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304)
청춘소녀(2)
4월 5일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날이다.
2021년.
4월 5일 명동에서는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참사다. 던전 브레이크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불행히 이날 명동 던전 사태에는 인재가 겹쳤다. 본래 S급이었던 던전은 담당 길드가 등급을 속이는 바람에 그에 맞는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서울 중심부였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 하지만 동시에 서울 중심부였기 때문에 그나마 대응이 빨랐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시민 중에는 시범고 학생들이 있었다. 던전 게이트와 가까운 문제의 그 길드 사무실에 민간인 수십 명과 함께 갇힌 아이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구조가 올 때까지 사무실에 숨어 있을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굶주린 몬스터들이 사무실이 있는 건물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건물 입구에 책상과 의자로 어설픈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게 몬스터를 상대로 얼마나 버티겠는가? 막아 둔 건물 입구에 돌진하기 시작하는 몬스터를 보고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나 저항하나 죽는 건 마찬가지였을 테니.
그 아이들은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하지만 최선이 항상 최고의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생존자는 다섯 명. 시범고 학생 두 명과 민간인 세 명.
그게 내가 알던 2021년 4월 5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2021년 4월 5일이 있다.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는데 얼떨결에 이십 년 전의 과거로 오게 된 한 남자가 던전 브레이크 직후 몬스터에 의해 고립된 명동의 낡은 건물에서 눈을 뜨게 된 4월 5일.
남자는 아이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룬을 사용해서 몬스터의 시야를 속이고 사람들의 탈출을 돕는다.
신원이 불확실한, 검 하나 든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건 제대로 된 헌터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시범고 교복을 입은 어린애들은 경험이 없었다. 패닉 없이 수십 명의 민간인과 함께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했다.
아마 알았겠지. 더 이상 버티기란 힘들다는 것을.
그 아이들 입장에서도 도박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다행히도 그 남자는 사람 목숨을 두고는 장난치지 않는 이였다.
당연하지만 그 남자의 이름은 우희재.
바로 나다.
스스로 금칠하는 것 같은 설명이었는가?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라고.
그곳에서 그 아이들이 살아 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이미 많은 전문가가 검증했다. 나처럼 미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놈이라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글쎄…. 원래 계획대로 유지은이, 누나가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때도 명동 한복판에 떨어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누나가 아버지와 함께 무엇을 계획했든 간에, 결국 명동 한가운데서 잔뜩 긴장하고,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을 차린 건 나다.
우희재.
나 하나 도망치는 건 쉽다. 모른 척하는 선택지도 그 순간 분명 떠올리긴 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째서일까?
그 일로 인하여 오랫동안 후회했던 아버지를 알아서?
그날 겨우 살아남아 그 죄책감을 한평생 지고 다니던 이들을 알아서?
그 영향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는, 눈앞에 구할 수 있는 생명이 있다면 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비록 이십 년 전에 죽은 인간일지라도.
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사고가 일어나긴 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아니, 나는 사람들이 최대한 빠르고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실제로 다친 사람이라고 해 봤자 넘어져서 생긴 무릎 찰과상 정도가 다였지 않나.
…어쨌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은 2021년의 4월 5일 대신, 이제 새로운 2021년 4월 5일이 있다.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시범고의 학생들도 무사히 친구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시범고는 본래 받았을 욕설과 원망 대신, 의심스러운 인정을 받았다.
‘아, 저런 게 있긴 했었지?’
‘그래도 나름 구실을 하나 본데?’
의심스럽다고 하더라도 인정은 인정. 시범고가 정식 학교로 보다 일찍 인정받은 것도 영향이 있었다.
양성고 인가가 훨씬 빨라지면서 다른 것들도 많이 바뀌었다. 본래 김채민이 뒤처리를 하다가 죽었을 세이렌 던전도 아버지가 일찌감치 닫았다.
아버지의 주름과 흰머리에 한몫 보탰을, 관리청을 둘러싼 알력 다툼도 줄었다. 줄다 못해 홍석영은 지금 관리청을 만들 생각도 없어 보였다. 관리청의 시작이 헌터 보호 목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 홍석영의 우선순위에 관리청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 외에도, 이사장이 웃으면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문이 돌던 이미선이나 세상 심각한 표정 지으며 던전만 돌던 누나나, 오현욱과 박서현도 마찬가지다. 유서 한 장 달랑 남긴 순순진도….
모든 게 바뀌었다.
순전히 죽을 걸 알면서도 모질게 떠나지 못했던 나의 변덕 때문에.
“…이거 누가 하자고 했냐?”
“왜 날 봐? 이거 하자고 했던 건 순순진이다?”
“쌤들한테도 물어보자고 했던 건 너잖아.”
“그랬나? 잘 기억 안 나네.”
“그랬다고.”
“기억 안 난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자 이승연과 서한성이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호미로 땅을 고르고 있다.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방긋방긋 얌전히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그리고 그 변덕으로 인한 변화의 결과물이 이거다.
따사로운 봄 햇살, 부드러운 봄바람, 그 아래서 체육복 입은 학생들이 머리에 모자나 두건 하나씩 둘러쓴 채 땅을 파고 풀인지 나무인지 모를 어린나무를 심고 있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생명으로 가득 찬 봄, 활기찬 소년 소녀들.
