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98)
유언(4)
시범고 출신 학생 중 행적이 확실한 이는 몇 명 없다.
박서현과 오현욱.
다음 해의 신입생은 단 한 명. 유지은.
이렇게 세 명을 제외한, 명동 던전 브레이크 이후로 학교를 그만둔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홍석영의 입김도 있었을 것이고, 이미선도 아이들을 찾지 못하게 방해 공작을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기자들이 그런 먹잇감을 가만히 놔뒀을 리 없다. 홍석영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지금의 양성고에도 한 번씩 들어오려는 기자가 있는데.
물론 주변에 아무 건물도 없는 허허벌판인 터라 몰래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명동 사태에서 아버지의 잘못은 없다. 있다고 한다면, 실습을 맡길 만큼 명동 던전 담당 길드를 믿었다는 것뿐.
하지만 세상은 영웅의 비극에 환호했다.
나 같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아니면 하다못해 학교에만 매달려 관리청을 설립하는 건 진작 포기했을 텐데.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대단하다. 누나도 마찬가지다. 인정하기 싫지만… 한태경도.
처음에야 한태경이 아버지한테 불려서 팔자에도 없는 선생 노릇을 하며 아카데미에 눌러앉은 거라고 생각했었지.
사실 이 감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다.
명동 사태 이후로 학교를 그만둔 학생 중에는 한은영이 있다. 한태경의 동생.
한태경은 무슨 이유로 동생이 떠난 학교에 근무했던 걸까? 그 홍석영이 부탁했기 때문에? 그냥 선생님이 한번 되어 보고 싶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안 이후에는 아카데미의 한태경도 조금 다르게 다가오긴 했다.
한은영은 한태경을 볼 때마다 심경이 불편한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긴 했지만, 그게 오빠와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은 아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오히려 한은영이 한태경에게 먼저 다가가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오빠를 정말 싫어한다면 그렇게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아예 없는 것처럼 취급하면 모를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태경은 한은영보다 좀 더 대놓고 표현했다. 부모님 전화를 받으라고 잔소리하고, 여동생의 훈련에 훈수를 두어 여동생의 짜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마저도 한태경은 재밌어했다. 아니, 정확히는 귀여워했다.
이런저런 부사어를 다 떼고 말한다면, 한태경과 한은영은 나름대로 사이가 좋은 남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태경이 한은영이 그만둔 학교에서 일한다? 아마 원래 시간대의 한은영은 그 사건을 극복하고 그럭저럭 자기 삶을 살지 않았을까.
아무리 한태경이라 하더라도 여동생이 힘들어하는데 그 옆에서 관계자가 되어 일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냥 내 짐작일 뿐이다. 이에 논리적인 근거 따위는 없다. 내가 너무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새침하고, 깔끔 떨고, 하기 싫은 일에는 티가 팍팍 나면서도 하지 않겠다는 말 대신 나서서 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잘 살고 있었다면 좋지 않은가.
[오랜만이야, 지은아.]이런 편지를 남겨 놓는 게 아니라.
편지는 한은영이 남긴 것이 아니다. 한은영과 서한성은 학교를 그만두고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
…사실 제일 걱정되는 건 서한성이었다. 그런 성장 배경을 가진 아이가 차라리 아카데미에 남아서 지속적인 케어를 받았다면 안심이 되었을 텐데.
아니면 차라리 헌터고 던전이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더라면 좋겠다. 걔가 헌터를 그만둔다고 해서 아버지가 후원을 끊어 버릴 인간도 아니고.
[지금 이 편지를 네가 읽고 있다면 아마 내가 죽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라는 말이겠지.]마찬가지로 나는 순순진이 헌터 생활을 지속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편지를 보았다. 순순진의 편지는 관리청 헌터들이 남기는 유언장과 비슷하게 시작했다.
그 유언장들은 본인이 아니면 볼 수 없다. 나도 그런 건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후 여러 절차를 거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일도 일어난다.
대부분은 비슷하다.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되어서 미안하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사랑해.
미안해.
사랑해….
순순진의 편지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가득했다.
[너한테만큼은 미안한 일 안 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진짜 나 열심히 노력했어.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된 걸 보면 세상엔 노력만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는가 봐. 불공평하지, 참.]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정갈한 글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른이 된 순순진 대신, 지금 교실 안에 있을 작은 체구의 단발머리 여자애가 책걸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록 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원하는 것처럼 헌터가 된다면 이와 같은 편지를 쓸 일이 생기겠지만.
보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견딘 거지?
자길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아이들의 부고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아버지는 어떻게 견디고 있었던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어….
[널 만나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괜히 잘 살고 있는 애 신경 쓰이게 할까 봐 말았어. 넌 기사에 많이 나오니까 어디 외지에 있어도 소식 듣기 쉽거든.]순순진의 편지는 친구들과 장난치기 좋아하는 열아홉 살의 여고생 순순진과는 달리 차분하고 조용히 이어졌다.
아버지처럼 누나도 무언가 편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했다. 아니, 사실은 기대하고 있었다.
누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라고 해 봤자 방이동 던전 때문에 회의실에서 다툰 것과, 불에 탄 서울 한가운데에서… 던 것밖에 없다.
최소한 나에게 무언가 남긴 것이 있다면. 그렇다면.
“…아.”
누나도 이런 기분으로 순순진의 편지를 여기에 남겨 둔 걸까.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항상 품에 안고 가겠다는 의미로.
데이터베이스에 업데이트해 놓고서는,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열지 못하게 해 놓고서는.
