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97)
유언(3)
이능관리청에 근무하는 이들은 모두 유언장을 작성하라는 본부장의 지시는 여러 의미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좋은 소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관리청이 언제는 좋은 소리를 들어 왔던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이들마저 막상 작성해 본 뒤에는 괜찮은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말해 왔다.
앞서 말했듯이, 헌터는 죽음에 가까운 직업이었다. 더군다나 마력 측정기의 상용화로 던전 브레이크를 막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헌터들은 물론, 공략 지원팀 등 사무직원들에게도 죽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말 많은 한태경마저 심각한 얼굴로 관리청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여어.”
“…뭡니까?”
“선생님한테 너무 매정하잖아. 선생님 상처받아요.”
“졸업한 지가 언젠데….”
“그래도 한번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지! 본부장님한테는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왜 난 모른 척이야?”
유지은은 얼굴을 구겼다. 반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왠지 진 기분이다.
아니, 뭐.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 한태경한테 배운 것도 사실이었고.
굳이… 굳이 따져야만 한다면 홍석영에 이어서 한태경도 유지은의 은사라고 할 수 있긴 하다. 실제로 도움을 많이 받았기도 했고.
“이놈의 직장, 때려치우든 해야지…. 어딜 봐도 다 같은 학교밖에 없잖아요. 뭔 이딴 학벌주의가 다 있어.”
“그거 시작이 너인 건 알지?”
“그러니까요!”
잔뜩 짜증을 내 봤자 한태경이 즐거워할 뿐이었다.
“그리고 학연과 지연이 아니면 이렇게 근무 환경이 개떡 같은 곳에 들어올 미친놈이 없다는 것도 알지?”
“…아, 예. 그런 미친놈이 저랑 선생님이라서 참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말은 해도 정말 관리청을 관둘 생각도 없었다. 한태경도 마찬가지다. 저 장단에 맞춰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유지은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태경의 말을 끊어 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내가 꼭 볼 일이 있어야 너한테 찾아오냐. 섭섭하게.”
“그건 아니지만… 그 개같은 고양이 이야기도 안 하고 말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건 볼일 있을 때만 그러잖아요.”
“체이시는 개 같은 것보다도 훨씬 귀엽거든!”
그런 의미로 쓴 건 아니지만…. 말해 봤자 이쪽만 피곤해진다. 유지은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개가 더 좋은데.”
“…나도 강아지 좋아해! 체이시는 체이시니까!”
한태경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양반이 아직도 한결같다는 점이 좋기도 하고 질리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태경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나름대로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려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최근 관리청에 고소장 날아오는 빈도수가 꽤 높은 것 같지만.
“어쨌든, 지은아.”
그러나 한태경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만행을 보여 주었다.
“너 아는 변호사 있지?”
유지은은 한태경을 홱 돌아보았다.
“변호사요? 왜요? 누구 때렸어요?”
“야. 내가 맞으면 맞았지 누굴 때리고 다닐 인간으로 보이냐.”
“…….”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정당방위였다, 그건.”
“…….”
“그래서 아는 변호사 좀 소개해 줄 수 있냐?”
유지은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요?”
“그냥….”
“원래 있던 변호사는요? 드디어 못 참고 관뒀어요? 어째 오래간다고 했어요.”
“그런 거 아니라고!”
한태경은 흘러내리는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항변했다.
“아니, 이번에 그 유언장 쓰면서 생각해 보니까… 재산이나 뭐 이런 것도 이 김에 정리해 둘까 싶어서.”
“아하.”
유지은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이유로 유지은을 찾은 헌터가 한태경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들 멋쩍은 얼굴로 ‘아니, 그래도 우리 식구들 고생 안 시키려면 미리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하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사정을 아는데.
그래. 알고 있다.
유지은은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태경에게 물었다. 유지은이 무엇을 물을지 예상이라도 했는지 한태경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근데 한태경 선생님께서 늘 신세 지는 변호사한테 물어보면 될 텐데요? 왜 저한테까지 와서 이러시는지?”
유지은은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실어 말했다.
한태경은 유지은의 비꼼을 알아듣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이 사람이 눈치가 없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말을 멈추는 일은 드물다. 유지은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남몰래 변호사를 찾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설마 변호사를 상대로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한태경이 찾아올 때마다 커피를 들이붓던 동생 녀석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 일 아니라고 비웃었는데, 그 녀석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아니, 그게 말이지….”
“진짜 변호사를 쳤어요?”
“뭐? 내가 걜 왜 쳐?”
“그럼요? 싸웠어요?”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니?”
“…그거야 한태경 선생님?”
“내 이름이 한태경이긴 하지. 어쨌든 그런 건 아니라니까. 몇 번을 말해.”
“아니면 변호사가 더 일을 못 맡아 주겠대요?”
“아니라고!!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래.”
한태경은 자신을 걱정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유지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받기는 했지만, 한태경이 생각하기에 유지은은 이걸 알아야 했다.
게다가 일 년도 넘게 숨기지 않았나. 이만하면 오래 참았다. 여동생이 뭐라고, 진짜.
“이런 일을 여동생한테 부탁하기는 좀 그렇잖냐.”
“…여동생?”
유지은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유지은이 아는 한 한태경의 동생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은영 언니? 은영 언니요? 언니, 변호사 됐어요?”
