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42)
민원 접수(1)
“그래.”
홍석영은 의외로 금방 수긍했다.
“룬부터 확인하지. 그리고 자네가 말했던 그 던전도 가고. 지리산.”
홍석영이 급한 일이니 그냥 하라고 시켰으면 나도 못 이기는 척했을 텐데.
하지만 내 예상과는 반대로 홍석영은 얌전히 물러났다.
“네 말이 틀린 것도 아냐. 지은이가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나도 해 줄 말이 없으니까 말이야.”
“…네.”
“호기심이 많은 아이니까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면…. 그래.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부터 하고 어떻게 할지 얘길 해 보자고.”
“네.”
홍석영은 최소한 아이들이 휘말리지 않을 만한 수단을 마련한 후에 시도하기로 했다. 실제로 위험한 적도 있지 않았나. 아이들의 안전을 들먹이자 홍석영도 수긍했다.
이쪽에 갬블을 붙잡아 놨다고는 해도 세상일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른 일도 아니고 사람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을 대충 해치울 순 없다.
“그런데 애초에 학교 설립에 선생님이 끼어들었을 때부터 다 글러 먹은 거 아닙니까? 걔네가 졸업하면 뭘 하든 결국 홍석영의 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텐데요.”
특히 1기 졸업생이라면.
아카데미부터는 학교가 비교적 체계를 갖추고 굴러갔지만, 시범고 시절 동안은 아버지와 한태경, 거기에 더해 봤자 이미선만으로 굴러갔으니 홍석영의 애제자 내지는 수제자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긴 했다.
관리청에 들어오면서 아버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누나는 제외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던 오현욱과 박서현에게도 홍석영의 이름은 끝까지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러면 당연히 방주에서 경계할 거고요. 선생님을 도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패 아닙니까?”
“부정할 순 없겠군.”
“호프는 연구소 실험체들을 쫓으라는 말을 들었다곤 하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이라고요. 양성고의 아이들도 얼마든지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잖은가. 내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 건드린다고? 무슨 자신감으로….”
홍석영은 말을 멈췄다.
왜 그러나 싶어서 잠시 신호에 걸려 멈춘 김에 홍석영을 보았다. 홍석영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언가 고민하고 있었다.
“…불안하게 왜 그러십니까?”
“…….”
“어디 던전이라도 터졌습니까?”
급하게 도망가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
홍석영은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이 먹은 내가 당부한 게 이거 때문인가 싶어서.”
“어….”
“자만하지 말라는 말을 했잖나. 명동 던전은 이미 닫혀서 확인할 순 없었지만…. 만약 명동 던전의 브레이크가 의도된 거라면?”
“…….”
“미노타우로스가 던전 핵을 만질 수 있을 만큼 지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법이 있을 수 있잖나?”
눈을 찌푸렸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이록이 남긴 일기에도 명동 던전의 일로 연구소장이 화를 냈다는 말이 있었고.
나중에 우이록에게 일기에 관해 물어봤을 때도 똑같이 말했다.
‘나도 잘 몰라. 형이 안 온 이후로 나도 그 아줌마, 아저씨들이 이야기하는 거 듣는 게 힘들어졌거든.’
‘그래? 그럼 소장이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들었어?’
‘우리 있는 거 상관 안 하고 난리 치던데? 진짜 완전 빡쳐서 개지랄을….’
‘바른 말.’
‘…작고 귀여운 새끼 개처럼 요란하게 굴었거든.’
그런 우이록의 증언을 고려하면 가능성 있다. 차고 넘친다.
만약 정말로 명동 던전을 일부러 터트린 거라면, 그 목적은?
홍석영과 눈이 마주쳤다.
목적이라고 할 만한 건 하나뿐이지.
“그날 아이들이 죽었다면 지금처럼 방주를 쫓는 데 전념하진 못했을 거야. 아마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네.”
나도 한번 생각해 본 적 있는 문제였다. 다만 홍석영이 그걸 말할 줄은 몰랐다.
깜짝 놀라 홍석영을 보았다. 홍석영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그 애들을 지키지 못했을 나이 든 내가 내게 남긴 말인 거야. 자만하지 마라.”
홍석영은 그 말을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반복했다.
“그래. 자만하면 안 되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지킬 수 없는 게 있었는데.”
“…….”
“마음만 급하게 먹어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천천히 가더라도 안전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홍석영은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 말했다.
“당장 나에게 아들과 딸이 생기면 위험하겠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만 참아 보도록 하지. 미안하군.”
왜 잘 나가다가 이야기가 그리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왜 사과하는 건데? 사과하지 마. 사과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깟 서류 조각으로 가족의 결성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어떤가, 희재 군. 내 아들이 되거든 내 재산도 미리 줄 수 있네.”
“뭐라는 겁니까!”
“당연히 이록이에게도 주고.”
“…….”
“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홍석영은 짐짓 서운하다는 듯 말했지만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무리가 이거라니. 알고 있었지만 정말 실없는 사람이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래. 차라리 이렇게 가볍게 얘기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너희 둘을 항상 사랑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생각날 것 같으니까.
* * *
“진흙? 어쨌든 성분 자체는 흙이라는 거잖아요?”
김채민은 천천히 내 말을 되짚었다. 까만색 원단에 노란색 프리지어 무늬 원피스가 눈에 들어온다.
근래 김채민의 옷차림은 두툼한 조거팬츠와 방수 앞치마, 그리고 목장갑이었다. 이른바 노동하기 편한 옷.
실제로도 학교 건물 주위의 흙을 파며 알 수 없는 식물들을 심고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진흙에 비록… 섞여 있지만요.”
