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9)
종지부(1)
가운데 글자의 불빛이 꺼진 낡아 빠진 간판.
문을 열 때마다 끼익 끼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문. 유행이 한참 지난 가요. 가끔 허공을 날아다니는 파리까지.
작고 오래된 호프집에는 딱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으로 이루어진 일행.
“주문하신 치킨 나왔습니다.”
어쩐지 어두워 보이는 테이블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름때가 가득한 앞치마를 맨 주인은 치킨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사진 몇 장에 시선을 주긴 했지만 어두운 호프집 조명 덕분에 내용은 잘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잠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젓곤 부엌으로 돌아갔다. 한참 전에 시킨 맥주가 그대로 남아 있다.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동네에서 오래 장사하려면 남의 일에는 신경을 꺼야 하는 법이다.
주인이 부엌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홍석영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응? 뭐라고 할 말 없나?”
맞은편에 앉은 청년은 사진을 다시 잡았다. 아무것도 없는 뒷면까지 보고 있자 홍석영은 혀를 끌끌 찼다.
“자네를 그렇게 물심양면 도왔는데. 돌아오는 게, 뭐? 모른다고? 배은망덕한 것도 정도가 있지.”
“…….”
“아, 그래.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볼까?”
홍석영은 청년, 우희재를 향해 윽박질렀다.
“자네, 누구인가?”
“…….”
우희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진을 반쯤 던져 놓다시피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저기, 그만합시다.”
“뭘? 난 이제 시작인데.”
“그러니까….”
우희재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 여자잖습니까.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두고 사람 놀리지 말자고요.”
홍석영은 히죽 웃었다.
* * *
몇 번 말했지만, 나는 영악한 아이였다.
영악한 아이가 크면 뭐가 되는지 아는가?
영악한 어른이 된다.
정말로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신분을 빌리기로 마음먹은 뒤 손 놓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김 군과의 이야기를 감과 운에 맡겨서 대충 얼버무릴 거라고 생각했는가?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나에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저 하늘에 맡겼을 수도 있다. 뭘 하려고 해도 정보를 얻을 구석이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는 마력 시계가 있다. 십칠 년간의 이능관리청 역사가 모두 저장되어 있는 물건.
2021년에도 각성자를 전담하는 부서가 작고 귀여운 크기로 존재하긴 한다. 각성자범죄수사실도 그 부서 소속이다.
관리청은 그 시절 기록도 가지고 있긴 했다. 비어 있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실종자와 사망자 명단만큼은 빈틈이 없다.
왜, 가끔 있거든. 던전에서 죽은 걸로 꾸미고 해외로 도피하는 놈들이.
실종자와 사망자 명단이 있다면 그다음은 나의 시간과 노력을 제물로 바치면 된다.
먼저 2021년경 사망하거나 실종된 헌터들 사이에서 김씨 성을 가진 이를 찾는다. 이건 쉽다.
그중에서 홍석영과 관련이 있을 만한 이를 고른다. 이건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단서를 잡아 찾아낸 게 셋이나 되긴 했다. 하지만 하나는 해외에 있고, 하나는 2021년 초 경상도에서 터진 던전 브레이크를 막다가 죽었다.
남은 하나는 김유화라는 이름의 여자.
각성하기 전에는 경찰이었고, 각성하고 난 뒤에도 각성자범죄수사실에서 일했다. 그런 김유화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실종자 명단과 각성자범죄수사실 근무 일지뿐이다. 아저씨와 몇 차례나 함께 사건을 수사했다는 기록 말이다. 그 외에는 없었다.
너무 뻔하잖아. 잠입 수사 때문에 기록이 사라지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정의를 꿈꾼 불운한 헌터.
아저씨는 워낙 옛날 사람이다 보니 여자 후배에게도 군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옛날에는 성별 상관없이 썼다고는 하는데…. 그게 옛날 사람이라는 증거지.
“그래서, 이 남자는 누굽니까? 설마 저 떠보겠다고 사람 죽이고 온 건 아니죠?”
저, 저 히죽거리는 면상을 봐라.
