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50)
대마법사의 제자의 제자(1)
“…….”
“…….”
김채민은 천천히 계약서를 다시 살폈다.
“…….”
여전히 아무 말 없다.
어떻게 설명해야 망상증에 시달리거나 사이비처럼 들리지 않을지 고민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김채민과 계약서를 두고 씨름할 때 이걸 고민했어야 했는데.
‘저는 미래에서 왔습니다.’
‘십구 년 뒤의 미래요.’
‘미래에 어떻게 됐냐고요? 다 망했어요.’
망상증이 아니더라도 극단의 염세주의자같이 들리는 발언이지 않은가. 아니면, 그. 20세기 말에 유행했다던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이라든가.
홍석영이야 그간 몬스터를 상대해 온 게 있으니 나를 금방 믿었다. 믿었다고 해야 하나. 처음부터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게 맞는 설명이다.
하지만 김채민은?
과연 김채민은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차피 마력 시계는 나나 홍석영… 의심하건대, 유지은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으니 미래에서 왔다는 증거로 보여 주었다. 마력펜도 꺼내서 룬을 그렸다.
마력 가림막 룬을 보고선 흥분해서 홍석영의 멱살을 잡았던 그 김채민은 내가 마법사의 도움 없이 룬을 활성화해도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있었다.
“…….”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슬슬 무서워질 정도였다.
괜히 홍석영도 김채민의 눈치를 보고 있다.
어쩌지. 우이록 DNA 검사라도 해야 하나. 동일 인물이라고 확인할 수 있게? 그걸로 되는 건가? 여기서 김채민이 미친놈들이랑은 못 해 먹겠다고 돌아간다면 어쩌지?
아니, 하지만 얘기해 달라고 한 건 저쪽이잖아. 계약서 잉크도 다 마르지 않았다. 싫으면 고유 마법을 내놓든지!
나와 홍석영이 덩달아 숨죽이고 있는데, 김채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이다.
“저, 김 선생님?”
“지금이라도 다시 계약서 바꿀까요?”
“…네?”
“왜 우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어요. 제가 뭐라고 하든 그냥 무시하지 그랬어요?”
“네?”
“왜 제 고집을 들어준 거냐고요!”
이 사람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건가? 왜?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알려 달라고 안 했을 거라고요.”
“…….”
“지금이라도 계약서를 수정할까요? 제약을 더 둬야 할 것 같은데. 배상금이라든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다.
기껏해야 그딴 농담을 할 거였다면 계약서니 뭐니 하면서 난리 치지 말라며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그게 내가 예상했던 반응 중 가장 유한 것이었다.
이렇게… 의심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무난히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절 믿으십니까?”
김채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건 진짜 사기꾼 같았어요. 아니면 사이비?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부류요.”
“그게 요즘에도 있습니까?”
“의외로 종종 보여요. 한번은 뭐 하는 건지 궁금해서 따라가 본 적도 있는데….”
“커흠.”
홍석영이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크게 헛기침했다. 이상하게 자꾸 김채민과 이야기하다 보면 말려 버린다니까.
나는 김채민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았다.
“…네. 제 말을 믿는다고요? 정말로?”
“믿으라고 얘기한 거 아니었어요?”
김채민은 오히려 내게 물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거야 그렇지만….”
김채민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 선생님이 하는 말이잖아요?”
내가 언제부터 김채민에게 그런 믿음을 주는 인간이 되었는가.
오히려 당혹스러운 마음만 커졌다.
“차라리 홍 선생님이 방주의 보스고, 노아 미셀이 홍 선생님 부하라고 하면 의심했을 수도 있어요. 아닌가? 그쪽은 오히려 신빙성이 있어서 믿어 버릴지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서운 소리를 한다.
“우 선생님이 세기의 천재 마법사 겸 헌터라고 했으면 헛소리도 정도껏 하라고 했을 거고요.”
김채민은 말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설득 당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미래에서 왔다?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왜 해요? 그럴싸한 거짓말은 더 많은데.”
“…….”
“무슨 이득이 있어서?”
김채민은 눈을 찌푸렸다.
“혹시 진짜 방주 보스거나 한 건 아니죠?”
“절대 아니네.”
“네. 그럼 됐어요.”
김채민은 너무 산뜻하게 대답한 나머지 오히려 이쪽이 김채민을 의심하게 된다.
내가 김채민을 너무 믿었나? 김채민에게 내가 모르는 다른 연결 고리가 있다면?
김채민은 대마법사다. 덕분에 이 시기의 빈약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마력 시계에는 김채민의 행적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었다. 물론 그런 데이터 쪼가리로 사람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의 거름망은 되어 주지 않는가.
김채민은 기존의 마법 학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죽기 몇 년 전부터는 동아시아 마법사들과 교류했다는 말은 있었다. 아시아 마법사들이 기존 유럽 중심 학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교류하기 위해서서라고 했던가.
노아 미셀의 영향력이 아시아까지 끼치려면 최소 10년은 더 있어야 한다. 노아 미셀이 본격적으로 마법사가 아닌 헌터들에게도 그 이름을 각인시키는 건 마력 가림막 룬 때문이니까.
…역시 그 룬은 이쪽에서 먼저 공개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노아 미셀이 마력 가림막 룬을 알고 있든 어쨌든 간에, 알고 있다면 어쩔 건가. 호프가 의심받을 수는 있지만 알아서 잘하겠지.
“…….”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김채민이 묘하게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
김채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이제 와서 김채민을 믿을 수 없다고 하기에는 늦었으니… 믿어야지. 때로는 괜한 의심이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저….”
“네.”
“…….”
