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88)
할 일(1)
짝!
“…좋아요.”
김채민은 찰싹 소리가 나게 자기 뺨을 내리쳤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프는 보건실 한구석에서 보건 교사의 감독하에 있다. 할 수 있는 치료는 모두 다 했다.
보스턴시가 던전을 닫고 시를 정상화하자 자연히 인터넷도 복구되었다. 그러자 시민들이 찍은 영상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다.
그중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역시, FBI 재킷을 입은 헌터였다. 실제로 FBI인지 묻는 질문도 많았고, 가까이서 찍은 영상이 풀린 뒤로는 10대인 거냐고 경악하는 반응이 있었다. 호프가 자길 찍는 걸 몰랐을 리는 없고, 일부러 내버려 둔 건가.
깃털 달린 뱀 형태의 몬스터는 보스턴 상공을 날아다녔고, 호프는 그걸 쫓아다니며 싸웠다. 덕분에 목격자는 차고 넘쳤다.
어찌 되었든 목격자가 많으니 뱀에게 물린 것도, 그 상태로 뱀의 몸통을 찢은 것도, 그리고 사라진 것도.
호프의 정체도 쉽게 밝혀졌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힘든 탓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얼 했나,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민들이 올리는 영상이나 목격담들을 막지 않았다. 올라오면 올라오는 대로 놔두고, 소문이 덧붙는 걸 지켜보았다.
호주의 헌터가 미국에서 뭐 하고 있냐를 두고 음모론이 돌아도, 아들을 잃은 호프 부부에게 기자단이 들이닥쳐도, 그냥 가만히 놔두었다. 알렉스 호프는 죽었으니까.
그리고 호프와 막역한 사이라고 알려진 산드라 갬블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다행히 산드라 갬블은 홍석영의 보호 아래에 있다. 양성고 부지는 홍석영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유지다. 인터뷰 요청은 들어왔지만 허락 없이 이곳에 접근할 만큼 간 큰 인간들은 없었다. 룬을 공개했을 당시 허가 없이 들어왔던 이들에게 강력한 법의 철퇴를 맛보여 주었던 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 이제.”
아이들에게는 당분간 학교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나갈 수 없지 않냐는 원성을 들었다. 그걸 무시하고 운동장에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차피 말할 사람도 없다고 말하길래 너흰 학교 밖에 친구가 없냐고 물었다가 그럼 선생님은 있냐는 말을 들었다.
…내 친구들은 지금쯤 우이록처럼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겠지.
나는 김채민을 보았다.
“이제?”
“할 일을 해야죠!”
정론이기는 한데, 겨우 이 말을 하려고 자기 뺨을 내리쳤던 건가.
“방금까지 우리가 한 건 뭡니까?”
“할 일이었죠!”
“그럼 김 선생님이 하자고 하는 건?”
“할 일이죠!”
“…일이 끝나지가 않는군요.”
“그게 바로 현대 직장인의 애환이죠!”
원래라면 그런 애환 따위는 느낄 일 없었을 대마법사는 발랄하게 웃었다.
정말 즐거워서 웃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할 일이 뭡니까?”
“몬스터 시체부터 분석해야죠.”
“아.”
“왜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깜빡했네요.”
“그걸요?”
“보통 분석은 제가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분석해 온 걸 읽는 위치였거든요.”
“으. 재수 없어.”
김채민은 침잠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평소보다도 더 밝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 선생님은 제가 분석한 결과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면 돼요.”
“저 하는 일 없다고 욕하는 겁니까?”
“욕이라뇨? 그렇게 들렸다면 우 선생님이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거겠죠.”
“저처럼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요.”
김채민은 내게 익숙한 표정을 지었다.
김채민이 자주 지었다기보다는, 똑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을 종종 보았다. 보통 나한테 된통 깨진 관리청 직원들이었다.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을 때 짓는 표정.
