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70)
선지자(1)
“흐응.”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는 기분 나쁘게 얼굴과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알렉스 호프는 눈을 깜빡이며 휴대폰 액정을 보았다. 요즘 세상 정말 좋다니까. 태평양 건너 있는 사람과도 얼굴 보며 이야기할 수 있고.
“흐으으응.”
알렉스는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휴대폰 액정 속에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뭐, 전화가 아니라 눈앞에 있었다면 겁을 먹고 이것저것 떠들어 댔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사이에는 태평양이 있잖아? 단숨에 태평양을 건너올 수도 없고.
알렉스는 아예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대기까지 하며 뜸을 들였다.
‘직접 얼굴을 보고 있었다면 간섭의 영향을 믿고 대충 둘러댈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알렉스는 홍석영의 옆에 있는 남자를 보고선 생각을 고쳤다. 간섭의 영향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 있지 않은가. 둘러대기는커녕 탈탈 털리고 말았을 거다. 지난번에 그랬듯이.
-알렉스 호프?
“잠깐만. 생각하고 있잖아.”
-뭘?
“이것저것.”
…둘러댈 필요가 있나?
“…….”
산드라가 알면 뭘 고민하냐고, 당연히 필요하다고 말하겠지.
저번에도 한참을 혼났다.
‘알겠어, 샨샨?! 중요한 패는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그게 나중에 내 목숨을 살린다고!’
하지만 던전 공략으로 생각하면, 그런 중요한 정보를 마지막에 가서야 내뱉는 놈이 있다면 아무리 성격 좋은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살려 둘 자신이 없었다….
알렉스는 아직 말하지 않은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말하지 말라는 산드라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걸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노아가 뒷목 잡고 넘어갈 만한 일은 많이 저질렀는데?
산드라야 이 모든 일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알렉스 호프라는 인간이 살아남길 원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산드라가 똑똑한 건 알지만, 인간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노아 미셀이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결국 인간인 것처럼.
자신이 어린 산드라에게 정체를 밝히고 도와 달라고 했을 때부터 알렉스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한 세계의 존망이 걸려 있는 일이다. 자기 편한 대로 편을 바꿀 수 있다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작은 @$%^*에 몸을 욱여넣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그래.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애정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알렉스 호프가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산드라의 장단에 맞추어 저쪽을 가늠해 보던 것도 인간의 인식에 간섭했던 것을 들킨 이상 할 수 없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아쉬운 건 이쪽이었고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협조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저번에도 산드라의 따가운 눈총 아래서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한 거 아니었겠는가.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라고 던전 목록을 정리해서 줬던 것도….
“……흐흥.”
게다가 다른 던전도 아니고, 지네가 잔뜩 있는 그 던전에 대해 물어보잖아?
얼마 전 산드라와 얘기했던 것도 있었고, 어쩌면 저쪽도….
알렉스는 결심했다.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역시,
말해야겠지.
“…….”
알렉스는 힘차게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아, 매번 산드라가 말했었지….
‘너 절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마. 특히 뭔가 중요한 것 같은 거라면! 나한테 무조건!! 먼저 말하고 해. 알았어?’
알렉스는 다시 옆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뜸을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통화 상대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지고 있다.
물론 알렉스 호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산드라 거기 있지?”
-갬블 박사?
홍석영은 슬쩍 카메라를 돌렸다. 머리를 괴상한 각도로 꺾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산드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 시간에 왜 일어나 있나 했었지.
한국 생활 초창기에는 할 게 없어서 강제로 해 뜰 때 일어나고 해 지면 자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참을 투덜댔었다. 산드라가 짜증을 내서 차마 말은 못 했지만, 알렉스는 그 생활이 건강에 더 좋지 않았나 싶었다. 인간의 몸은 연약해서 꼬박꼬박 잠을 자야 하고 밥도 먹어 줘야 했으니까.
지금은… 산드라의 말을 빌리자면 할 게 많았다. 그냥 질러 본 값비싼 장비들까지 턱턱 사 줬다고 했으니, 산드라를 잘 아는 알렉스로서는 금방 산드라의 미래가 그려졌다.
그나마 한국과 호주의 시차는 크지 않았으니 연락하는 게 어렵진 않았는데….
‘아니, 잠깐만. 그럼 산드라가 미국에 있을 때가 연락하기가 더 쉬웠던 거 아냐?’
동틀 때까지 깨어 있다 보니 호주에서 밤 시간대에 전화해도 다 받기는 했으니까.
이제 시간이 비슷한 한국에 있는 동안은 오히려 전화하는 게 힘들지도 모른다. 해 뜰 때 일어나고, 해 지면 자는 바른 생활을 하는 자신과 해 뜰 때 자고, 해 질 때 일어나는 산드라는 아무래도….
-갬블 박사에게 할 말이 있나?
“응? 음. 고민 중인데.”
꾸벅꾸벅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깨우기도 어쩐지 미안해졌다.
아까 엄마도 그랬었지.
‘샨샨, 산드라 좀 그만 괴롭혀.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산드라한테 도와 달라고 할 거니? 산드라도 이제 일하고 있으니까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하도록 해.’
알렉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인간 나이 스무 살이 넘었다. 성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도 남을 시점이다.
