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8)
개꿈(3)
과거를 바꾸는 창작물은 많다. 영화, 소설, 만화….
나도 괜찮게 본 것들이 몇 개 있다.
보통 그런 종류의 창작물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이, 주인공은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나 실수 따위.
어떻게 잘 해결해서 그대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창작물도 있지만 더 결과가 나빠지는 것도 있다.
사람 인생이란 게 다 그렇지.
하지만 가끔 그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타인에 의한 강제적인 불행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왜 후회하는지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누구나 말리는 선택지를 자신의 손으로 기어이 선택했던 경우라면.
보통 남들이 말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걸 다 뿌리치고 자기 갈 길을 갔다면 최소한 그 선택에서 당당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이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도 없고, 길 가다가 벼락 맞는 확률을 구할 수도 없다. 그런 자의 밖의 불행이 아니라면…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란 말이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과거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항상 옳은 선택만 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난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더라도 당시에는 그게 나에게 최고의 길이었던 거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 이상 남 탓할 때가 간혹 있다. 하지만 들어 보라고. 내 잘못이 아닌데 내가 피해를 보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쟤 잘못인데? 이건 남 탓이 아니라 정당한 비난이다.
“절 제자로 받아 주세요!”
뭐… 그래.
대한민국이, 세계가 멸망한 게 내 잘못이던가? 유지은의 고집대로 방이동 던전을 공략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까?
방이동 던전이 제일 처음 터지긴 했지만, 그걸 막았다고 과연 다른 던전이 안 터졌을까?
착각하면 안 된다. 그날 서울을 박살 낸 놈은 지네 말고도 더 있었다. 불을 뚝뚝 떨어뜨리며 걸어 다닌 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 정체 모를 아이템이 지껄이는 대로 있었을 뿐이다. 그게 과거로 날려 보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고민했어도 달라졌을 것 같진 않다. 거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내가 말하려는 건,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다.
팔자에도 없는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어린 유지은을 만나서 되지도 않은 미친 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모두 내 잘못이 아니다.
“절! 제자로!”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고 있어야 하지?
“제자로 받아 주세요!”
“뭐?”
“제자요!”
“누굴?”
“저요!”
“…….”
내가 아니라 아저씨나, 하다못해 유지은이 과거로 돌아왔다면 더 잘했을 거다. 그 두 사람은 뭔가 사명감 같은 걸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하필이면 왜 내가 이곳에 와서 이러고 있냔 말이다.
“선생님뿐이에요!”
냉정하게 생각하자, 냉정하게. 내가 이 학교에 얌전하게 붙어 있는 이유. 내 안락한 노후, 아니, 미래의 멸망을 막을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였지 않은가.
박서현. 오현욱. 거기에 유지은?
전부 보장된 천재들이다. 이렇게 덥석 달려오면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제자로.”
“넵.”
“내가?”
“네!”
“널… 말이지.”
그러니까, 생리적인 거부감은… 내 개인의…… 개인적인 문제니까…. 극복, 극복을 하고…. 사적인 감정을 일에 담으면 안 되지… 안 된….
아니,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지은이잖아!! 그 못돼 먹은 아줌마!!!
유지은이든 새끼 유지은이든 유지은은 유지은이다.
어떤 유지은이든 내 곁에 두고 싶진 않았다.
“안 돼.”
“왜요?”
“마법사도 아닌데 내가 제자 같은 걸 왜 둬.”
“하지만 언니랑 오빠들은 가르치잖아요! 저도 제자로 받아 주세요!”
무작정 우기고 보는 건 똑같네. 마지막까지 나한테 고집만 부리던 그 여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여기서 월급 받는 교사고, 쟤네는… 너희 여기에 등록금 내던가?”
여덟 명의 아이들이 나란히 고개를 저었다.
“등록금은 안 내지만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잖아. 학생들 가르치라고 돈을 받는데 가르쳐야지.”
“그치만….”