그러나 김채민은 괜히 대마법사가 된 게 아니었다. 내 부하 직원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인 동료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부지런하고 바지런하신 스승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 이 부족한 제자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죠.”
…아니, 그런데 나보고 스승이라며. 제자가 스승의 말에 토를 달아도 되는 건가? 마법사들은 그런 거에 예민하잖아.
그러나 나는 제자의 실수에 너그러운 스승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보스턴도 정리가 되었으니까요.”
김채민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피해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면서요?”
“미국이고, 대도시니까요. 그만한 도시에 상주 중인 길드가 하나만 있겠습니까.”
“아. 하긴. 네, 그래서요?”
“보스턴에 파견되었던 이 헌터님네 헌터들이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더군요.”
김채민은 미간을 좁혔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를 그제야 되짚어 보고 있는 눈치다.
“하던… 일이라고 하면.”
“이틀 뒤에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온답니다.”
“아. 아아아. 그렇죠, 네. 기억하고 있었어요! 하하, 어떻게 그걸 잊어버리겠어요? 당연히 기억하죠.”
“네, 뭐.”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이제 이 사태를.”
나는 운동장에 있는 몬스터를 보았다. 머리만 남았다고는 해도 워낙 크기가 커서 학교 어느 건물에서도 볼 수 있다.
며칠 지났는데도 몬스터의 사체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잔뜩 뿌려진 피도 마르지 않았다. 아직도 그 위를 걸으면 찰박찰박 소리가 날 정도다.
더운 날씨는 아니지만 부패도 하지 않는 사체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태우 학생한테 설명해야죠.”
“……음.”
김채민은 삐죽거리던 입술을 얌전히 집어넣었다.
“그럼 각자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는 걸로 해요.”
김채민은 빠르게 발을 뺐다.
“이참에 김 선생님도 아이들과 한번….”
“전 지금으로 충분해요!”
그간 보아 온 김채민 성격이라면 애들 말도 잘 들어 줄 것 같은데.
절대 내가 상담 일을 김채민한테 넘기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긴, 그렇다 하더라도 더 잘하는 분야를 두고 다른 일을 시키는 것도 손해기는 하다. 나는 운동장에 있는 몬스터 사체를 가리켰다.
“그럼 저거나 빨리 치워 주세요.”
“분석부터 해야죠.”
“네. 분석이든 뭐든 빨리하고 치우세요. 저런 게 학교에 더 있다가는 아이들한테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어머.”
그러나 김채민은 내 말에 동의하는 대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웃었다.
“헌터가 될 각오를 했으면 저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봐야죠. 이제 더한 것도 보게 될 텐데.”
“…….”
나는 김채민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냥 역시 할 일 하는 걸로 합시다.”
“제가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네, 네. 죄송하게 되었군요.”
김채민은 소리 높여 웃었다. 요 며칠간 정신력 소모가 심한 일이 있었다 보니 저 웃음소리도 아주 오랜만에 듣는 기분이 들었다.
* * *
강태우와의 상담을 시작하기 전.
나는 갬블을 찾아갔다. 지금의 갬블이라면 내 말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따라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을 이용하면 안 된다고 배우긴 했지만. 이건 이용이라기보다는, 글쎄. 부탁이지. 어차피 갬블의 목적이나 우리의 목적이나 같다.
아니, 지금의 갬블은 방주보다는 헨리 레만을 더욱 목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에요?”
갬블은 퀭한 얼굴로 말했다.
이용이든 부탁이든, 헨리 레만을 죽이든 체포하든 여하튼 그놈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이유를 묻지 않고 뭐든 해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긴 했다마는.
저… 얼굴을 보고서는 하려던 말도 나오지 않게 된다.
거뭇거뭇한 눈 밑. 버석하게 마른 입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달달 떨리는 손. 잔뜩 눌어붙은 자국이 있는 커피잔.
“안 잤습니까?”
“…….”
