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322)
보호자(2)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는 음영이라곤 하나도 없다. 유난히 결이 좋은 머리카락은 나이 지긋한 노인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집게 핀으로 틀어 올린 노부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노부인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친근한 말이다.
“이사벨라, 나도, 우리 손주 얼굴 좀 보게 해 줘!”
노부인의 풍성한 머리카락과는 반대로 풍채 좋은 노인은 머리카락이 없다. 깔끔하게 밀어 버린 머리 위에는 짙은 회색 중절모를 쓰고 있다. 모자와 같은 색의 스웨터 아래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탄탄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누가 보아도 은퇴한 헌터였다.
노부부는 능숙한 한국어로 나를 앞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외국인 특유의 어색한 발음이 녹아 있긴 했지만 오랫동안 한국어를 사용해 왔는지 능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사람들은….
“아니, 당신은 방해되니까 저리 가요!”
“당신이야말로 방해지!”
“어린애처럼 떼쓰지 말고! 태우와 소피아를 좀 봐요. 저 아이들보다도 못하면 어떡해!”
노부인의 어깨 너머로 강태우와 눈이 마주쳤다. 강태우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여동생의 손을 잡고 노부인에게 말했다. 뽀얗게 살이 오른 얼굴이 보기 좋으면서도 얄밉다.
“할머니, 저 다른 형이랑 누나들한테 갔다 올게요!”
“어이구, 그래요, 가서 놀다가 와요.”
쟨 왜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아, 소피아. 너 선생님한테 드릴 거 있다면서.”
“어, 으응. 응….”
소희, 이제는 소피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한 여자아이는 부끄러운 듯 몸을 이리저리 꼬며 내게 다가왔다. 덕분에 노부인이 나를 놓아주었지만 그걸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노부인은 소피아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작은 행동에 용기를 얻었는지 여자아이는 내게 예쁘게 포장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그, 오빠!”
예상치 못한 호칭에 당황했다.
“…뭐?”
“이거, 내가 할머니랑 구웠어! 쿠키!”
“…….”
“맨얼굴은 처음 보지만… 그래도 그때 고마웠어. 움, 쿠, 쿠키 만들어 본 건 처음이었는데! 할머니, 가 많이 도와줬어…. 아마 맛은 괜찮… 을 거야. 나도 먹어 봤는데 맛있었으니까….”
나는 뒤늦게 소피아가 말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여자아이가 건네는 수줍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건 짓궂은 장난만 쳤던 남자아이가 아니다. 까마귀 모양의 가면을 쓰고, 연구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남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형의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저기, 그. 오빠?”
소피아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굴었다. 강태우에게 보낸 영상에서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통통 튀어 오르기 바빴던 아이인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아마도 오래전 죽었을 형의 이름이 처음으로 다르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분명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바른길로 안내했으니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내가 아니라 형의 친절에 인사하고 있다. 나는.
나는….
툭.
노부인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나보다 한참 작은 키였으니 감싼다기보다는 손을 겨우 올려놓는다는 것에 가까웠지만 가만히 내 등을 도닥이는 손길이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따스한 눈빛이 쏟아진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얼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얼굴.
조금 더 당당해져도 문제없다는 얼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며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
“…직접 만들었다고?”
“응!”
“고마워. 잘 먹을게.”
나는 소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이록에게 하는 것처럼 조금 거칠게 했다가 움찔했다. 여자애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지? 똑같이… 해도 되나? 양성고 애들이야 공평하게 굴렸다지만 걔넨 헌터 지망생들이잖나. 얘는 그런 것도 아니고….
하지만 소피아는 내 손길에 긴장하던 것도 잠시,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환하게 웃었다. 어렴풋한 연구소 시절의 기억 속에서도 실없이 잘 웃는 애였던 것 같긴 하지만.
또래의 시선이 아니라 어른의 눈으로 본 어린아이의 웃음은 어쩐지…
…….
내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 * *
“난 이사벨라 블레이크라고 해요. 이쪽은 로버트 블레이크.”
노부부는 커피를 홀짝이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짐작했겠지만 우린 석영의 처가란다. 지금은 그런 걸 떠나서 석영을 우리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지.”
이사벨라 블레이크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지 오래된 입양 딸의 사위를 아들이라고 칭하는 마음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뿐인 손자도 죽었다.
피가 이어져 있다고 모두 가족인 건 아니고,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을 마주하고 있으니, 홍석영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강태우와 그 여동생의 신원을 만들 때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홍석영이었지. 정말… 무슨 생각이었을까?
젠장, 아무 생각 없었겠지! 생각은 무슨!
