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44)
민원 접수(3)
“마력펜?”
“그냥 가칭입니다. 직관적이잖아요?”
갬블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갬블의 앞에는 굵은 나무 막대와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마력석이 놓여 있다.
“직관적인 건 잘 모르겠지만…. 마력으로 뭔가 하는 거예요? 뭘 하는 건데요?”
“간단합니다.”
마력펜은 다연의 마력 공학 연구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다. 휴대하기 편한 만년필 형태에다가 손 떨림 보정 등 룬을 보다 쉽게 그릴 수 있도록 여러 처리가 되어 있었다. 가격도 아주 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걸로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면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헌터들이 구매하는 데 망설일 만한 가격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룬이 필수가 되면서 헌터뿐만이 아니라 마법사들도 마력펜을 사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다연은 마력펜의 원리마저 공개했다. 마력펜이야 다연의 독점적인 상품이지만, 작은 마력석과 마력석을 박아 넣을 막대만 있으면 완성할 수 있는 간이 마력펜은 이따금 헌터들의 구명줄이 되어 주었다. 마력펜은 내구성이 좋지 않았고, 소모품이었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룬을 그릴 줄은 알지만, 보정 기능 없이 그 복잡한 룬을 능숙하게 그려 내는 헌터는 많지 않다. 그러니 간이 마력펜 만드는 방법을 공개했다고 해서 다연의 마력펜 매출이 차이가 있을 만큼 줄어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절체절명의 순간 다연에서 공개한 방법으로 마력펜을 만들어 위기를 넘긴 헌터들이 목숨값이라며 마력펜을 대량으로 구매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연이 마력펜의 원리를 공개한 것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인간이 나 몰래 처리한 일이 한두 개여야지. 다연으로서는 매출을 크게 떨어뜨리지 않고서 기업 이미지를 챙길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준비한 막대에 커터칼로 세로로 길게 흠집을 낸다. 이때 막대가 마력이 잘 통하는 재질이면 더욱 좋다. 헌터들은 던전에서 종종 발견되는 붉은 자작나무의 나뭇가지를 사용한다. 어느 지역의 던전에서나 쉽게 발견되는 나무이기 때문에 진입한 던전에서 이 나무를 발견하거든 나뭇가지를 죄다 잘라다 챙겨 놓는다.
나도 한태경과 한창 던전을 돌아다닐 때 발견한 붉은 자작나무의 가지를 꺾어 놓았다. 검붉은색을 띠는 나뭇가지의 속은 새하얗다. 나뭇가지가 반으로 갈라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흠집을 내고, 이번엔 내 손가락을 베었다.
“힉!”
정작 상처를 낸 나는 가만히 있는데 갬블이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쓸데가 있어서요.”
“피… 피를요? 너무 많이 나는데…?”
“이건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 끝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는 피를 파 놓은 흠에 떨어뜨렸다. 피가 흠에 잘 스며들도록 꼼꼼히 살폈다.
기본적으로 각성자의 피에는 소량이나마 마력이 있기 마련이다.
마력석에도 피를 묻힌 다음 나뭇가지 끝에 힘으로 눌러 박았다. 접착제 같은 이물질이 섞이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고정만 되면 되는 거니까.
이러면 준비는 끝이다.
아직도 내 손가락 끝에는 피가 묻어 있다. 피 묻은 손으로 마력펜을 쥐었다. 체내에 있는 피와 마력펜이 공명을 일으켜야 한다. 반드시 상처 난 손으로 쥐어야 하는 이유다.
종이에 룬을 그렸다. 다선에서 발표한 것 중 하나이다. 발광 룬.
“룬…? 이거 마법사만 할 수 있는 거 아녜요?”
“호프는요? 몬스터도 쓰잖아요.”
“아뇨. 걘 지금은 못 써요. 인간의 몸으로는 마력 쓰는 게 한정되어 있다나 뭐라나…. 걔 성격상 얌전히 룬을 그리는 것도 싫어하고요.”