갬블은 내 시선을 피했다.
이건 뭐.
“…자고 일어나면 말합시다.”
“얘기해도 돼요.”
“그 상태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1 더하기 1이 뭔지 압니까?”
“…….”
갬블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코웃음 쳤다.
“3이잖아요.”
“…….”
“농담이에요. 4?”
“…….”
“아, 진짜 농담이에요. 5잖아요! 봐요, 괜찮으니까 얘기해요. 나한테 뭐 시킬 거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갬블은 정확하게 내 목적을 짚어 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곤해 죽어 가는 와중에 눈만 번들거린다.
“나 지금이라면 뭐든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이런 기회 드물다고요.”
“…….”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원주율도 50자리까지는 바로 외울 수 있어요. 100자리까지는 조금 가물가물한데, 원래 제 전공은 그게 아니거든요.”
갬블은 자신의 멀쩡함을 피력했다. 그럴수록 멀쩡하지 않다는 사실만 분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덟 시간은 푹 자고 오세요.”
“…….”
“평소에는 오후 한 시나 되어서야 일어나는 사람이.”
“…그렇다고 해도 여덟 시간씩이나 안 자요!”
“그러니까 사람이 그 모양이죠.”
“그러는 당신도 여덟 시간은 안 잘… 아니, 잠깐만요. 그거 무슨 뜻이에요? 나 한국말 못한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내 동생보다 한국말 잘하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나는 갬블의 손에서 커피잔을 가져왔다. 잔이 아직 따뜻하다. 커피를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커먼 구정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모금 마셔 봤다.
“…….”
세상의 모든 쓴맛과 모든 단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차마 입에 들어온 걸 뱉지는 못하고 억지로 삼켰다.
“제정신입니까?”
“왜, 왜요. 그거 마시면 정신이 든 다고요.”
“그리고 죽겠죠.”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마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할 일이 있기는 한데, 제정신일 때 얘기하자고요. 알겠습니까?”
갬블은 내 손에서 커피잔을 가지고 오려다가 실패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꼴이 안쓰럽다기보다는 볼품없어 보여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호프는 괜찮을 겁니다.”
“…….”
“치료 다 한 거 확인했잖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이잖아요. 아직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원래 던전 공략은 다 이렇습니다. 호프 정도면 상태가 좋죠.”
사람 달래는 건 어렵다. 아이들이라면 그래도 그동안 보아 왔던 게 있으니 성격에 맞춰서 어떻게 해 보겠는데… 갬블은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원래 시간대에서도 산드라 갬블과는 친분이 있지도 않았어서 어땠는지도 모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갬블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냐고 하면, 글쎄.
그러나 누가 봐도 갬블은 위로가 필요한 상태다. 그래, 갬블이 받은 충격 자체는 나도 이해할 수 있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 온 친구가 중상을 입고 며칠 동안 의식 불명이라면 나라도 걱정된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사님도 원하는 게 있고, 계획이 있으니까 잠도 안 자고 여기에 나와 있는 거겠죠.”
나는 갬블의 몰골만큼이나 엉망인 연구실을 가리켰다.
“할 일을 하는 건 좋습니다. 말리지 않아요. 하지만 할 일만 하는 건 안 돼요.”
“…말장난이잖아요.”
“현실적인 조언이죠.”
나는 들고 온 파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갬블의 시선이 움직였다.
“할 일이 있을수록 사람은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해요.”
“…….”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을 수 있죠.”
“…무슨 기회요?”
“글쎄요.”
나는 갬블의 눈을 보았다. 몬스터가 제압당한 뒤 뒤늦게 운동장으로 달려온 갬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호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십 병의 포션이 비워지는 것도, 보건실로 다급히 옮겨지는 것도 갬블은 모두 지켜보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죠.”
뱉고 나서 조금 후회가 되었다.
괜히 사람 마음에 불 질러 놓는 게 아닌가 싶어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