이걸 내가 계속 읽어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왜 몰래 읽었냐며 화낼 사람도 옆에 없다. 순순진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다면 그 미래도 바꿀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널 봤을 때는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교장 선생님이 널 잘 돌본 것 같아서 다행이야. 서현이랑 현욱이도.]“…….”
순순진도 아버지과였나.
박서현과 오현욱을 안다면 잘 돌봤다고 하긴 힘들 것 같은데.
[걔네가 여전히 두 발로 서서 헌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더라. 나랑 한성이는 그 둘이 졸업하자마자 어디 던전에서 죽었다는 소식 들릴까 봐 무서워했거든.]아.
기준이 거기에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정할 만하다.
편지의 반절 이상은 고등학생 때 유지은과 잠깐 지냈던 시절의 추억이었다.
[그때, 기억나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혜은이랑 뭐였더라, 햄버거 먹고 있었었나? 네가 혜은이 괴롭히지 말라고 멀리서부터 쫓아왔잖아.우리가 친구라고 해도 안 듣고. 오히려 우리 언니는 친구 같은 거 없어! 하고 네가 외쳤었지. 혜은이가 그렇게 당황하던 모습은 그 뒤로도 본 적이 없었는데.]
아마 누나가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잔뜩 놀려 댔을 일들이 가득했다.
순순진의 편지 속에는 딱 그 나이대 아이들이 하고 놀았을 일들이 가득하다. 비록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박살 난 일상이기는 했다마는….
아직 여기는 유지하고 있다.
그날 명동에서 아이들을 구했던 일이, 홍석영의 말대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
나는 끝까지 편지를 읽었다. 헌터는 아니었지만 헌터와 같은 편지를 남긴 순순진.
순순진은 이승연의 고모인 이미선과 친하다. 그리고 이미선은 대한민국 헌터일 뿐만이 아니라 이능협회 소속이기도 하다. 이능협회의 특수활동부는 헌터와 던전을 관리하는 협회의 일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불법적인 공략 활동이나 몬스터 부산물 암시장을 적발하는…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상대하는 일이 더 많다.
순순진이 이미선의 아래에서 협회에 들어갔다면 이런 편지를 남긴 것도 말이 된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까 한성이가 널 찾아갈지도 모르겠네. 우리 둘 중 잘못된 사람이 있으면 너에게 남긴 편지는 남은 애가 전해 주기로 했었거든. 한성이 보거든 너무 욕하진 말구.]그렇다면 서한성도 순순진과 함께 이미선 밑으로 들어갔을까.
편지에는 대놓고 협회 이야기가 있지는 않았다. 이미선의 이름도 거론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별 내용 없는…….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이 편지가 별 볼 일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정말 평범한 편지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어디 멀리 여행 간 친구가 기분 내서 오랜만에 손 편지를 쓴 것 같은 수더분함이 있다.
[정말 미안해. 나 진짜 널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래서 우리 같은 인간들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미루면 안 된다니까. 결국 못 하게 되었잖아.그래도 지은아. 난 언제나 네가 건강히 잘 있었으면 좋겠어. 혜은이도 그걸 바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은아.
잘 지내야 해.]
“…….”
편지는 그렇게 끝났다.
순순진의 이름 옆에는 순순진의 지장으로 보이는 지문이 붉게 찍혀 있었다.
나는 창을 닫고 다른 것을 살폈다.
누나가 본인이 품고 가야 하는 것들을 마력 시계에 넣어 놓았다면 다른 사람 것도 있을지 모른다.
누나의 것도 있을 수 있잖아. 이게 그냥 맨 위에 있었을 수도 있지.
아버지는 몇 개 안 남겨 놓았지만.
누나는 아버지처럼 있던 문서를 수정하지 않았다. 순순진의 유언장과 다른 이들의 유언장도 있었다. 내가 아는 이름도 있었고, 모르는 이름도 많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누나 앞으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것도 성공한 인생으로 치는가? 이만큼 누군가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고?
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신뢰라면 받고 싶지 않다.
그러나 누나는 꾸역꾸역 죽은 사람을 등에 업었다. 누나답다면 누나답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을 다시 죽지 않게 하고 싶었던 걸까. 진짜, 진짜 누나답다.
아버지랑 완전 똑같다니까.
“……짜증 나.”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뭐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몰아치는 감정에 숨 쉬기가 힘들다.
김채민이라도 있었으면 마력초 성장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업무 얘기를 할 수 있었을 거고, 홍석영이 있었다면 아예 아무 생각이 안 나도록 대련이라도 하자고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지금 이런 기분으로는 우이록을 데리러 갈 수도 없다. 눈치가 없는 듯 빠른 그 녀석은 내 기분을 알아채고 연구실에 있었을 때처럼 숨을 죽일 거다.
쿵!
“와아아아!!!”
그러나 운동장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아직 운동장에서 몬스터 사체를 치우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급히 밖을 확인했다.
“아, 한태경!!”
“오빠라고 해야지! 아니면 선생님?”
“싫다고!!!”
“나 한 대 치면 내가 누나로 불러 준다니까?”
“싫어!!!”
한은영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화단에 처박혔는지 머리카락에 잎사귀 몇 개가 매달려 있다.
한은영은 한태경에게 달려들었다. 한태경은 여유롭게 여동생의 공격을 피하며 말했다.
“내가 이기면 나랑 체이시 등장 에피소드 10개 같이 보는 거다.”
“내가 오빠를 어떻게 이겨!!!”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한 명도 빠짐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다. 유지은마저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러다녔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