“몇 년 폐인처럼 지내는 걸 보다 못해서 아버지가 미국으로 데려갔어. 돌아온 지는 몇 년 안 돼.”
“아….”
“은영이가 너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그냥. 뭐. 그래도 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렇게 됐다.”
한태경은 혹시 여동생의 결정에 유지은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해서 눈치를 보았다. 유지은의 말대로 한태경이 남의 눈치를 살피는 일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유지은은 오히려 개운하게 웃었다.
“지금은 잘 지내는 거죠?”
“그래.”
“그럼 괜찮아요. 가끔 얼굴 보는 건 서현 언니와 현욱 오빠밖에 없으니까…. 잘 지내는지 걱정되더라고요.”
“아, 그 녀석들 관리청 오면 나 좀 보러 오라고 해! 매번 도망만 치고 말이야.”
“그 두 사람한테 선생님 텐션은 감당하기 어려울걸요….”
“내가 어때서?”
한태경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걸 알 수 있었더라면 진작 알았겠지.
유지은은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사정은 알았어요. 변호사 선생님께 말해 둘게요. 다른 녀석들도 찾아갔었으니까 금방 해 주실 겁니다.”
“그래, 그래. 고맙다.”
한태경은 다시 기분 좋게 웃으며 유지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볼일이 끝나자마자 가 버리는 걸 보아라. 제자 타령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정작 진짜 은사 대접을 하겠다고 깍듯하게 대하면 팔을 문지르며 도망치는 사람이.
한태경을 처리하자 막상 할 일이 없어진 유지은은 복도에 서서 고민했다. 며칠 전 던전 하나를 공략하고 나온 터라 지금은 휴일이었고, 집에 있기 심심해서 나오긴 했다마는 그렇다고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공략 지원팀에 가서 애들 일하는 데에 훈수나 둘까. 지금은 우희재를 필두로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으나 홍석영은 차후 지원팀의 규모를 더욱 크게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상 때문에 은퇴한 헌터들을 섭외하여 체계를 다지면 아예 별도의 기관이 되어 독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왜요? 한국은 넓지도 않아서 이 정도로도 충분히 커버 가능할 텐데요.’
홍석영은 유지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있겠니? 나도 인간인 이상 나이를 먹으면 은퇴는 하겠지.’
혹은 죽거나.
홍석영이 관리청 데이터베이스에 본인의 유서를 업데이트한 직후였다. 유지은은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확연히 흰머리가 는 홍석영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지은아. 선생님 눈은 정수리에 있지 않아.’
‘…아뇨. 뚜껑은 멀쩡하시잖아요.’
‘위안이 안 된단다.’
홍석영은 차근차근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지은도 도와주었다.
그런 노력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는 동생 녀석도 이번 유언장으로 나름대로 생각할 게 있었는지 조금 차분해졌다.
유지은은 지원실로 발길을 돌렸다.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결코 심심해서 우희재를 놀리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아, 유 헌터님!”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유지은의 평화로운 휴일 일정은 다급하게 복도를 뛰어가는 헌터 하나에게 산산조각이 났다.
“본부장님이 급하게 찾으십니다.”
“본부장님이?”
“네! 바로 오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시고?”
“넵.”
흐음.
유지은은 턱을 매만졌다. 어디 던전이 터진 것 같진 않고. 다른 나라에서 공략 협조 요청이라도 들어왔나.
유지은은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본부장실은 원래 가려던 곳과 같은 방향에 있었다.
“선생님? 저 찾는다고 들었는데요.”
“지은아.”
홍석영은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지은을 맞이했다.
“…선생님?”
유지은은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유지은의 심장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간 밝은 웃음과 실없는 농담으로 가리고 있었던 짙은 우울감과 피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금방이라도 그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책임감 단 하나로 멈춰 있는 이의 지친 한숨.
유지은은 덜컥 겁을 먹었다. 선생님이,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홍석영이 이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홍석영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었던 가까운 이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죽은 이가 유지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유지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목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누구. 누가요?”
홍석영은 책상 위에 있는 편지 봉투를 유지은에게 내밀었다.
봉투의 겉면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유지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은이에게.’
“순진이가 네 앞으로 적은 편지란다. 이미선 헌터가 주고 갔어.”
* * *
[오랜만이야, 지은아.지금 이 편지를 네가 읽고 있다면 아마 내가 죽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라는 말이겠지.
오랜만에 연락해서 이런 소식이라니. 면목이 없네.]
작은 유지은의 마력 패턴을 동기화한 마력 시계는 내가 본 적 없는 문서의 잠금을 해제했다. 누군가의 손 편지를 스캔해 놓은 것이었다.
등록 일자는… 아버지가 남긴 것과는 달리 한참 전의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창 마력 시계 테스트를 하고 있던 때. 딱 봐도 공적인 문서도 아닌 개인적인 편지를 여기에 등록해 놔? 이게 뭐길래?
중간 내용을 건너뛰고 편지의 마지막을 확인했다. 언제 적은 거지? 누가 쓴 편지야?
두 장의 편지, 그 끝부분에 적힌 서명을 본 나는 다급히 첫 장으로 돌아가 편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순순진]전혀 상상도 못 한 이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