“성분 분석을 해 봐야 알겠지만 원래 퇴비는 좋은 비료긴 하죠.”
노아 미셀의 룬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기 전,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김채민에게 진흙 던전과 그 안에서 발견되었던 김유화의 시신에 대해 말해 주었다.
김채민의 마법은 불에 약하긴 하지만 다른 마법사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고, 실험을 위해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김채민의 도움이 필요했다.
“비료요?”
“그런데 진흙이라면… 그냥 그걸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은데. 제가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우 선생님이 말해 준 대로라면 제 마법으로 손쉽게 핵을 파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몬스터의 배설물이라.”
그러나 정작 김채민은 다른 것에 관심을 보였다. 두 눈이 필요 이상으로 반짝거렸다.
“기본적으로 던전 내부는 바깥보다 마력이 풍부하거든요? 흙부터 달라요, 흙부터. 그러니까 안에서 잘만 자라던 애들이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픽픽 쓰러지는 거죠.”
“…몬스터를 말하는 겁니까, 식물을 말하는 겁니까?”
“그런데 이 마력이라는 게 머리 아픈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얘네가 물에 친화적이란 말이죠.”
김채민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폭우가 내리는 환경이라고요? 그럼 그 빗물에도 마력이 녹아 있을 거고, 그 빗물과 섞인 흙… 진흙에도 마력이 엄청나게 녹아 있을 거라고요. 거기다 심지어, 몬스터의 배설물? 마력에 마력을 더하고 또 마력을 더하면 뭐가 될 것 같아요?”
“물에 물을 더하고 물을 더 넣어 봤자 물이겠죠….”
“네! 더 짙은 마력! 더 좋은 흙!”
김채민은 벌떡 일어서며 과격하게 외쳤다.
“당장 가요!”
“여태 뭘 들은 겁니까. 다시 앉아요.”
“쳇….”
김채민은 못마땅한 듯 혀를 거칠게 찼다.
“그래서 룬이 제 검이 만들어 내는 불꽃도 저장할 수 있는지 실험을 해 볼 겁니다.”
김채민은 썩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이긴 했지만, 순순히 대화 주제의 변경을 받아들였다. 아니, 원래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최대한 룬 크기도 작게 할 거고, 저도 화력을 조절할 거지만 안전이 최고이지 않습니까.”
“우 선생님의 불꽃을 룬에 저장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게 얼마만큼 화력을 내는지 확인하겠다는 거죠?”
김채민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말했다.
“그런데 그걸 왜 확인하는 거예요?”
“…네?”
“마력을 저장하는 룬. 이건 쓸모가 있으니 확인하면 좋죠. 마법을 저장하는 룬? 이것도 마찬가지죠.”
김채민은 눈을 깜빡였다.
“아니, 뭐… 우 선생님이라면 잘 써먹겠죠. 던전 안에서 불 지를 때도 편해 보이고.”
나 그렇게 불 지르고 다니진 않는데. 누나가 자주 써먹는 공략법이긴 하다만.
“근데 그렇게 비장하게 말할 내용은 아닌 것 같거든요?”
“…….”
“무슨 짓 저지르려고 하는 거예요?”
이미선에게 모든 걸 알려 주기는 힘들지만, 김채민은 조금 다르다. 홍석영은 만약 필요하다면 김채민에게는 사실을 가르쳐 줘도 된다고 한 번 더 말해 왔다.
그만큼 김채민을 믿고 있다는 건가? 김채민을 믿어도 된다는 말인가?
“재밌는 일이에요?”
“그게.”
“그러면 저도 끼워 주세요.”
김채민을 믿을 수 있는가.
우습게도 김채민이 자기 능력에 자부심을 품고 있는 대마법사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방주와 손을 잡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물론 자기 영역을 멋대로 휘저은 놈들에 대한 원한도 원한이고.
어떤 의미에서 김채민은 노아 미셀보다도 더 유명한 마법사이다. 노아 미셀이 그저 그런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유례없는 천재 마법사라면, 김채민은 삼대가 내리 천재였던 가문의 삼대째 천재이다. 심지어 증조부마저도 마법사라고 했으니,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마법 명문가라고도 할 수 있다.
김채민이 다른 마법사에 비해 소탈하고 친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은 또 다른 문제다.
게다가 노아 미셀과 손을 잡고 싶었다면 마력초 키우기에 성공했을 때 내가 아니라 미셀에게 접촉을 시도했겠지.
“…아. 봐요. 바로 대답 안 하잖아요. 뭔가 이걸 확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죠?”
김채민은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우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이 나한테 얘기 안 하는 게 많은 건 알고 있거든요? 지금 말하는 거지만 나 솔직히 서운해요.”
목소리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있지만 살짝 찌푸린 두 눈은 진지하다.
“이 헌터와 하는 협회 얘기는… 그렇다고 쳐요. 저도 이능 협회랑 하는 이야기는 관심 없어요.”
심지어 목소리에 담겨 있는 웃음기마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죠.”
“김 선생님.”
“전 홍 선생님처럼 대단한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긴 해요. 방주를 쫓게 된 동기도 솔직히 개인적인 일이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저나 홍 선생님도.”
“아이참,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요! 맥 끊지 말아 줄래요?”
나는 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김채민은 그런 날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진짜 서운하다고요. 두 사람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으면 티를 내질 말든지요. 사람 바보 만드는 것도 아니고.”
김채민은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저 두 사람 부하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 이유까지 똑바로 말해 주세요.”
부탁이라는 단어에 힘이 실려 있다. 그것에 불평할 생각은 없다. 김채민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