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89)
할 일(2)
결국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갬블에게 필요한 것을 말했다. 갬블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아요. 어차피 필요한 건 다 줬잖아요.”
“그렇습니까?”
“외부에 공개도 할 건가요?”
“나중에는요.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네. 그럼 됐어요. 공개용으로 가공할 필요도 없고.”
갬블은 팔을 저어 나를 쫓아냈다.
“어느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찔끔찔끔 말고 한 번에 달라고 전해 주세요.”
“네?”
“기술이란 건 한 분야에서만 사용되는 게 아니에요. 이 이론이 여기서도 쓰이고 저기서도 쓰이는 법이에요. 지금 중간 과정이 없어서 제가 재해석에 시간이 걸리는 거라고요. 참고할 게 늘어나면 저도 편하고.”
갬블은 내가 준 파일을 흔들었다. 마력 시계에서 뽑아낸 설계도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겠습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요.”
“네, 네. 알았어요.”
“진짜 잠 좀 자고요.”
“알았다니까요.”
갬블은 이번에야말로 나를 연구실에서 쫓아냈다.
그러고는 연구실에 딸린 접이식 침대에 눕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숙소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그 끔찍한 맛의 커피를 홀짝거리며 내가 준 파일이나 읽었다.
다시 돌아가서 뭐라고 한 소리 할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애도 아니고 어른인데.
그리고 어른이기 때문에 정신을 팔 만한 다른 일이 필요할 때가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에서 도망치더라도.
…그게 나쁜 일인가?
모두가 홍석영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런 갬블을 보지 못한 척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 * *
“우 선생님!”
“잠시 이것 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쌤!!!”
“선배님!”
“우 선생님!”
“쌤!”
나는 무언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다. 관리청에서 일할 때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직급이 높긴 했지만 그건 괜찮다. 어찌 되었든 관리청도 공무원의 탈을 쓰고 있긴 했었고, 관리청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불려 나가는 건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봐라.
왜 다들 나를 찾고 있는 거지?
백번 양보해서 아이들이 날 찾는 거야 이해할 수 있다.
“쌤! 오늘 점심 뭔 줄 알아요?”
“…….”
“우리도 식단표 만들어야 한다니까요.”
“어차피 식당 말곤 밥 먹을 데도 없는데 식단표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아, 오현욱!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니, 사실은 이해 못 했다.
나와 식단표가 무슨 상관이지? 알레르기가 걱정되기라도 하는 건가? 그건 어차피 이미선이 진작 체크했다. 그런 일 처리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먹고 싶은 음식이나 간식거리도 말하면 만들어 준다.
그냥 나오는 메뉴가 궁금한 거라면 가서 물어보라고…. 나한테 묻지 말고.
왜 나한테 식단표를 묻는지는 모르겠다마는 그래도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것 자체는 그러려니 했다. 선생님이잖냐. 원래 나이와 관계없이 교사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는 애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 때도 그랬다.
뭐, 그리고 얘네는 나한테만 이러지 않는다. 나와 같은 빈도로 김채민도 불려 나왔다.
“됐고, 밥이나 얼른 먹으러 가.”
“넵!”
“그리고 강태우?”
“…네?”
“밥 먹고 잠깐 얘기 좀 하자.”
“……네.”
아이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정작 자기들은 별 싱거운 일로 날 불러내면서 왜 내가 부르면 겁먹는 건데?
정말 이상한 놈들이다….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강태우마저 애들한테 나쁜 것만 배워서는. 이게 다 이승연 때문이다. 이래서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친구 잘못 만나서 패가망신해서다.
…이승연이 나쁜 영향을 끼쳤냐면, 그건 아니고. 그냥.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예전이었다면, 하다못해 이미선의 펜션에서 지냈을 때를 생각해 보자고. 그때의 강태우에게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저렇게 대놓고 겁먹은 티는 내지 못할 거다.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겠지. ‘네, 금방 찾아뵐게요.’ 연구원들의 모범생답게 말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지금의 강태우는 그만큼 과거에서 벗어나 평범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양성고가 아니라 어디 다른 일반 고등학교에 던져 놔도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을 만큼. 휴게실에 모여서 게임하다가 ‘치사하게! 그거 반칙이잖아!’ 하고 고함칠 수 있을 정도로.
…역시 사회화가 중요하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고, 장난치고, 싸울 수 있는 것이 인격 형성에 얼마나 도움 되는 일인가.
거기에 담긴 내 노력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초등학생 시절, 키우던 강낭콩에서 싹이 났을 때와 같은 보람이 느껴졌다.
“우 선생님!”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아이들이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가자마자 또 날 찾는 이가 있다.
“우리 길드에 공금 같은 거 없어요?”
“공금이요?”
김채민은 불쑥 고개를 내밀더니 본론부터 얘기했다.
“마력석 큰 게 필요한데 제가 들고 있는 건 다 써서요. 따로 구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길드 일이면 길드 자금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길드 일?”
김채민의 시선이 운동장으로 향한다. 운동장에는 역시….
아무래도 그렇지.
“돈도 많은 사람이.”
“그래도 아낄 수 있으면 좋다구요.”
김채민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말했다.
“그렇긴 하죠.”
“제가 구해도 상관은 없긴 한데….”
“아뇨. 개인적으로 쓰는 것도 아니잖아요.”