유지은은 볼을 부풀렸다. 젖살이 남아 있는 얼굴이 더욱 어려 보였다.
“열여섯 살이라며? 반년만 있다가 중학교 졸업하고 여기로 오면 되잖아.”
아저씨의 애제자를 내가 뺏을 순 없다.
“그건 너무 오래 걸려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뭐, 배움에 열정이 있는 건 학생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자세지만… 역시 아저씨의 수제자를 뺏을 순 없지.
게다가 멋대로 유지은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가 홍석영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정작 내 감시역으로 남겨졌을 김채민은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유지은이라고 했지?”
“네….”
“막 각성해서 들뜬 건 알겠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차분히 먹어야 해. 교장 선생님도 곧 돌아오실 테니까 그때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어떠니?”
“그래도….”
“서두른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교복을 입고 우울하게 미소 짓던 여고생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리고 한치 흔들림 없이 던전을 공략해 나가던 강인한 헌터의 얼굴도.
유지은은 박서현이나 오현욱과는 다르다.
박서현과 오현욱은 아저씨 밑에서 마녀와 돼지가 되었다.
앞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히죽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마녀와 술독에 빠져 뒤룩뒤룩 살만 쪄 가던 돼지.
박서현과 오현욱이 그렇게 되었던 근본적인 원인, 명동 사태는 이제 사라졌지만, 박서현을 봐라. 방심할 수 없다. 뭐가 문제 되어서 애들이 또 마녀와 돼지가 될지는 모른다.
“내가 보기에 학생이라면 분명 대단한 헌터가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유지은은 미래에서 스스로 극복해 냈다. 최소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 유지은을, 내가 괜히 손댔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냥 아저씨한테 맡겨 놓으면… 똑같이 크겠지.
남들이 뭐라 하든 우직하게 던전을 공략하는 단단한 바위 같은 여자가.
“하, 하지만.”
유지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다 큰 유지은이나 새끼 유지은이나 고집이 센 건 똑같다. 한 번 말해서 알아들은 적이 한 번도 없지.
“각성하고 나서 한 달이 골든 타임이라고 들었단 말이에요.”
“골든 타임?”
“…각성하고 삼 일 안에 마력으로 혈관의 노폐물들을 빼내야만.”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람이 너무 어이없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래야,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새끼 유지은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력으로 혈관을 깨끗하게 한다고? 벌모세수 같은 거야?
도대체 그게 뭔데?
그건 소설 속 이야기고 실제로 마력은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짓을 했다간 혈관이 터져서 죽을 거다. 운이 좋으면 사지 마비로 끝날 수 있을 테고.
“다들?”
유지은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인터넷에서….”
2021년은 도대체 무슨 시대인 걸까.
이 시대 각성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혹시나 싶어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저 말을 믿는 멍청이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잖는가.
“너희 중에서도 저 말 믿는 애 있어?”
“어….”
“들어 본 적은?”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한 명, 주춤거리며 입을 연 아이가 있었다.
“들어 보기는 했어요….”
“한은영 학생? 어디서?”
“각성하고 나서는 잘 모르겠지만 혈관의 노폐물을 마력으로 빼내면 수명이 연장되고… 뭐 그런 거요.”
“누가 그래?”
“누가 그랬다기보다는… 잠시만요!”
한은영은 컨테이너로 뛰어가더니 종이 한 장을 들고 돌아왔다.
“아침에 선생님 기다리다가 받은 건데요. 버릴 곳이 없어서 그냥 가방에 넣어 놨었거든요.”
배경에 무지개가 찬란하고, 크기가 맞지 않는 촌스러운 글씨가 전단지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마력의 효능. 혈관의 노폐물. 수명 연장. 영혼의 정화.
전부 개소리라는 점까지 완벽하다. 전단지를 샅샅이 살폈다.
나는 눈을 꾹꾹 누르다가 아이들을 보았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김채민마저 침을 꼴딱 삼키고 있다.
