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83)
보복(3)
“산드라가 보는 드라마에서는 다들 이러던데.”
알렉스는 지갑을 꺼내 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목소리를 낮게 깔아 봤자 어린애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FBI입니다. 협조 요청합니다… 였나?”
똑같이 FBI 재킷을 입고 있는 세 헌터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제발 얌전히 있어. 알았어?”
“나도 재밌는 거 하면 안 돼?”
“이건 재미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그건 나도 알지.”
“모르는 것 같은데.”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즐겁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알렉스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 봤자 창밖으로 이어지는 풍경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곧 알렉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노래 틀어도 돼?”
“그러니까… 아냐, 틀어. 그래. 틀어라….”
국제이능협회 사무국 특수활동부 한국지부 작전부서 소속이자 다선의 8년 차 베테랑 헌터 강소윤 팀장은 그 짧은 사이 진이 빠져 중얼거렸다. 곧 우중충한 차 안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왜 이 녀석을 데려가야 한다고 한 거지.’
사실 이유는 안다. 이유를 알고 있으니 얌전히 차에 태우고 가고 있는 거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똑같이 심기가 불편한 티를 내는 최대현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어린 지유건은 알렉스에게서 무언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창 의욕이 넘칠 때긴 해.’
강소윤은 미지근한 눈으로 후배를 보았다. 어디에 갖다 둬도 잘 살 인간이기는 했다. 솔직히 요 몇 달 동안 양성고에서 하던 짓을 보면 헌터가 아니라 카페나 음식점을 열어야 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데 그쪽에 가면 뭔가 알 수 있는 게 있어?”
“알 수 있는 거?”
“레만이 애들을 알아차렸다고 경고한 게 호프 씨라던데….”
“호프 씨? 진짜 나이 들어 보인다. 난 아빠가 아니니까 그냥 알렉스라고 불러.”
알렉스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애들을 보내기 전에 마크를 남겨 놨어.”
“마크?”
“산드라가 주기적으로 아이들을 확인하긴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잖아. 원래 내가 걱정했던 건 헨리가 아니라 던전 브레이크였어.”
“던전 브레이크….”
의외로 현실적인 위험이 튀어나왔다. 하긴, 아메리카를 주름잡는 범죄 조직의 두목보다는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기도 했다.
“잘못해서 휘말리기라도 하면 위험하잖아. 내가 그 고생을 하며 살려 낸 목숨인데!”
알렉스는 자기가 어떤 수고를 하면서 아이들을 빼돌렸는지 한참을 설명했다.
심드렁하게 대화를 듣고 있던 강소윤도 슬쩍 귀를 기울였다. 알렉스와 산드라가 아이들을 구한 건 알고 있지만 자세한 과정은 알지 못했었다.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잖은가.
“…그렇게 한 거야!”
그러나 설명을 들은 강소윤의 표정은 다시 미묘해졌다. 강소윤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가능하다고?”
“응!”
“어떻게?”
“그냥 잘?”
“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최대현은 꽤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마법사인가? 그게 고유 마법이고?”
“아하하, 아니. 난 마법사는 아냐. 고유 마법도 아니고.”
“하지만….”
“사람들의 정신은 생각보다 그렇게 견고하지 않거든.”
알렉스는 태평하게 웃었다.
“그냥 약간의 간섭일 뿐이지.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의외로 잘 먹혀.”
“그러니까 그게….”
“이해하기 힘들어? 하지만 세상엔 수많은 비밀이 있는걸! 그걸 다 알려고 하면 무슨 재미야?”
이게 재미로 하는 일이었으면 진작 그만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항변이 이어지기도 전에 알렉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흔들었다.
“정 아니면 그냥 고유 마법이라고 생각해도 돼. 마법사도 아니고, 대마법사도 진짜 아니지만 비슷한 거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잖아?”
“…흉내라.”
그래. 그거라면 그럴 수 있.
……있?
…있나?
그럴 리가 없지!!
끼이익!!!!
자동차가 거칠게 도로 위에 미끄러졌다. 최대현이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지유건이 창문에 바싹 붙어 호프를 경계하고 있는 걸 보면 모두가 똑같은 기분을 느낀 것이다.
호프는 태연하게 웃었다.
“어때?”
“바, 바방금, 그게?”
“아는 사이니까 효과는 금방 깨졌지? 하지만 마력을 느낄 수 없는 사람에, 지쳐 있거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은근 오래 가거든. 게다가 왜곡을 깨트릴 만한 다른 일도 없으니까.”
호프는 주위를 보았다.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FBI 옷 입고 있는데 사고 내면 큰일이잖아.”
“……너.”
“이건 본능이라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은 크지 않지만… 유도는 할 수 있어. 그래서 조잡한 가짜 시체로도 수사관을 속일 수 있었던 거지.”
호프는 드라마에서 본 FBI를 흉내 내는 것처럼 다시 목소리를 깔았다.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의 짓이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
“내가 나이가 더 들면 이 방법도 못 쓸 거야. 지금도 애들 빼돌렸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약해졌거든.”
호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나도 고생을 한 건 사실이야. 가짜 시체를 얹어 놓고 뒷수습할 때까지 쫓아다니며 인식을 방해한 게 누구라고 생각해? 그렇게 공들였는데 그걸 헨리가 방해하면 안 되지!”
강소윤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최대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자동차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좀 더 느린 속도였다.
호프는 그런 세 헌터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아, 뭐. 어쨌든 원래는 헨리가 아니라 던전 브레이크 때문이었다는 거야. 그걸 핑계 삼아 빼 왔는데 거기에 휘말려서 다치기라도 하면 내 마음도 좀 그렇잖아? 억울하다고?”