눈이 마주치자, 이사벨라는 아까 전처럼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쪽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모자를 벗은 로버트 블레이크의 얼굴은 형광등 아래에 훤히 드러났다. 로버트는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을 매만지며 교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체구와는 달리 호기심 넘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다.
이자벨라는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채고는 팔꿈치로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원하지 않은 친절이었다.
“당신은…! 얌전히 있지 못해요?”
“아니, 석영이 학교를 만들었다고는 들었는데… 신기하잖아.”
“지금은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잖아….”
로버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자기보다 한참이나 작은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한참을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이사벨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그냥 편하게 할머니라고 부르면 된단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나오는 말은 없었다.
내뱉고 싶은 말이야 많지. 하지만 그건 이 사람… 이분들을 향한 게 아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태연하게 놀고 있을 괘씸한 아저씨를 위한 것이다.
한참을 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결국 바보 같은 말이나 하고 말았다.
“…한국어를 잘하시네요.”
기껏 나온다는 말이 이거냐고.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것도 또 문제다.
내 모든 생애를 통틀어서 나에게 조부모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생물이었다. 친부모는… 그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과정을 거쳐서 평범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운데. 조부모? 조부모라고?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난 아버지가 죽은 아내의 부모와 꾸준히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왜 나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답은 쉽다.
내가 싫어했을 거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내 삶에 끼어드는 걸 싫어했으니까.
그럼 지금 이분들을 소개해 주는 이유는?
“풋.”
“……?”
“아이고, 미안해요.”
이자벨라와 로버트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바라보자 이자벨라는 손을 내저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모습은 어쩐지 아버지와 겹쳐 보였다.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서 서로 닮아 간 건지, 아니면 공통으로 아는 사람의 버릇이 옮았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석영이 그랬거든요.”
“네?”
“아마 한국어 잘한다고 칭찬부터 할 거라고.”
“…….”
“부끄러워하는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 아저씨가 진짜….
옆에서 같이 웃고 있던 로버트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석영의 아들이라면 우리 손주가 맞지. 셋째는 어디 있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인가?”
“…셋째요?”
“석영의 셋째 아들이니까 셋째가 맞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제 동생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셋째.”
“…….”
내가 당황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을 텐데도 이사벨라와 로버트는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이런 점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글생글 웃는 부드러운 눈빛은 아버지와 누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견디기 어려운 간질거림이 온몸에서 느껴진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억지로 억눌렀다.
…싫은 건 아니었다. 싫은 건 아니었는데.
그냥, 뭔가가 조금. 그게.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저, 혹시 선생님… 그러니까, 그, 사위분한테.”
“네 아버지?”
이사벨라는 말간 눈으로 내 말을 정정했다.
“아니, 그게….”
“네 아버지가 왜?”
“제 아버지가…….”
“으흠?”
“…….”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알아듣지 않을 거다. 이건 오래 끌수록 내가 지는 싸움이다.
나는 적당히 단어를 얼버무리며 물었다.
“…네, 혹시 저에 대해서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홍석영이 내게 묻지도 않고 모든 걸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홍석영의 가족이지 않은가. 내가 모르던 아버지의 가족. 또 모르잖아.
“글쎄.”
이사벨라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들을 만한 건 다 들은 것 같은데. 그쵸, 여보.”
“응? 음, 그렇지.”
로버트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영의 아들이잖아?”
“…….”
“그럼 우리 손주가 맞지. 그거면 충분해. 뭘 더 알아야 하나?”
“그….”
“아니지. 알아야 하긴 하지.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요 할머니가 음식 하나는 끝내주게 잘해.”
로버트는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헌터라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말랐어?”
내가?
나는 로버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시력이 안 좋은 건가?
“그래, 그래. 왜 이렇게 말랐어! 데이먼과 비슷한 키인 것 같은데… 몸무게는 30파운드도 더 차이 나는 것 같네.”
“데이먼이 누굽니까?”
“응? 우리 아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들의 아들이라고 하면 시신을 찾지 못한 죽은 헌터 아닌가.
내가 어색하게 입을 다물자, 이사벨라는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한나 먹인다고 한국 음식도 많이 해 봤어. 그러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진짜야. 아주 수준급이야. 어지간한 건 다 만들어 줄 테니 팍팍 말하라고.”
“그….”
“셋째한테 줄 선물도 사 왔는데! 학교? 아직 학교라고? 우리가 데리러 가도 되나?”
“아직 우리 얼굴을 모르잖아! 같이 가도 괜찮니?”
“저기….”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자칭하는 노부부는 내게 반론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내 손에 들린, 분홍색 리본이 달린 아기자기한 종이봉투의 무게만이 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일깨우고 있을 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