김채민은 입을 꾹 닫았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걸 보니 할 말이 있기는 한가 본데.
왜 그러냐고 묻는 거야 쉽지만 일부러 김채민이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저, 저기. 그러니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채민의 인내심은 짧았다. 이제 엉덩이까지 들썩이기 시작한다.
…왜 저래?
“왜 그럽니까?”
“그,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어떤 거요?”
“궁금한 게 사실 많은데요.”
내 말에 멈칫하던 김채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물으면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는 건가요?”
김채민은 계약서를 매만지며 말했다. 손가락이 미묘하게 항목 하나 근처를 맴돌고 있다.
‘우희재는 김채민의 협조를 요구하는 업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룬과 마법 이론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의사 표현은 또 처음인데.
말해 줘야지, 어쩌겠나.
“뭐가 궁금해서 그럽니까?”
“미래의 대마법사 박서현이 선생님한테 말해 줬다는 마법 이론이 뭔가요? 아예 다 가르쳐 준 건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저기우선생님사실서현이제자예요?아니면뭔가요?”
김채민은 숨 쉴 틈도 없이 단번에 내뱉었다.
“…….”
“…….”
“왜요!”
“아뇨…. 폐활량 좋으시네요.”
“벼, 별로 좋진 않… 그래서 뭐냐고요!”
미래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충격적인 소식보다도 박서현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와? 사실 저기에 꽂혀서 다른 게 들리지 않았던 게 아닐까?
제법 신빙성 있는 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서현이가 대마법사라고요? 아뇨, 이건 이상하진 않아요. 걘 진짜 재능이 있어요. 제가 봐도 그래요. 솔직히 마법은 유전이거든요? 엄청 차별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들리지만 어쩔 수 없다고요. 그런 면에서 진우도 정말 재능이 있어요. 서현이가 빛 마법을 잘 아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잘 따라온다고요. 고유 마법을 깨닫는 것까진 사실 본인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운도 필요한데, 진우는 나름대로 단서를 잡은 모양이더라고요. 지금처럼만 유지한다면… 아니, 하지만 진짜 대단한 건 서현이기는 해요. 그래요, 장래에 대마법사가 된다면….”
잔뜩 흥분해서 무어라 빠르게 중얼거리던 김채민은 갑자기 입을 딱 다물고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우 선생님, 마법사인가요?”
“아니라니까요.”
“…그럼 마법 이론은 왜 아시는 거예요?”
“취미라서요.”
“취미?”
“‘마법사가 아니라서 모르나 본데 이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지껄이는 마법사들 머리 깨고 다니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
“…….”
김채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참을 날 보았다.
나는 당당했다. 그래서 김채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김채민은 슬그머니 내 눈을 피해 아래를 보았다.
“…그래도 마법 이론을 많이 알고 계신다면 좋은 거죠. 근데 마법사도 아닌 우 선생님한테 이론을 가르쳐 줄 정도였으면 그때도 서현이랑 많이 친했어요?”
“아뇨.”
나는 부정했다. 그나마 오현욱은 아버지의 부탁으로 나를 돌봐 준 적이 있었지만 박서현은 아니다.
내가 관리청에서 일할 무렵, 박서현은 해외에서 더 많이 활동했다. 국내에 들어온 건… 아마 아버지나 누나의 부탁이 있었을 때만이었겠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마법을 가르쳐 줄 리가 없는데?”
“친했던 사람 부탁이었으니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지은 헌터의 부탁이었죠.”
“…유지은? 설마 그 지은이요? 혜은이 동생?”
“네. 그리고 마법이라고 해도 고유 마법 같은 건 아니었고요. 그건 같은 마법사라도 이해를 못 할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그림자 마법에 대해서도 얼추 알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한테는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잘 기억해 뒀다가 박서현 학생한테 은근슬쩍 가르쳐 주세요. 본인이 미래에 이루었던 거니 도움이 되면 됐지, 안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당연히 도움이 되죠…. 아직도 서현이가 자기 마법을 어려워하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컨테이너 교실이 놓여 있었던 작년의 시범고를 떠올렸다. 그 안에서 서럽게 눈물을 떨구던 학생 하나.
대마법사로 만들어 준다고 약속했었지.
내가 뭘 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해도 대마법사가 되는 인재가 어디 흔한 줄 아나.
여차하면 어떻게 손쓸 방법을 찾으면 되기도 했고.
그땐 나중에 쓸모가 있는 패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일단 우는 애부터 달래자는 마음이기도 했고.
“아! 그럼 서현이를 대마법사로 만들어서 일을 돕게 할 건가요?”
“네? 아뇨.”
“아니었나?”
이 아저씨는 또 왜 이래.
나는 신경질적으로 홍석영을 흘겨보았다.
“미쳤습니까. 애를 데리고 위험하게.”
“서현이 달랠 때 너무 수상하게 말하길래 여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뭐라는 겁니까….”
나는 눈을 찌푸렸다.
“노아 미셀을 상대하려면 이쪽 영향력을 키우는 편이 유리하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걜 데리고 뭘 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못 박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헌터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나도 관리청에 일하면서 던전에 들어가곤 했다. 그게 헌터가 아니면 뭐겠는가.
나와 함께 과거로 오겠다며 준비했을 누나는 오지도 못한 채 불타는 서울에 남겨졌다.
두 사람은 날 무지 속에 내버려 두었다. 그걸 지금 내가 고맙게 여기고 있는가?
앞으로 방주와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고, 내가 홍석영에게 말했듯이 양성고 아이들이 놈들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
…최소한의 선을 정하자.
“적어도 성인이 된 다음. 걔가 하고 싶어 하면요.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