저게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만 아니었다면 한 대 치는 거였는데….
스멀스멀 발목을 타고 올라오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대로 대답했다는 증거다. 잘못된 말을 했다면 순식간에 발목이 잘렸을 거다. 용의주도하게 마력제어구가 없는 쪽 발목이었으니까.
“설마. 송파구 던전에서 발견했네.”
“시체를요?”
“그래.”
홍석영은 품속에서 사진을 몇 장 더 꺼냈다.
저것 봐라. 날 찔러보겠다고 일부러 숨겼다.
유지은은 나보고 귀염성 없이 자랐다고 뭐라고 했지만 이건 다 저 아저씨 탓이다. 보고 배울 만한 어른이 저 모양인데 이 정도면 바르게 잘 자랐지.
“죽은 지 얼마나 됐습니까?”
“사흘에서 나흘 정도. 나흘 전에 다선의 헌터들이 들어갔을 때는 없었다고 했거든. 여기서 죽인 건지 밖에서 죽여서 들고 온 건지는 아직 몰라.”
“다선에서 던전 입구 안 지켰습니까?”
“당연히 지켰지. 24시간 철통 경계. 어떻게 들어갔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이미선 헌터가 지금 엄청나게 열받았어.”
나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에 배신자가 있을까 봐?”
“거창하게 배신자라고 부를 것까진 없지만…. 대충 그렇지.”
“흠…. 그쪽은 이미선 헌터가 알아서 하겠죠. 이거 룬입니까?”
나는 홍석영이 새로 꺼낸 사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시체가 입고 있는 옷 안쪽을 찍은 사진이다.
복잡한 기호가 얽혀 있다. 어느 시간 많은 사이코패스가 사람을 죽이고 의미 없는 낙서를 해 놓은 게 아니면 룬이다.
“그래, 안 그래도 이걸 물어보려고 했거든.”
홍석영도 긍정했다.
“저기….”
“룬이 있긴 한데 이게 뭔 작용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굳이 이렇게 그려 놓은 거 보면 의미가 있을 텐데. 무슨 룬인지 알고 있나?”
“저….”
“그걸 물어보려고 했으면서 이게 김 군이라고 떠본 겁니까?”
“사람이 알뜰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런 걸 알뜰하다고 합니까, 보통?”
“저기욧!!!”
마냥 얌전한 성격은 아니지만, 김채민이 이렇게 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가림막 룬을 봤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시체에 그려진 룬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던 나와 홍석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채민을 보았다.
“저 이야기 하나도 못 따라가겠거든요!”
김채민이 꽥 고함을 내질렀다.
“김 군은 또 누구고, 그 사람의 성별은 또 무슨 상관이에요?!”
그제야 홍석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불쌍한 대마법사는 아까부터 홍석영의 기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는지 억울한 얼굴로 외쳤다.
홍석영이 나에 대해서 김채민에게 얼마나 이야기해 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걸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련원에 데려간 것도 그렇고, 김채민도 방주의 존재를 알고 있다. 김채민이 어쩌다 방주와 엮이게 된 건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홍석영이 이 자리에까지 데려온 걸 보면 상관없는 거겠지.
“김 선생님. 제가 방주 출신인 건 알죠?”
“네! 말해 준 적 없지만, 수련원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눈치 못 채면 병신이죠!”
…설명을 해 주기는커녕 한마디도 안 한 건가?
나는 홍석영을 슬쩍 보고 입을 열었다. 뒤처리하는 건 늘 나였지. 새삼스럽지도 않다.
“거기 나오려고 했을 때 김 군이라고, 절 도와준 사람이 있었거든요. 잠입 수사 같은 거죠.”
홍석영은 나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하라는 듯 턱을 괴고 나와 김채민을 지켜보았다.
김채민은 똑똑하다. 거기까지만 말해도 대강 사정을 눈치챘는지 입을 헤, 벌렸다.
“도중에 그 사람과 연락이 끊겨서…. 저기, 홍석영 씨와도 마찬가지고요.”