역시 몬스터도 룬을 사용한다니까.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래도 알고 있는 룬이 있잖습니까?”
“인간은 못 쓸 거라고 하던데요. 어차피 종류도 많지 않대요.”
“미셀도 못 씁니까?”
“신체 구조상의 문제라 걔도 못 쓴다고…. 그래도 연구는 했겠지만.”
갬블은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계속 깨닫지 못할 것 같았다.
“어쨌든 룬은 원래 마법사만 쓸 수 있는 건데, 이걸 사용하면 일반 각성자도 룬을 그릴 수 있습니다.”
마력펜을 내려놓았다. 가벼운 충격에도 마력석이 깨졌다. 다연의 마력펜이 소모품이라면 이건 일회용이다.
상처를 쥐어짜 피 한 방울을 룬에 떨어뜨렸다.
“……!”
룬이 밝게 빛났다.
“흐, 어어. What…. 지, 진짜예요, 이거?!”
갬블의 언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한국어와 영어, 스페인어를 오갔다는 뜻이다.
그래도 홍석영 멱살부터 잡았던 김채민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반응이었다.
갬블은 손을 들어 허공을 마구 휘적거리다가 마력펜 주위를 맴돌았다.
“이거, 저, 저도?”
“네. 봐도 됩니다. 어차피 보여 주려던 거였는데요. 지금은 마력석이 깨져서 더 쓰지는 못합니다.”
“마력석… 이건 아예 못 쓰는 거예요?”
“순식간에 마력이 빨린 거라서요. 가루를 내면 쓰일 곳은 있을 겁니다.”
“아, 아아…. 그렇죠. 아무리 그래도 마력석을 일회용으로 쓰는 건….”
갬블은 마력펜을 뜯어보았다.
워낙에 간단한 구조라 크게 살펴볼 건 없을 것 같았는데, 갬블은 꽤 공을 들여 마력펜을 살폈다.
“그러니까 각성자의 피가….”
뭔가 알아듣기 힘든 전문 용어들이 나열된다. 한국어로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 판에 영어? 게다가 스페인어?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멕시코 이민자 출신의 부모를 둔 갬블은 영어만큼이나 스페인어에도 익숙했다. 그러니 이해하자.
그래도 나에게도 아주 문외한인 분야는 아니어서 몇 개 용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각성자의 피, 매개체, 마력석…. 이미 정답지를 알고 있는 만큼 갬블이 이 조잡한 마력펜 조립법을 보고서 나름의 이론을 정리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재는 천재라니까.
한참 좋을 대로 놔두자 갬블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오. 미안, 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실컷 봤습니까?”
“…더 봐도 될까요?”
“나중에요. 이야기 좀 합시다.”
꿀꺽.
갬블이 침을 삼켰다. 그렇게 긴장 안 해도 안 잡아먹는다.
“이 마력펜 말입니다.”
“네, 네.”
“박사가 개발한 걸로 합시다.”
“네…… 네?”
나는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 진동에 맞추어 마력펜이 달그락거리며 움찔거렸다.
“알고 있겠지만, 다선에서 룬 연구를 하고 있거든요.”
“아… 작년에 발표한 거요?”
“알고 있습니까?”
“그거 이쪽에서도 꽤 시끄러웠으니까요…. 마력 공학에 어떻게 룬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법사가 필요하니까 실용성은 없지 않나 했는데, 이게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그렇군. 그쪽은 생각하지 않았었다. 룬의 발달로 큰 변화를 겪은 건 던전 안의 헌터뿐만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왜 제가 개발을요?”
“이게 원래 방주에서 사용된 거거든요.”
갬블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놀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놀라면 이쪽이 미안해진다.
“정확히는 몇몇 실무진… 청소부 사이에서만 드물게 사용된 방법입니다.”
“어….”
“보다시피 이런 물건을 계속 버려두기에는 아깝잖습니까. 다선에서도 룬 개발을 하고 있으니 그냥 공개해 버리려고요.”
나는 연구실 바깥을 가리켰다.