“개인적인 흥미는 있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차이가 있나. 그렇게 치면 갬블에게 투자도 안 했지.
“김 선생님이 자꾸 사비 쓰는 것도 보기 안 좋죠. 어느 등급의 마력석이 필요한 겁니까?”
“7등급 이상이요.”
“그렇게 큰 게 필요하다고요? 뭐, 제 돈입니까, 홍 선생님 돈이지. 마력석 말고도 필요한 게 있으면 정리해서 말해 주세요.”
“네!”
아이들과는 다른 의미긴 하지만, 김채민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길드 일로는.
내 의사는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현재 길드 미미의 부길드 마스터가 되어 있다. 홍석영이 자리를 비운 지금은 내가 책임자다.
간혹 실없는 소리를 하는 일이 있어도 김채민은 고급 인력이다. 해야 할 일 이상을 해 준다. 그 정도 농담은 감수할 만하고,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김채민도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지금도 딱 볼일만 보고 떠나지 않는가.
…그만큼 몬스터의 사체가 흥미로운 거일 수도 있고.
어쨌든 내 말은, 아이들과 김채민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굳이 더한다면 며칠째 연구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는 갬블도 나를 찾아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우 선생님.”
“여기 이거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우 선생님?”
왜 다선인지 협회인지 어디 소속인지 모를 헌터들까지 나한테 오고 있냐는 말이다.
얘넨 내 밑에 있는 직원들도 아니고, 홍석영의 부하도 아니다. 내가 이놈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이유?
없다.
나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나란히 선 헌터 세 명을 보았다. 늘상 이미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이들은 보스턴으로 보내졌다. 시범고에서부터 따라다니고, 방이동 던전은 물론 폐쇄된 연구소에까지 이미선이 데리고 간 이들 아닌가. 아이들 커피나 만들어 주고 있어도 이미선의 최측근이다. 보스턴에 보낸 것도 이해한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헌터는 그 세 명의 자리를 대신한 이들이다. 너네 대장한테 가지 않고 왜 나한테 오냐고 매정하게 쳐 내지 못했던 것은 이 사람들이 아이들의 수업을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직장 동료라는 인식이 있긴 하다. 그게 크지는 않아도.
하지만 그건 옆 사무실 사람 정도의 감각이다. 옆 사무실 사람이 갑자기 나한테 와서 이걸 결재해 달라고 하면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아니, 그쪽 사장은 어디에 버려두고 이걸 나한테 묻는 건데?
“…이걸 제가 봐도 되는 겁니까?”
나는 협회 마크가 그려진 파일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 우 선생님이 안 보면 누가 봅니까?”
“…….”
말이 안 통한다.
“아니, 저는 딱히 협회 소속도 아니고. 홍 선생님도 안 계신데 협회 일을 저에게 가져와 봤자.”
“홍 헌터님께서 본인이 없으면 우 선생님한테 말하면 된다고 하셨는데요.”
그 인간이.
“당장 상황 판단이 필요한 일은 우 선생님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셔서….”
“급한 일입니까?”
“급하다면 급한 일인데.”
파일을 열었다.
딱딱한 협회 로고와는 달리 파일을 열자마자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 사진이 보였다.
…얘, 걔잖아. 보스턴에 있는 강태우 여동생.
이십 년 전 연구실에서 같이 지냈던 여자아이는 사실 그 뒤로는 내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나 먹고살기에 급급했다… 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려나.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그때 나와 같이 연구실에서 구출된 애들은 나중에 뿔뿔이 흩어졌다.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 애도 있었고, 나처럼 보육원으로 들어간 애도 있었고.
이 여자아이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순전히 강태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진 뒷장을 보았다. 아이의 한국 이름, 사망 증명서나 뭐… 이런저런 것들이 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육원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강태우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고.
그 뒷장은 미국 생활에 대한 기록이다. 산드라 갬블이 마련한 새 신원, 위탁 가정, 학교생활이라든지….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아이의 미국 생활에 대해서는 직접 듣기도 했다. 강태우에게 보내진 영상에서 말이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헌터들을 보았다.
“이걸 왜 저한테…?”
“이 아이가 이제 한국으로 오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번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더 일이 많아지기는 했는데… 우리 마스터가 어차피 알렉스 호프도 죽었겠다, 그 애도 죽이자고 했거든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표현 방식을 좀.”
“아, 네. 죄송합니다. 어차피 보스턴에서도 실종자 수색 중이거든요. 더 시간을 끌면 상황이 정리될 테니….”
“거기에 제 허가가 필요한 겁니까? 그 정도는 그냥 알아서 해도 될 텐데.”
“마스터도 일단 급하니까 그렇게 바로 처리한다고는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의문이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걸 가져온 거지?
“기존의 계획이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네.”
뭔가 불길한 기운이 들었다. 어쩐지 입을 열기를 망설이고 있는 헌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게, 그. 얘가 온다면… 신원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네.”
“보육원에 보낼 수도 없잖습니까?”
“…….”
“각성자도 아니니까 학교에… 아니, 각성자라고 하더라도 태우처럼 여기에 입학시키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
슬슬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 이야기를 가져왔는지 알겠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렸다.
“…강태우 학생과 얘기해 보겠습니다.”
홍석영, 그 인간은 진짜 필요할 때 없다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