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299)
유언(5)
“어때?”
한태경이 이죽거리며 얄밉게 말했다. 평소 흙바닥에 앉는 것조차 주저하는 한은영은 대꾸할 힘도 없다는 듯 바닥에 대자로 뻗은 채 가운뎃손가락만 들어 올렸다. 아이들 사이에서 왁자지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은영이 이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 건 오빠인 한태경과 관련된 일 말고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래 버텼지. 몸이 더러워지는 걸 싫어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보단 가만히 앉아 있는 쪽을 선호하는 한은영은 그런 성격답게 다른 아이들에 비해 체력이 약하다. 전투 훈련 때마다 매번 먼저 나가떨어져서 유혜은 옆에 앉아 있었다.
방금도 한태경은 체력이 다해 백기를 들려던 여동생을 살살 약을 올려 덤벼들게 했다.
의외로… 교사로서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태경에게.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자, 다음은 누가 해 볼래?”
한태경은 여동생의 깜찍한 손가락 욕설에 즐겁게 웃다가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눈빛이 달라지는 아이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순순진.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은아. 잘 지내야 해.]흠칫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시간이 제대로 흐른다. 눈 뜬 채로 잠이라도 잔 기분이다.
나는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내가 주먹을 쥐고 있는 줄도 몰랐다.
“옳지, 그렇게! 더 빨리! 순진이, 너 올해 키 컸니?”
“왜요!! 그래요, 나 작아요!”
“누가 뭐래? 올해 키 컸어? 작년엔 얼마나 컸어?”
교실 책상에 앉아 유언장을 작성하는 여자아이 위로 체육복을 입은 채 얼굴을 와락 구기며 목검을 휘두르는 여자아이가 덧입혀진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하나도 안 컸어요!!!”
“그래? 너 각성 언제 했다고 했지?”
“…초등학생 때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럼 더 안 크겠네.”
“누구 약 올려요?!!!”
“아니, 아니.”
한태경은 순순진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원래도 재능이 있었던 순순진은 요 몇 달 사이 움직임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한태경에게 바락바락 고함치는 모습은 생기가 넘쳤다. 여차하면 욕이라도 할 것 같다. 유언장에 쓰인 차분한 말투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 정도면 앞으로 더 클 것 같진 않으니….”
“약 올리는 거 맞잖아요!”
“아니라니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흥!”
“그러니까, 앞으로 체구가 바뀔 일이 없으니까, 네 체형을 활용해야 한다고!!”
“…제 체형이요?”
순순진이 멈칫했다. 한태경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작은 체구를 살리라고요? 그건 우 쌤이나 교장 쌤도 말해 줬어요. 저도 그래서….”
“아니, 넌 지금 네 체구가 아니라 스피드를 살리고 있는 거야.”
“스피드… 요?”
“교장 선생님이나 우 선생님이나 성미가 좀 고약해서 너희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인데….”
한태경은 내가 있는 곳을 흘깃 보았다. 내가 빤히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알려 주면 될 걸 뭘 그렇게 기다리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하지만 내가 막지 않는 걸 무언의 허락으로 생각했는지 한태경은 씩 웃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불행히 순순진의 얼굴은 지금 내 위치에서는 정면으로 보였다. 한태경의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훤히 보인다.
“냉정하게 말하면 너처럼 작은 체구는 던전 내에서 불리하다.”
“…알아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자. 몬스터의 입장에서 말이야.”
“몬스터요?”
“네가 키가 10미터인 몬스터라고 생각해 봐. 거슬리는 벌레가 1미터든 2미터든 상관있겠어?”
“…….”
“체구는 문제가 되지 않아. 하지만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약한 힘은 문제가 돼.”
“그럼 저는.”
“아니. 불리할 순 있지만 헌터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냐. 너처럼 특징이 강하다는 말은, 반대로 어떤 특정 던전이라면 네 강점을 살릴 수 있다는 거거든.”
“…….”
“자, 내가 떠먹여 주는 건 여기까지. 그게 뭔지는 한번 생각해 보라고.”
“이게 뭐가 떠먹여 준 거예요.”
“아, 하지만 저기서 너희 담임 쌤이 지켜보고 있다고.”
“엑.”
순순진은 고개를 들어 한태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우리 학교는 자기 주도 학습을 모토로 삼고 있으니까! 뭘 해야 할지는 스스로 알아내야지. 안 그래?”
한태경이 무어라 쉬지 않고 떠드는 가운데, 순순진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드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각성자에게는 먼 거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깝지도 않다. 하지만 순순진은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순순진을 따라 다른 아이들도 나를 부르며 팔을 마구 휘둘렀다.
명동에서부터 지금까지. 기껏해야 일 년 남짓.
처음에 수사실에 붙들렸던 기억이나 이런저런 걸 빼면 저 녀석들의 선생님으로 있었던 시간은 더 줄어든다.
겨우 일 년인데.
일 년밖에 보지 않은 어른을 믿으라고 하면 과거의 우희재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성장 배경을 탓하기에는 저 속에는 강태우도 있다. 주눅 든 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아이는 이제 스스럼없이 웃고 장난친다. 나를 향해 웃는 얼굴이나 흔들고 있는 팔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쟤네들한테 도대체 뭐길래?
난 홍석영도 아닌데. 왜?
“우 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전에도 보았는데 왜 다시 인사를 하는 거냐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나도 손을 들었다. 작게, 흔들며 인사를 돌려주자 더욱 큰 소란이 돌아왔다.