산드라는 욱해서 계획에 없던 일을 저지르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이미 충분히 고민했다. 지금 말하려는 이야기는 완전히 숨일 생각도 없었고, 이리저리 따져 봐도 역시 말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이 사람들이 이제 와서 노아와 손을 잡는 건 불가능하고….’
자신이 죽더라도 산드라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이들도 그 일을 알고 있는 편이 훨씬 낫다.
아마 산드라 갬블이 알았더라면 자기 뺨을 내려쳐서라도 잠에서 깨어났겠지만, 불행히 그러지 못했다.
뭐, 두 사람의 사정을 모두 알았더라면 길드 미미의 사람들은 코웃음 쳤을 것이다.
우희재는 역시 공부만 한 사람은 세상 물정 모른다며 산드라를 보며 혀를 찼을 것이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체 사이에서 중간 지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첨언과 함께.
아마 먼 미래의 산드라 갬블은 그 사실을 혹독한 대가와 함께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친동생처럼 아끼고 보살핀 친구가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되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지금의 산드라 갬블은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많고, 그걸 다 가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재기 넘치는 공학자였다.
그리고 알렉스 호프는 친누나처럼 아끼고 따르는 친구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저기, 있잖아.”
알렉스의 입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했다.
“너희 던전에서… 이상한 애들 만난 적 없어?”
-…이상한?
“왜, 그쪽이라면 많이 만났을 것 같은데.”
알렉스는 턱 끝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정리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카락. 육중하지만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잘 단련된 육체.
이 세계를 구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점쳐지는 인간.
홍석영.
“미래에서… 그쪽을 죽이러 왔다고 하는 애들.”
-…….
정말, 이게 전화라서 다행이다.
지난번에 이걸 말했다면 그냥 멱살 잡히고 마법으로 묶이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다.
“걔네가….”
팟.
“……응?”
알렉스는 멀뚱히 휴대폰을 보았다.
전화가 끊어졌다. 혹시 뭘 잘못 눌렀나? 이 연약한 인간의 발명품은 조금만 험하게 다루어도 고장 나기 일쑤였다.
화면을 툭툭 쳐 봐도 알렉스의 휴대폰은 멀쩡했다.
“…뭐야?”
왜 전화가 끊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산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신호음은 가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뭐냐고….”
* * *
“뭡니까.”
나는 한심함을 숨기지 못하고 홍석영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
“뭐냐고요.”
“그게.”
“뭔데요, 진짜.”
“…….”
홍석영은 황망한 얼굴로 손 안에서 박살 난 휴대폰을 보았다.
본인이 저질러 놓고서 그런 얼굴로 보아 봤자다.
“저놈 말에 너무 당황해서.”
“…….”
“아니, 하지만! 자네도 들었지?”
“들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제정신이에요? 거기서 휴대폰을 박살 내?”
“…….”
홍석영이 그 미래에서 왔다는 몬스터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나라도 내가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면 그걸 안 부쉈을 자신은 없다.
하지만 부순 건 내가 아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홍석영이 이렇게 일을 저지르자 오히려 진정된다.
생각하면 이렇게 놀랄 일은 아니잖은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내가 주웠던… 원래는 누나가 나와 함께 사용하려고 했을 그 시계도 방이동 던전의 지네 사체가 있었던 자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홍석영이 만났다는 몬스터도 있으니 그게 몬스터들이 사용하던 모종의 아이템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놈들이 머리가 있다면, 겨우 홍석영 목숨만 노려 보겠다고 과거로 오진 않았을 것이다.
던전 밖으로 나올 수는 없다고 해도 미래에서 온 존재가 있다는 것만 알면, 써먹을 방법은 많으니까. 게다가 놈들에게는 노아 미셀이라는 패가 있다….
나는 내 휴대폰을 꺼내 알렉스 호프의 번호를 치다가 멈칫했다. 그간 일부러 갬블을 경유한 이유가 무엇인가. 노아 미셀에게 우리가 호프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다.
노아 미셀이 간 크게 홍석영과 그 주위 인물을 조사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조심해서 나쁜 거 없지 않은가.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우리에 대한 경계도 많이 올라갔을 테니까.
“…갬블 박사.”
“…….”
“박사?”
홍석영은 내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갬블을 깨웠다.
“…네? 저 안 잤어요!”
“음.”
갬블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홍석영은 멋쩍은 얼굴로 박살 난 갬블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미안하네만 호프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는가?”
“…이거 제 휴대폰인가요?”
갬블의 얼굴이 더 수척해졌다.
갬블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홍석영과 박살 난 휴대폰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욕이 들린 것 같은데 못 들은 척했다.
“자… 여기요.”
갬블은 컴퓨터 앞에 앉아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웹캠을 통해 알렉스 호프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아! 방금 뭐였어? 왜 전화가 끊어진 거야?
“…그럴 일이 있었어, 샨샨.”
-산드라! 일어났어?
호프는 반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난감한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순간 깨달았다. 호프가 말하려던 그 정보. 갬블은 말하는 걸 반대한 거였군.
-뭐…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갬블의 눈치를 본다고 입을 닫으려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호프는 갬블의 눈치를 보는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아까 하던 얘길 마저 해서.
호프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우린 그런 자들을 선지자라고 불러.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