“…….”
“그래서 마크를 남겨 놓은 거야!”
다른 사람들의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프는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강소윤은 뒤늦게 지유건이 처음 호프에게 물었던 질문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호프가 왜 여기에 같이 가느냐고 물었었지.
“비정상적으로 강한 마력 파동과 접하면 내가 알 수 있도록 해 놨어. 몬스터든 뭐든….”
처음으로 호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내가 빼돌린 애들한테서 동시에 알람이 온다?”
“…동시에 왔다고?”
“알아. 함정이겠지.”
호프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한 거겠지?”
“아하하하.”
호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잖아?”
* * *
알렉스 호프의 ‘능력’은 현장에 도착해서 빛을 발했다.
“FBI입니다. 연락이 갔을 텐데요.”
“네, 뭐….”
관할 지역의 경찰관들은 미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저쪽도 FBI입니까?”
경찰관은 세 명의 헌터 뒤에 멀뚱히 서 있는 호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잘 쳐줘도 FBI 보호를 받고 있는 가출 청소년처럼 보였다.
로버트 킴이라는 가명을 댄 강소윤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호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살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브리엘 블레이크라고 합니다. 전 수사관이 아니라 분석 전문이라서 이 아저씨들처럼 딱딱하지 않아요.”
“아하… 그런데 그럼 어쩐 일로…?”
경찰관은 여전히 떨떠름하게 물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경계심이 풀어졌다.
“그 친구가 왜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받고 있는지는 알고 계시죠?”
경찰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사건에서 제가 그 친구를 보호했었거든요.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아이도 안심이 될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애가 겁을 많이 먹었더라고요.”
“어휴, 그래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잘 웃고 밝은 애였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역시 무리해서 오길 잘했네요! 사실 무리는 아니긴 해요. 제가 담당하는 사건이기도 해서.”
호프는 수줍게 웃었다.
얼핏 얌전해 보이는 모습에 호프와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본 세 헌터는 표정 관리를 위해 미간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간 보아 왔던 것이나 들었던 것이나, 호프는 저렇게 사회성 넘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치 산드라 갬블에게 인격과 사회성을 모두 맡겨 놓은 것처럼 굴었는데!
그나마 팀장이라고 강소윤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아, 여기 필요한 서류가 있습니다.”
“어디… 네. 아이를 먼저 확인하겠습니까?”
“그래도 될까요?”
경찰관은 강소윤이 건넨 서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호프와 떠들기 시작했다. 강소윤은 그걸 멍하니 바라보며 호프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알게 된 것?
이상할 정도로 잡음이 없다.
최대현은 무슨 귀신 들린 인형을 보는 것처럼 호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소윤은 그런 최대현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자신도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까지 엮여 있는 문제이니 잔뜩 날이 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사실인데, 강소윤에게는 눈을 부라렸던 경찰도 호프가 나서서 이야기하면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심지어 호프는 어느 순간부터는 커피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도 식당 커피포트에서 몇 시간 동안 팔팔 끓여진 맛없는 커피가 아니라 전문 카페에서 주문해 휘핑크림까지 올려진 놈으로.
당연하지만 세 헌터에게 주어진 것은 없었다.
“…….”
호프의 얼굴에 매달린 미소가 더 짙어질수록, 마침내 경찰들이 나서서 에스코트까지 해 주는 꼴을 보면 볼수록 강소윤은 그 ‘왜곡’이 어떤 건지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마법인 쪽이 낫습니다.”
지유건이 주위에 들리지 않게끔 작게 속삭였다.
“이런 게 마법이 아니라면 그게 더 무섭다고요….”
강소윤도 동감하는 바였다.
세 헌터가 어떻게 생각하든 경찰관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던 호프는 드디어 보호 중인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와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야무지게 머리를 묶은 아이는 호프의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어! 예쁜 오빠다!”
“안녕, 소희야. 아니지, 너 이름 바꿨었지? 소피아? 잘 지냈어? 경찰 아저씨들이 잘 대해 줬고?”
“응!”
여자아이는 호프의 허리에 매달려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만일 경찰들이 호프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대도 저 모습을 보고 완전히 풀렸을 것이다.
사실 그건 세 헌터도 마찬가지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들이 무사히 살아 있는 것도 알고 있고, 어떻게 아이들을 빼돌렸는지도 호프에게서 들었지만 막상 그 증거를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달랐다.
“갑자기 이렇게 돼서 많이 놀랐을 텐데. 괜찮아? 혹시 불편한 거 있어? 오빠한테 말해 주면 경찰 아저씨랑 경찰 아줌마한테 전해 줄게.”
“아아니, 괜찮아.”
한국어로 진행되는 대화 덕에 미국인 경찰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한국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을 테니 같은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친해졌다고 생각한 듯했다.
뭐, 그렇게 생각하면 이쪽도 편하다. 동양인 FBI 요원 세 명이 파견된 이유로 적절하니까.
강소윤은 아이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굽혔다.
“안녕, 소희야.”
“…안녕하세요.”
호프에게는 잘만 매달리던 아이는 성인 남성 세 명은 잔뜩 경계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강소윤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강소윤은 한국에서부터 소중히 챙겨 온 봉투 하나를 꺼냈다.
“……?”
“태우 오빠가 너한테 주라더라.”
“아저씨, 우리 오빠 알아요?!”
아이는 경계심을 풀고 활짝 웃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