나는 그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한태경을 가리켰다.
“선생님이 수업 마저 하라는데?”
“우우.”
“야. 이게 비난받을 일이야?”
다시 아이들 웃음이 운동장을 가득 채운다. 나는 비틀거리며 창문에서 물러났다.
감정은 인간의 행동 대부분의 동기가 된다.
식욕 같은 본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
결국 모든 것은 감정이다.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
그게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감정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부모님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하다못해 나의 안위를 위해서. 이 말들이 모두 감정에 기반한 말이다.
본능만 남은 짐승에게서는 그러한 것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은가.
인간 사회를 보아라.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온갖 동기를 만들어 낸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노아 미셀만 봐도 그렇다. 보석이니 태양이니 그토록 찬양받는 마법사는 어린 날 던전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전 세계의 존속을 걸고 괴상한 사이비 단체를 운영하는 것인가?
내가 노아 미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노아 미셀도 나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음….
그래도 나는 알기 쉬운 편 아닌가.
고대부터 이어져 오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고, 가장 공감하기 쉬운 동기를 가지고 있다.
‘아줌마 같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니. 그쪽으로 가면 안 되고.
‘그래서 네 아빠가 되기로 한 거야.’
이쪽.
연구소에서부터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남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나, 남들을 호령하는 권력 같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나와 이야기하던 그 공무원 아줌마, 김소정 감사관은 나를 달래기 위해 말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 없는 말이었다.
‘엄마랑 아빠도 볼 수 있을 거야.’
당연히 내게도 나를 걱정하는 부모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한 말.
그 아줌마의 잘못이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구조된 아이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내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게 나에게 남았다.
나는 가족이 가지고 싶었다.
부모 같지도 않은 부모 대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형 대신.
항상 내 곁에 있어 주는 단단한 울타리.
가족.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이다.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나는 가족을 지키고 싶다.
“한 쌤,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카페테리아 가면 먹을 수 있잖아.”
“그럼 치킨 시켜 주세요.”
“여기 배달 안 되는 거 알지…?”
“가서 사 오라는 거잖아, 멍청아.”
“은영아, 오빠는 심부름꾼이 아니에요.”
“알 게 뭐야!”
운동장에서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과 웃음이 들려오고 있다.
이게 아버지가 지키고 싶었지만 실패한 것이다. 누나가 가질 수도 있었던 어린 시절이다.
나는 이기적이다. 내 가족이 가지고 싶었던 것 또한 가지고 싶었다.
내 가족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
‘희재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줄게.’
그리고 내가 행복한 세상도.
가족만 있어서는 안 된다. 친구, 지인, 제자. 나와 친분이 있는 모두. 하다못해 고양이까지.
모두가 웃으면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세상.
그걸 위해서 내 한 몸 어떻게 되든 좋다?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이기적이다. 내가 만든 그 평화로운 세상을 나도 누려야만 한다.
“진짜 너무하네. 너희 우 쌤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그치만 한 쌤은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은영이 오빠죠.”
“그게 무슨 차이야?”
“원래 손위 형제는 동생 친구들한테 뭘 사 주게 되어 있어요.”
“이거 순 날강도들만 모인 것 같은데.”
저 아이들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구했으니까 그 정도는 바라도 되잖아.
아니, 애초에 어린애들은 그런 식으로 죽으면 안 돼.
죽지 않았다고 해서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우울하게 자신을 갉아먹으며 지내거나, 술로 도피하거나. 그도 아니면 눈을 시뻘겋게 뜨고 던전만 주야장천 돌거나.
그렇게 둘 순 없다.
아버지도 그런 세상을 원했을 것이다.
누나도 그래서 나를 데리고 과거로 오려고 했던 것이다.
이른 나이에 유언장 따위 남길 필요가 없는 그런 세상.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 제자의 유언장을 스승이 받을 일이 없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
…그런 세상에서 나도 살고 싶다.
* * *
“…….”
“…….”
“……저기, 선생님.”
순순진은 어색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왜?”
“아니, 그. 갑자기 무슨 진로 계획서예요?”
“너희도 이제 슬슬 생각해 볼 때가 됐잖냐.”
“헌터 양성 고등학교인데 졸업해서 헌터가 되겠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순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분명 말했잖아. 모두가 헌터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자기 적성에 맞게 다른 일을 찾아도 된다고 말이다. 이승연이 적은 진로 계획서 못 봤어? 길드 운영하고 싶다고 경영학과 들어갈 거라고 아주 인생 계획을 써 놨던데.”
“승연이랑 먼저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승연이 불러올까요?”
“그래서 걜 마지막에 부르는 거다. 순순진, 작성한 진로 계획서 줘 봐.”
“으….”
순순진은 결국 빈칸이 가득한 진로 계획서를 내게 건넸다. 제대로 적혀 있는 건 직업명밖에 없다.
헌터.
순순진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왜 이것밖에 안 적었어? 너도 이승연처럼 대학에 갈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길드에 들어가거나…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어? 생각나는 거 다 적어도 된다니까.”
“으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원래의 순순진은 협회 소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선과 가까웠으니 서한성과는 다른 방향에서 이미선의 소속을 눈치챘을 수도 있고.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협회에 들어가는 걸 고려했다면….
절대 허락해 줄 수 없다.
어딜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기어들어 가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