나.”
“…….”
홍석영은 손을 흔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금방 확인하고 올 테니까 애들 잘 보고 있어.”
* * *
“하나만 기억해 두면 된다.”
마법사들이 김채민의 마력 운용 수업을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남은 아이들을 데리고 공터에 나왔다. 아니, 공터라고 하기에는 이제 무리가 있다. 요 며칠간 이미선이 많은 걸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파라솔과 선베드, 음료 바가 있다. 이미선이 학교에 오면 따라온 헌터 한 명이 그 음료 바를 차지한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솔직히 이것만 보면 공터도 아니고, 학교 운동장은 더더욱 아니다. 주변 풍경이 이래서 그렇지 이건 거의 뭐… 휴양지 아닌지?
“살아남는 놈이 제일 강한 거다.”
“선생님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면 없어 보여요.”
아이들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태연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가여웠다. 지금은 관리청도 없으니 던전 공략은 더 지옥 같을 텐데.
“던전 들어가 본 사람?”
아이들의 웃음에도 아랑곳하고 물었다. 내가 반응해 주지 않자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던전 들어가 본 사람 있어?”
“…….”
“…저.”
그때, 손을 드는 아이가 있었다.
명동에 있었던 아이는 아니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던 아이였다. 이름이.
“서한성?”
“네.”
앉은키도 다른 아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키는 크지만, 아직 성장기라 그런지 홀쭉하다. 키가 있으니 체중을 늘리기만 하면 위력을 더 많이 낼 수 있을 거다. 원래 근접전 하는 헌터는 체구가 반을 먹고 들어간다.
처음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던 것과는 달리, 서한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던전에 들어가 봤어요.”
“그래? 어땠어?”
“…….”
서한성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아이들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에요.”
서한성도 마력 시계에 기록이 없다. 사실 오현욱과 박서현 정도가 아니면 없다고 봐야 한다. 이승연은 이미선이 자꾸 이름을 거론하니 알 수밖에 없긴 했지만.
관리청이 생기기 이전에 활동했던 헌터들은 어쩔 수 없다. 서한성이나 순순진은 그 전에 죽었거나 은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순순진은 이미선이 길드에 데려갔을 텐데 기록이 없으니….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거예요.”
…사실 애들을 겁줘 보겠다고 대충 던진 말이었는데.
서한성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완벽한 룬에 집착하는 박서현과는 다른 의미로 눈빛이 어둡다.
던전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나? 저 나이에 던전에 들어갔다면….
아.
그 케이스인가 보다.
고기 방패로 쓰였던 어린 각성자들. 홍석영이 시범고를 세우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
거기서 구조된 애였나 보네.
홍석영은 이런 애들을 나한테 맡길 생각이었다면 미리 말을 하라고.
하긴, 박서현도 스타일의 변화라고 일축했으니 그런 섬세함을 바라면 안 되겠지.
난 서한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
“그럼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을까?”
“실력을 쌓아야죠.”
“실력? 어떤 실력?”
서한성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던전 공략을 해 본 건 아니라서 그런지 정석적인 답변밖에 생각이 안 나겠지.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챈 거다.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마법사와 힐러 없이, 다섯 명의 아이가 앉아 있다.
홍석영과 이승연의 말로는 원래는 서너 명 정도 더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명동에서 실습을 나갔던 아이들이 고립되는 일이 일어나자 걱정된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려갔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애가 있었다면 그랬을 거다.
“서한성. 던전에 들어갔을 때 어땠어?”
“던전이요?”
“그래. 어땠어?”
서한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거긴 달라요. 그냥… 달라요.”
“그래. 다른 차원일 거란 설도 있긴 하지.”
이십 년 뒤에도 던전의 존재는 미지로 남아 있다.
인류는 그저 적응한 것뿐이다. 던전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와 무작위로 발생하는 던전들에.
“던전 안에는 인간이 없다. 그러니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인간이길 포기해야 한다.”
서한성은 잔뜩 집중한 얼굴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홍석영에게 구출됐을 때 헌터로서의 삶을 포기한다고 했으면 홍석영은 들어줬을 것이다. 각성자라고 해서 모두가 헌터가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서한성은 시범고에 있다. 민간인으로 사는 삶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내게도 선택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내가 각성했던 날에, 아저씨는 나한테 선택권을 주었다.
‘희재야.’
‘왜요.’
‘각성했다고 꼭 헌터가 될 필요는 없어. 각성자 등록은 해야 하겠지만 그냥 그것만 하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돼.’
‘하고 싶은 거요?’
‘이 아저씨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그럼 나 헌터 안 할래요.’
나는 인생 진로관이 확고한 아이였다. 나중에 헌터 라이센스를 딴 것도 관리청에 들어갈 때 가산점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나와는 달리 이 아이들은 헌터가 되고 싶어 한다.
과거, 원래의 시간에서 아저씨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까지 해 봤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건 둘째 치고, 명동 사태가 일어났을 때 아저씨의 계획은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아저씨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외부 요인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지금 대한민국에 던전 공략에 대해서 나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 녀석들은 나한테 감사히 여겨야 한다.
저기서 끙끙거리며 수업을 듣고 있는 마법사들처럼, 내가 이 아이들을 완벽한 헌터로 길러 낼 테니까.
홍석영도 허락해 줬겠다…. 어디서부터 교육을 시작해 볼까?
음.
모처럼이니 유지은 흉내를 내 볼까. 유지은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너희가 인간이라는 점에 너무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지 마라.”
유지은이 아카데미에 특강 나갔을 때의 기억을 되새겼다. 유지은이 말했을 때는 꽤 그럴싸했는데.
“던전 밖이니까 헌터들도 다들 인간인 척하고 있는 거지…. 던전 안에서는?”
나는 서한성을 보았다.
“헌터는 던전 안에서는 오로지 본능으로만 움직여야 한다.”
홍석영은 수련원에서 나왔을 때 내게서 유지은의 검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방이동 던전에 들어가기 전, 그 검과 똑같은 길이와 무게를 가진 목검을 주었다. 솔직히 진검과 같은 무게인 이상 목검이라고 불리기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마는.
나는 목검을 잡고 발끝으로 땅을 툭툭 걷어찼다.
눈치를 보아하니 서한성 말고도 던전에 들어간 애들이 더 있다. 오현욱도 들어갔을 거다. 그러나 괜히 아는 척하진 않았다. 사람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을 수도 있지.
“너희 교장 선생님이 그동안 실전을 중시했지?”
“네….”
내가 손을 까딱거리자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방법은 비슷하다.”
나는 씩 웃었다.
“하지만 난 교장 선생님처럼 친절하지 않아.”
실전처럼 얻어맞다 보면 배우는 게 있을 거라며? 내 머리에 상금을 걸었다고 했었지?
“난 너희 본능을 깨울 거다. 죽이진 않을 거니 잘 살아남아 보도록.”
원래 잘 있는 남의 머리를 노릴 때는 자기 머리도 따일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다.
아니, 뭐.
방이동 던전에 못 들어가서 화풀이하는 건 아니고.
난 그렇게 속 좁은 어른이 아니니까.
아니라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