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73)
선지자(4)
“좋아. 그럼.”
-아, 아직도 남았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
“아까는 다 물어보라더니?”
알렉스 호프는 진저리를 쳤지만 그래도 말해 보라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아까 그 왕이 선지자라고 했잖아.”
-응.
“그러면 기존의… 과거의 왕은 어떻게 됐지? 지금도 같이 있는 건가?”
-그건….
호프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렇지 않아. 지금의… 미래에서 온 왕이 자길 죽여 버렸거든.
“…….”
제정신이 아니군.
새삼스럽지도 않다. 인간도 아니지 않은가.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유는 나도 몰라. 뭔가 시간이 꼬였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본인 마음이겠지?
“그래. 그렇다고 치고.”
-…아직도 질문이 남았어?
이제 호프는 노골적으로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나 막 던전 공략하고 나왔다고! 보통 일주일은 쉬게 해 준단 말이야!
“그건 네 사정이고.”
-너무하네, 진짜!
“그 왕 뒤로도 과거로 돌아온 이가 있었다면 왕도 죽었다는 소리인데.”
-어라? 그러네? 그렇게 되네?
호프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 어어? 진짜다. 나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누가 왕을 죽인 거지? 어떻게? 어떻게 그 왕을 죽일 수 있었을까?
“그걸 생각을 안 해 봤다고?”
-아니, 그치만!
때론 가까이 있어서 안 보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나도 그건 이해할 수 있다.
뭐… 이해는 했지만 넘어가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리고 그렇게 꼭꼭 숨기더니 이제 와서 순순히 털어놓는 이유는 뭐야?”
-어… 날 믿어 달라는 필사적인 몸부림?
“이제 와서?”
-음….
호프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이게 중요한 정보인 건 아는데 쓸모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쓸모없다고.”
-나도 머리가 있다고. 이걸 알아 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노아도 머리 터져라 고민하고 있는걸. 차라리 모르는 편이 활동하기 더 편할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
“…….”
-그래도 노아가 알고 있는 걸 모르는 것도 자존심 상할 테고, 그런 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편이 개운할 테니 그냥 딱 그러라고 말해 주는 거야.
알렉스 호프는 뭔가 대단한 선심 쓰는 듯 말했다.
이쯤 되니 알기 싫어도 놈에 대해서 알게 되는 수밖에 없다.
얘는 그냥… 나쁜 의도가 있기보다는 그냥 태생이 이런 놈이다. 한때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렇게 티가 나는 것이다.
* * *
미국 동부 어딘가.
“…….”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발소리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육중해 보이는 장비로 중무장하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깃털처럼 가볍다. 가끔 장비가 부딪치면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수준이다.
분대를 이끄는 이는 숨을 죽이고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계단을 타고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가 내려왔다.
끼이익….
낡은 계단에 무게가 실리자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분대장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대원 하나가 다가왔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확인한 대원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뭔가 대단한 절차는 없었다. 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잠시 멈추었던 진입은 재개되었다.
계단을 오른다. 이번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계단과 발 사이에 틈이 생겼다.
사람들이 오르며 무게가 실릴 때마다 계단 위에 푸른빛이 살짝 서렸다가 사라졌다. 마력으로 만든 발판이다. 아예 소리가 나지 않게 계단을 전부 덮은 것이다.
대원들은 각 층을 꼼꼼히 확인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내부는 비어 있었다. 깨진 유리창으로 바닥이 엉망이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공간인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확인 작업은 금방 끝났다.
위험이 없다는 수신호를 주고받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층으로.
더 높이.
그리고 마침내.
음악이 새어 나오는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부서진 문패가 덜렁거리며 달려 있다. 남아 있는 알파벳은 a와 n.
분대장은 옆으로 비켜섰다. 마법사가 문에 있는 장치를 확인하고, 뒤를 이어 문을 부수기 위한 장비를 가져왔다.
손가락을 들었다. 3.
장비를 들고 있는 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2.
대기하고 있던 이들 또한 무기를 든 채 호흡을 갈무리했다.
1.
쾅!
“손 들어!”
문이 부서졌다.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요란한 음악 소리 덕분에 진입 소음이 먹혔다. 안쪽은 벽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 둘러보아도 사람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분대는 기 긴장을 늦추지 않고 꼼꼼히 살폈다.
“아무도 없습니다!”
“젠장.”
분대장은 거칠게 욕을 토해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음악 좀 꺼 봐! 고막 떨어지겠네.”
뚝.
음악이 멈추자 기이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정적이 찾아왔다. 분대장은 방 안을 살폈다.
온통 낡아 빠진 가구뿐이다. 그 악명 높은 범죄 조직의 보스가 지내는 곳이라기에는 허름하기 짝이 없다.
“건질 수 있는 건 다 가져가야 해. 저 벽에 있는 것들 다 사진 찍어 놓고.”
“넵.”
“어디 이상한 트랩을 설치해 놨을지도 모르니까… 제임스! 네가 먼저 확인해. 알았지?”
“알겠습니다!”