“어허. 정 없게 홍석영 씨가 뭐야. 삐쳤어?”
“홍석영 씨가 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보니 제가 김 군이 말하는 내부 정보원이 맞는지 굉장히 의심을 했거든요.”
“삐쳤네.”
“아하. 그래서.”
“네. 그렇게 된 겁니다.”
김채민은 맥주잔을 들어서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500cc 잔을 한 번에 비운 김채민은 쾅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쓱 닦았다.
…스트레스가 많았나?
“그럼 우 선생님을 향한 의심은 다 해결된 건가요? 보니까 이게 함정 수사였나 본데.”
“어…. 그건 저야 모르죠. 홍석영 씨 마음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김채민은 홍석영을 노려보았다.
“홍석영 씨.”
“으음?”
“이제 다 된 거죠?”
김채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긋이 홍석영을 노려보던 김채민은 툭 내뱉었다.
“그럼 사과하세요.”
홍석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홍석영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의 말에도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하네.”
“저한테 하면 안 되죠.”
“음. 미안하네.”
홍석영은 내게도 고개를 숙였다.
“자, 약소하지만 사과의 뜻으로….”
또 품속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낸다. 저 옷, 안주머니에 아공간이라도 달아 놨어? 뭘 자꾸 꺼내는 거야.
이번에 홍석영이 꺼낸 건 잔뜩 구겨진 서류 봉투다.
“뭡니까?”
“자네 거야.”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봉투를 받았다. 봉투에 비해 안에 든 내용물은 많지 않았다. 그 탓에 구겨진 거다. 안에 든 건….
툭.
눈을 깜빡였다.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것은 카드였다. 정확히는, 카드 크기의… 주민등록증.
우희재.
920930-1xxxxxx.
“다른 신상 정보는 자네가 수사실에 있을 때 말해 준 걸 기준으로 했네. 그게 거짓말이라면 별수 없어. 바꿀 수 없으니까 그냥 그대로 살게. 그리고….”
홍석영은 손을 휘저었다. 봉투 안에는 아직 남은 게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뒤이어 떨어진 것은 헌터 라이센스.
“이것도 내가 임시로 받아 뒀어.”
우희재, D급.
“나중에 갱신이나 한번 하게.”
하지만 봉투 안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었다. 봉투를 뒤집어 털어도 나오지 않아서 손을 넣어 끄집어냈다.
툭.
…통장이다.
“마침 월급날이 지났더라고. 체크카드도 같이 발급받았네.”
통장 사이에서 카드가 하나 끼워져 있다. 거기에도 내 이름이 있었다.
“자네도 이제 신분이 생겼으니 대한민국의 국민이잖아? 세금을 내야 하는 건 알지? 그래서 세금이 떼이고….”
어째서인지 손이 덜덜 떨렸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직감해서인지도 모른다.
“난 악덕 고용주가 아니니 사대 보험도 당연히 들어 줬네. 혹시 나중에 어디 다른 데 일하게 되더라도 꼭 보험 들어 주는 곳으로 가야 해. 안 들어 준다고 하면 수상쩍은 곳이니 그만두게.”
헌터가 사대 보험 들 일이 뭐가 있다고…!
“원래는 한 달 동안 지내는 데 썼던 자질구레한 비용도 제했어야 하겠지만….”
“에이, 교장 쌤, 그건 너무하다.”
“아, 지금은 교장 쌤이야?”
“사과하셨잖아요.”
“거, 계속 선생님이라 불리려면 착하게 살아야겠구먼.”
홍석영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김 선생 말대로 나도 그건 너무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내가 사 주는 걸로 하겠네. 어때, 괜찮은가? 자네가 열심히 일해서 번 정당한 대가인데.”
“…….”
“그래, 다 이해해. 이해하네. 심각한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하고, 일단 축하나 하지. 사장님! 여기 맥주 좀 더 가져다주십쇼!”
“…….”
정당한 대가? 정당한 대가라고, 이게?
난 통장을 쥐고 손을 벌벌 떨었다.
내 월급이 4분의 1토막 났는데, 지금, 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