나는 이승연을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주는 대신,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얼음이 가득한 레모네이드는 보기만 해도 청량감이 느껴지는 효과가 있다.
지유건 대신 카페테리아를 지키고 있는 헌터에게 일부러 부탁해서 꽂은 파라솔 장식과 빨대가 흔들린다.
이승연과 서한성의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저걸 보겠다고 내 입맛에 맞지도 않는 음료수를 들고 온 보람이 있다.
“우 쌤, 안 심심해요? 쌤도 같이 하실래요?”
이승연이 일부러 크게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김채민이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귀여운 녀석. 날 걸고넘어지기엔 아직 한참 이르지.
“아니. 난 할 일이 많아서.”
나는 반대쪽 손으로 보고서를 흔들었다.
“야! 이승연, 똑바로 안 해?!”
그리고 뒤이어 순순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이승연이 어깨를 움츠렸다. 나를 끌어들이려던 시도는 시작하자마자 끝났다.
“채민 쌤! 이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해요?”
“자, 이렇게…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지금은 내가 마법으로 보살필 수 있지만, 모든 식물이 그런 건 아니잖니?”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었던 풍경일 것이고, 누나가 어떻게 해서든 되돌려받고 싶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레모네이드를 입 안에 머금었다. 차갑고 새콤한 맛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것이 내가 과거를 바꾸어서 얻어 낸 미래이다.
내 가족을 대가로 지켜 낸 생명이다.
“이번만 특별히! 해 주는 거니까 잘 보렴? 어디 가서 절대 못 보는 거다?”
김채민은 아이들이 묘목을 심고 나자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나야 몇 번 본 모습이었고, 박서현이나 최진우도 수업 때 종종 보아서 그런지 크게 감흥이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달랐다.
그래, 어디 가서 절대 못 보는 마법이긴 하지. 대마법사가 겨우 화단 하나 꾸미겠다고 마법을 쓰고 있는 건데.
“우와.”
“와아….”
그 무엇보다도 따스한 봄날 같은 마력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저 마법 하나에 얼마나 많은 마력과 얼마나 복잡한 수식이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순수한 감탄만 들린다.
김채민이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이었겠지. 나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잠시 내려놓은 채 화단에서 움트고 있는 묘목을 구경했다. 여린 잎이 돋아나고, 금방 자라난다.
화단은 금방 봄꽃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가 살려 내고 싶었던 사람들과, 누나가 가지고 싶었던 가족일 거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우이록이 우희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눈앞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아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것이 만족스럽다. 저 아이들은 그 애들처럼 죽음과 상실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니까. 사람인 이상, 헌터라는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언젠가 알게 될 테지만, 그때처럼 어린 나이에 힘든 대가를 치르며 깨닫게 되지는 않을 거다.
“아!”
마침 불어온 바람에 순순진이 쓰고 있던 모자가 내 발치까지 날아왔다.
나는 모자를 주워 순순진에게 주었다. 순순진은 흙먼지가 묻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모자를 고쳐 썼다.
그 애가 다시 친구들 사이로 돌아간 뒤에야 나는 아차, 하는 마음에 잠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보고서를 보았다.
…못 봤겠지? 영어로 적힌 거니까?
[부산항 조사 – 컨테이너를 이용한 밀수 및 밀항자…]미국 녀석들은 보고서 제목에다가 정보를 너무 많이 욱여넣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뒤집었다.
그래, 애들 있는 데서 이딴 걸 보고 있는 내 잘못이지. 하지만 나도 볕 좋은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즐거운 내용도 아닌데 안에 틀어박힌 채 읽어 봤자 내 기분만 더러워지잖아.
하긴, 순순진이 이걸 보아도 뭐라고 생각하겠나.
기껏해야 이 학교가 뭔가의 본부라는 가설에 힘을 실어 줄 뿐이지.
* * *
“역시 이 학교 수상하지 않아?”
“…이제서야?”
아니나 다를까 순순진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했다. 순순진과 함께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 서한성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화단 물 주기 당번이라니. 참 없는 일을 잘도 만들어서 한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일종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었나.
…이 화단이 상담실 창문 앞이라는 걸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데.
“아니, 그전부터 의심이야 하고 있었는데!”
순순진은 서한성의 말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역시 이상하잖아! 식당에서 일하는 분이나 보건 쌤까지 죄다 다선 헌터들이라고!”
“너 나중에 다선 들어갈 거라며? 미리 친해지고 좋네.”
“그 말이 아니잖아!!”
순순진이 답답해한다. 서한성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뿌리개를 기울이며 화단에 물 주기 바빴다.
뭐, 대충 줘서 꽃이 시들더라도 김채민이 어떻게든 해 줄 테니 난이도는 하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눈치 못 채고 있는 시점에서 영…. 훈련이 부족했나?
“애초에 채민 쌤 같은 대마법사가 있는 것부터가 이상하다구. 그리고 저 몬스터 시체는 언제 치울 거래?”
“선생님들이 알아서 하시지 않을까?”
“보스턴에 있던 게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이상하진 않고?!”
“선생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
커튼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순순진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진 대충 알 것 같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