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305)
청춘소녀(3)
“됐어, 너한테 말해 봤자 어쩌겠어.”
순순진은 힘이 빠진 채 중얼거렸다. 의욕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화단에 물은 계속 주고 있었다.
아니, 김채민이 식물을 죽게 놔둘 리야 없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성의를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식물에 물을 준다는 게 그렇게 한자리에서 물을 쏟는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그리고 제발 커튼 뒤에 내가 있다는 것도 눈치를 채 줬으면 한다. 나라고 몰래 듣고 싶어서 듣고 있는 게 아니라고. 들리는 걸 어떡해?
그리고 인간 심리란 것이 오묘해서, 들리면 듣고 싶어지는 법이다.
“선생님도 다 생각이 있겠지.”
서한성은 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신뢰라기보다는 순순진을 상대하는 게 귀찮은 쪽인 것 같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사실이 중요하지.
“그치만….”
“설마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이 우리한테 안 좋은 일을 시키겠어? 우리보고 나가서 몬스터를 잡아 오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 잡는데 망보고 있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실제로 서한성은 오현욱처럼 던전에 강제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순순진이 알기로는 다르다. 서한성의 사정을 알고 있는 건 나나 홍석영, 이미선을 비롯한 다선 헌터 몇몇뿐이다. 서한성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순순진은 서한성도 오현욱 같은 불공정 계약의 피해자로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자연히 순순진의 반응이 조심스러워졌다.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야?”
“…….”
그리고 조심스러운 건 서한성도 마찬가지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만큼, 서한성은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순순진이 어느 시점에서 이미선에게 합류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명동 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지금은 확실히 알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알게 두지 않을 거고.
서한성도 자세한 일은 모르지만, 다선이 아니라 협회와 관련된 일이 평범한 학교의 일이 아님은 진작 눈치채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 눈치로 이게 친구들한테 쉬이 말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서한성도 협회에 들어가면 일을 잘했을 것 같다. 그리고 보통 그런 곳에서의 ‘일을 잘한다’는 말은 ‘빨리 죽는다’와 같은 말이다.
“아니면… 그러고 싶어?”
“어?!”
순순진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냥 목소리만 그랬다는 게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 뛰어올랐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네가 하는 말이 꼭 그런데.”
“…뭐가 그런데?”
“왜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꼭 있잖아. 하지 말라는데 해서 먼저 죽는 애들.”
서한성은 꽤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화나 소설에서도 그렇잖아. 물론 얌전히 잘 있으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될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교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밤중에 복도를 돌아다녀서 괴물이 지키고 있는 방에 들어가거나 하는 일은, 그렇잖아? 그래서 다치면 어쩌려고? 누가 죽으면?”
무심했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양된다. 그에 반해 순순진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여긴 그렇게 탐험할 거리도 없거든!”
“왜 없어?”
“…저 몬스터?”
“뭐야. 저거 궁금해서 가 보자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난 왜 안 치우냐고 한 것뿐이거든!”
보통 애들끼리 있으면 이승연이 헛소리를 하고 순순진이 거기에 은근슬쩍 발을 얹는다. 괜히 소꿉친구가 아니다. 이승연이 가출했을 때 휴대폰을 빌려주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래서 순순진이 오히려 상식적인 소리를 하며 서한성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선했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서한성이 순순진을 놀리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목소리만큼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영화는 그렇게 시작하거든…. 금기를 어긴 아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공포 영화 아니라고, 이건!!”
결국 참다못한 순순진이 꽥 소리를 내질렀다. 그 뒤에야 서한성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그런 애들 좋아해.”
“…엥.”
“가만히 있으면 스토리가 진행이 안 되잖아. 기다려 봤자 바뀌는 건 없어. 뭔가 해 봐야 한다고.”
“…너 진짜 이상하다.”
“알아.”
“어휴. 말을 말아야지.”
나는 눈을 찌푸렸다.
이거, 서한성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애들이라면 몰라도 서한성은 얌전히 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원래 얌전한 애들이 화나면 제일 무섭다더니 잠깐 눈만 떼면 바로 사고를 치겠다는 발언 같지 않은가.
하긴. 제정신인 애라면 5년 뒤에 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을 그리지는 않을 거다.
서한성의 위험도를 올렸다. 이런 애들을 잘 체크해 놔야지.
“아. 물 다 줬다.”
“나도.”
“이거 근데 이렇게 줘도 되는 거야?”
꽃에 물을 준다기보다는 한군데에 서서 물을 ‘쏟았다’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한성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채민 쌤이 알아서 해 주실 거야.”
“그렇겠지?”
“그냥 물뿌리개에 있는 물만 뿌리고 오면 된댔잖아. 이런 걸로 죽진 않겠지.”
식물은 예민하다. 물을 많이 줘도 죽고, 적게 줘도 죽는다.
하지만 화단에서 키우는 꽃이나 나무는 생명력이 강한 종류로 보통은 어지간해서 죽는 친구는 아니다. 김채민이 여기에 뭘 심었다고 했지? 식물에 관심을 둬 본 적은 없다. 마력초 같은 게 아니라면.
…하긴. 김채민이 공들여 가꾸는 화단에 심긴 건 평범한 식물이 아니다. 유사시에 김채민의 방어 마법의 매개체가 되어 줄 것들. 물 좀 뿌렸다고 죽는다면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된다. 아마 저 물도 김채민이 특수한 방법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흠…. 다른 사람 대화를 몰래 엿듣는 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서한성의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데 와서 제멋대로 떠드는 것 자체는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근데 교장 쌤은 언제 돌아오실까?”
순순진이 화단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교장 쌤한테도 취미 물어보려고?”
“당연하지.”