“학생들에게도 룬을 가르칠 생각이고.”
“으음…. 그러면, 그러니까. 출처 세탁이 필요한 거죠?”
갬블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아차렸다.
“그걸 원하는 거면 다선을 이용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룬도 거기서 연구하고 있다면서요.”
갬블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사이가 아주 돈독해 보이던데요.”
협회의 헌터들에게 잡혀 온 기억 때문인지 갬블은 묘하게 이미선을 어려워했다. 어려워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갬블을 우리에게 선수 뺏겼다고 아직까지도 아쉬워하는 이미선이 알면 억울해할 일이었다.
“그건 안 됩니다.”
“단호하시네.”
“저흰 이걸로 상업적 이득을 취할 생각이 없거든요.”
“…헤.”
갬블은 힘이 빠진 듯 괴상한 소리를 냈다.
눈을 깜빡이다가 콧등에서 미끄러진 안경을 벗어 안경알에 입김을 불었다. 뿌옇게 김이 서린 안경알을 셔츠 자락으로 반질반질 문지르고, 반대쪽 안경알에도 똑같은 작업을 한다.
나는 차분히 기다렸다.
갬블은 안경알에 묻은 먼지가 없는지 확인한 다음 안경을 꼈다.
“상업적인 이득을 취할 생각이 없다고요?”
“네.”
“전혀요?”
“우리는 길드입니다. 장사할 생각은 없어요.”
나는 말을 덧붙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요.”
앞으로 갬블이 만들어 내는 것들은 또 다른 이야기다. 마력 측정기나 마력 측정기라든지, 마력 측정기 같은 거….
“물론 특허는 낼 겁니다. 그건 중요하죠.”
“네. 중요하죠.”
“하지만 그걸로 장사는 안 할 겁니다. 다선이나 다연에서 이걸로 뭔가 만들어 볼 생각이면 막을 생각도 없습니다.”
“흐응…. 그냥 진짜 공개만 하려고요,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 선생님의 뜻이기도 하고요. 헌터들이 마법사가 없어도 룬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지금 다선에서 만든 룬이 작년에 발표한 것만 있겠습니까?”
“……!”
“홍 선생님과 제 목적은 헌터들의 생존율을 끌어올리는 겁니다. 룬은 그 방법 중 하나고요. 그걸 위해선 마력펜이 필수입니다.”
갬블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갬블의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여자라면 내 말의 중요성을 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알았어요. 하지만! 제 이름은 안 돼요.”
“알았다면서요?”
“선생님과 길드 마스터의 의견은 존중해요. 존경하고요. 하지만 이건 제 자존심 문제예요. 제 양심의 문제라고요.”
갬블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만들지도 않은 걸 제가 했다고 할 순 없어요.”
어지간해서는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인가. 다른 사람의 연구를 훔치는 이들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본받을 만한 정신이다.
하지만 이러면 곤란한데.
그래 봤자 홍석영 이름을 들먹이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쓰는 걸 허락할 텐데….
무심코 관리청 시절처럼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김채민도 이런 게 서운하다고 했었는데. 갬블도 마찬가지다. 시작이 어쨌든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마력 측정기를 알차게 뜯어먹을 수, 마력측정기를 무탈히 개발할 수 있다.
관리청이야 수직 구조의 공공 기관이지만 지금은 홍석영의 개인 길드니까….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 났다.
“박사의 개인 연구가 아니라, 길드 미미의 연구라고 발표하는 겁니다.”
“…길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구실을 보았다. 난잡하다.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장비들이 책상 서너 개를 점령하고 있다.
장비의 크기를 고려해도 혼자 쓰기에는 넓어 보인다. 앞으로 양성고에서 받을 신입생 가운데에도 마력 공학에 관심을 가지는 애들이 없진 않겠지….
언젠가 다른 연구원들이 필요한 날이 분명 온다.
그러니 이건 그에 대한 미끼도 겸할 수 있겠지.
“정확히는 길드 미미의 부속 연구실, 파로스의 이름으로 공개하는 겁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