“이거 주는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면 절대 가지 마.”
“…그건 당연하죠.”
“그리고 학생. 유지은 학생?”
“네, 네?”
언니가 죽지 않은 유지은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내가 아는 유지은도 한때 이렇게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만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러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믿으면 안 돼.”
“네……”
유지은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오늘은… 일단 언니 수업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리고.”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각성자 등록은 교장 선생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렴. 금방 오실 테니까.”
“저 제자로 받아 주시는 거예요?”
“아니.”
유지은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차라리 교장 선생님께 물어봐.”
“윽. 홍 아저씨는 제자 들일 생각 없다고 했는데요.”
그것도 정작 유지은이 시범고에 입학하면 생각이 바뀔 거다.
나는 유지은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체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 충분히 쉬었지? 수업 시작한다! 김 선생님, 얘 데려가세요. 언니 옆에 있는 게 좋겠죠.”
김채민은 부루퉁한 얼굴의 유지은을 데려갔다. 유혜은이 그 옆에서 미안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시범고에서 어떤 수업을 하는지 참관한다고 생각하렴.”
“입학 안 하고 싶어질 텐데….”
이승연이 입을 쭉 내밀었다.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재밌어할 수도 있지.”
“이게요?”
“난 재밌는데. 너흰 재미없어?”
나는 코웃음 쳤다.
“너희가 아직 약해서 그런 거야.”
* * *
김채민의 연락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홍석영은 그날 밤 돌아왔다. 유지은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가.
숙소에서 쉬던 나는 그대로 불려 나왔다. 김채민도 같이 나와 있었다. 홍석영은 사람 없는 동네 호프집으로 우릴 데려갔다.
유지은의 각성 소식을 들어서 온 것치고는 표정이 시원찮다. 그게 아니라 던전 때문인가? 방이동 던전에서 뭔가 발견되었나?
하지만 그 던전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십 년 동안 속 한번 안 썩인 얌전한 던전이었다. 지금이라고 그 점이 달라졌을 것 같진 않다.
홍석영은 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한참을 고사 지내다가 입을 열었다.
“지은이가 각성했다고?”
“네. 듣자 하니 홍 헌터님과 원래 아는 사인가 보던데요.”
“아주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어린애 둘이서 지내는 게 안타까워서 돌봐 주고 있어.”
홍석영은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김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애가 여간 당돌한 게 아니던데요. 우 쌤 보자마자 자길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면서 그러는 게….”
“제자?”
홍석영의 눈이 반짝 빛난다. 제자와 똑같은 눈빛이다.
“우 쌤이 애들 굴리는 걸 봤는데도 포기를 안 하더라니까요. 우쌤이 그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봤어요.”
김채민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홍석영을 살폈다. 저 아저씨가 골치 아픈 생각을 하기 전에 시선을 돌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이거 보십시오.”
아까 한은영이 내게 보여 주었던 전단지다. 마력이 어쩌구 떠들어 대던 그거.
대충 봐도 수상한 내용이긴 하다. 사이비 단체에서나 떠들어 댈 것 같은 말이지 않은가.
그 말이 맞다.
이건 방주에서 회원을 모집할 때 쓰는 방법이니까.
“아니, 나부터 하지.”
그러나 홍석영은 내가 내민 전단지를 보지도 않고 옆으로 치웠다.
홍석영은 품속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다. 창백한 안색.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사람 시체에 놀랄 연약한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 나에게 보여 주는지 영문을 모를 뿐이다.
“송파구 던전에서 발견한 시체일세.”
어린 내가 일기에 적어 놓은 이유가 있긴 했군. 똘똘한 녀석.
“혹시 아는 얼굴인가?”
당연히 모르는 얼굴이지만 예의상 유심히 뜯어보는 척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대답했다.
“모릅니다.”
“정말?”
“네. 모릅니다.”
홍석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넬 방주에서 꺼내기 위해 몸 바쳐 도운 김 군인데. 정말 모르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