“…교장 쌤 취미가 뭔지는 짐작도 안 가는데. 훈련이 취미인 거 아냐?”
“설마.”
순순진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그렇게 웃으면 안 될 텐데.
순순진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금방 웃음을 멈췄다.
“설마. …아니겠지?”
“우 쌤한테 물어보면 알지 않을까?”
“아, 우 쌤 취미도 아직 같이 못 했는데!”
“물어보긴 했었잖아.”
“응.”
순순진의 ‘또 다른 나를 탐구하기’ 프로젝트를 제일 먼저 거친 것은 당연히 친구들이다. 이승연한테서 바둑도 배워 보고, 서한성과 함께 게임도 해 보고…. 처음에는 순순진만 했었는데 점차 인원이 늘기 시작했다.
강태우와 함께 비즈 팔찌를 만들고 있는 애들을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서로의 취미 공유가 끝난 아이들이 다음 타깃으로 잡은 건 나였다.
“무슨 취미에 준비 기간이 필요한 거야?”
“뭐… 우 쌤이라면 요트 같은 걸 탈지도 몰라.”
“아. 어울린다.”
“그치.”
…저 애들 머릿속에서 난 도대체 어떤 이미지인 거지.
“몰라. 언제 된다고 했지? 진짜, 얼마나 대단한 취미인지 두고 볼 거야!”
* * *
“자, 오늘은… 순순진은 왜 저러고 있는지 아는 사람?”
“키우던 꽃한테 공격당했대요.”
“꽃? 김 선생님 영역 근처에라도 갔니?”
“전 거기 가려던 게 아니라요!”
순순진은 퉁퉁 부은 얼굴로 항변했다.
“화단 말고 다른 꽃도 키워 보고 싶어서 채민 쌤한테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전화로 하지 그랬어.”
“…아!”
순순진도 어찌 된 게 갈수록… 부족해 보이지. 애들이란 게 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순순진은 이승연과 같이 장난치는 걸 제외하면 똑 부러지는 이미지였는데.
얘도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사실 긴장을 하고 있었던 걸까. 뭔가 대단한 이유 없이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헌터를 해 보자던 아카데미 학생들이 종종 저런 식으로 굴긴 했다.
동기는 없지만 재능은 있던 애들.
그런 애들이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비슷한 실력의 애들과 뒤엉키고, 친구를 만들고, 장난을 치다 보면 본래 성격이 하나씩 드러나곤 했다. 누나는 그것을 역진화 현상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는 게 항상 좋은 방향은 아니라면서.
순순진도 그 현상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누나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나는 저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애는 애다워야 한다. 순간 떠올렸던 순순진의 유서를 다시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그래. 역진화든 뭐든 이쪽이 훨씬 낫지.
게다가 어찌 되었든 순순진이 불러일으킨 취미 탐색은 양성고에 꽤 좋은 바람이 되어 주었다.
한결 분위기가 풀린 게 나한테도 느껴진다. 덩달아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휩쓸리고 있다. 다들 요 근래 일어난 일에 긴장하고 있었던 거다. 가끔 지나가다가 보면 휴게실에서 다선 헌터 몇 명이 아이들과 의미도 없는 내기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오래된… 지금 기준으로는 최신 게임이겠지만, 내 눈에는 고전인 격투 게임으로 간식 내기를 한다는 식으로. 어차피 여기서 돈 내고 사 먹을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하지만 때론 어른들도 귀찮고 복잡한 일을 모두 잊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김 선생님이 너 보긴 봐 줬어?”
“네…. 그냥 예전에 깔아 뒀던 마법이 발동된 거라고 별거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놔두면 가라앉는대요.”
“자, 다들 배웠지? 마법사의 영역에는 함부로 다가가는 게 아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요란하게 웃음이 터진다. 보통 순순진을 놀릴 만한 거리는 없었기 때문에 이승연의 웃음소리가 제일 컸다.
순순진의 얼굴이 더욱 부루퉁해졌다.
나도 웃음을 참으며 순순진을 달랬다.
“너희가 학교에 오기 전에 깔아 두었던 거야. 선생님이 많이 미안해하던데.”
“으…. 아뇨. 영역에 잘못 다가간 제가 잘못한 게 맞긴 해요….”
“키우기 쉬운 화분 몇 개를 골라 놨으니까 나중에 준다고 하더라.”
“네….”
풀이 죽은 순순진을 위해 나는 화제를 돌렸다.
“자, 오늘 오후 수업이 끝나면 다들 운동장으로 모이면 된다.”
“왜요?! 시험 봐요?”
“시험 보고 싶어?”
“아뇨!”
이승연이 재빨리 대답했다.
“시험은 아니고…. 너희 내 취미 궁금하다며.”
“네.”
“준비가 끝났으니까 수업 끝나고 나와. 알았지? 보고 마음에 안 들거든….”
“안 들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강제 참가다. 마음에 안 들어도 앉아 있어.”
“…앉아서 하는 거예요?”
“그래. 감상문도 써 와. 그동안 숙제가 없었지?”
“윽.”
“감상문이요? 뭐에 대한 감상문인데요?”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시점에는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라 번역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물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마는.
“영화.”
“영화?”
“그래. 난 영화 보는 걸 좋아하거든.”
순순진을 포함한 모두가 놀랐다. 아니, 순순진에게는 저번에 영화에 대해서 말해 줬는데 왜 저렇게 놀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안 믿었나?
아이들이 수군거린다. 내가 단순히 자기들을 골려 먹으려고 감상문을 써 내라고 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럴 리가.
그랬다면 그냥 시중에 있는 아무 재미없는 영화나 틀어 줬겠지. 굳이, 굳이 이 영화를 구해 오는 일은 없었을 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