분대의 유일한 마법사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분대장은 위태롭게 쌓여 있는 책 더미를 피해 벽으로 다가갔다. 오래된 신문 기사와 자료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
분대장은 종이 하나를 유심히 보았다.
[…에서 후원 중인 아동 확인] [위탁 가정] [현재 파악된 수: 3]딱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입술을 짓이기던 분대장은 일단 다른 곳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수상한 건 그거 말고도 있으니까.
“이 옷장은 또 뭐냐?”
“너무 함정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고풍스러운 옷장.
“뭐냐. 여길 열면 다른 세상과 연결되고 그래?”
“사자가 뛰어노는 곳이요?”
“그럴 리가. 다른 세상과 연결된다면 던전밖에 더 있겠냐. 제임스?”
“네, 마법은… 없습니다.”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실드. 셋 세고 연다.”
“넵.”
마법사가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자 분대장이 직접 옷장 손잡이를 잡았다. 3, 2, 1.
달칵.
팔랑.
“…종이?”
옷장 틈 사이에 끼어 있었는지 종이 한 장이 힘없이 떨어졌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다.
마법사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룬… 입니다?”
“룬?”
“룬이 왜.”
달칵.
그러나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 옷장 안에서 무언가 스위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쾅!!!!!
폭발이 꼭대기 층을 뒤덮었다.
* * *
같은 시각.
낡아 빠진 폐건물이 있는 곳과는 한참 떨어진, 도시 중심부에 있는 호화로운 고층 빌딩.
흰색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창가에 서 있었다. 잿빛 머리 색 때문에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에 보이는 얼굴은 젊은 청년의 것이었다.
헨리 레만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노래는 내 취향이 아닌데.”
그러나 음악을 멈추거나 다른 곡으로 바꾸는 일 없이, 레만은 그대로 두었다. 한참 음악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창가로 향했다.
번쩍거리는 도시 전경이 전부 눈에 들어오는 높이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개미만큼이나 작아 보였고, 바글거리는 인간은 그보다도 더 작게 보였다.
“이거… 제목이 뭐더라?”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 레만의 귀에도 익숙한 걸 보면 필시 유명한 곡이리라. 그래 봤자 수백 년도 더 전에 죽은 인간이 작곡하였겠지만.
죽은 인간의 노래에는 관심이 없다. 레만은 지금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인간의 노래를 듣는 쪽이 좋았다.
지이잉!
바이올린 소리가 찢어질 듯 높아졌다. 듣는 이에게 긴장감을 유발하는 소리였지만, 레만은 그보다는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바이올린이 다시 팽팽한 음을 내는 것과 동시에.
쾅!!
도시 한구석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한순간의 정적. 그 뒤를 잇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
헨리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 노래를 찾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곧 헨리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어. 다 됐어? …그래. 어차피 죽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어. 너무 간지러운 수준이잖냐. 누구였냐? FBI? CIA?”
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도시는 대낮처럼 환하다. 별 하나 볼 수 없는 하늘에 회색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마력 폭탄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지만 좋아하는 공간까지 날려 버렸는데 누구 하나 죽일 수 없었던 건 아쉬웠다. 그래도 건물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화력이었으니 가까이 있었던 한 명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마력 폭탄을 써야 했나? 하지만 그만한 위력의 마력 폭탄은 마법사에게 금방 들켰을 거다. 트리거 룬을 사용했던 것도 도박에 가깝다.
“…아, 그래?”
그러나 이어지는 보고에 레만은 화색을 띠었다.
“그만큼 썼는데 다치지도 않았다면 억울하지.”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경찰차와 소방차가 보였다. 아마 뉴스에는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건물에서 가스 누출로 인한 폭발이 있었다고 뜰 것이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고, 어쩌고저쩌고.
“…어느 쪽인지는 봤고? 협회는 아냐?”
그 외에는 크게 도움이 되는 보고는 없었다.
헨리 레만은 짜증이 나는 건지, 아니면 웃음을 터뜨리는 건지 모를 미묘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아아. 진짜… 어쩐 일로 몸소 경고해 준다고 하더니. 정말 사람 짜증 나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레만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서 노아가 싫어하나 봐.”
여전히 이름 모를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헨리 레만은 다시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저번에 작업해 놓으라고 했던 건 다 끝났어?”
“…….”
“그래? 그럼 대기하고 있어.”
레만은 짧게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이제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를 숨기지도 않았다.
이를 으득으득 갈다가 결국 헛웃음을 터뜨린다.
“노아가 여기까지 허락해 줬을 것 같진 않은데…. 아닌가? 노아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아예 모른 척하기로 한 거?”
작년 겨울, 굳이 누추한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아가씨를 생각하며 헨리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찾아와 직접 경고를 날리던,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요정까지.
“홍석영… 홍석영. 그 인간이 문제군.”
두 사람의 입에서 똑같이 거론되던 이름이다.
그렇게는 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헨리 레만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도 홍석영을 꾀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그 남자가 던전에 들어갈 때가 기회지.”
도시에는 수많은 개미가 움직이고 있다. 레만은 자신 또한 저 개미의 입장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후에 살아남는 개미가 될 거라고, 나는.”
판을 뒤엎기 위한 동전이 던져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