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324)
보호자(4)
“어… 음. 네… 그게, 아니….”
“형이랑 아주 똑같이 생겼네!”
“왜 이렇게 말랐어? 밥은 먹었어? 할머니가 간식 줄까?”
“각성했다고 했지? 그럼 잘 먹어야지. 네 삼촌도 네 나이 때 각성했었는데 얼마나 잘 먹어 댔는지, 자기가 돼지라도 되는 것처럼 바닥을 굴러다녔다니까….”
우이록의 눈이 팽글팽글 돌고 있다.
나는 지금 우이록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저 나이에 저 상황에 처하지 않아서 어찌나 다행인지.
나라고 블레이크 부부가 당황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이잖아. 돌발 상황에 대응할 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다. 관리청에서 일하던 때 모든 일이 내 예상대로 흘러갔던 것도 아니고.
우이록은 이사벨라와 로버트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홱홱 돌리다가 결국 나를 보았다.
“…….”
나는 소리 없이 작게 웃기만 했다. 우이록은 내가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걸 빠르게 깨달았다.
“자, 할머니라고 불러 보렴!”
“할아버지부터 말해 봐! 로버트 할아버지!”
“애가 놀랬잖아요. 저리 안 가요?”
“내 손주잖아!”
실랑이를 벌이는 노부부 사이에서 우이록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홍석영이 저 모습을 보고 싶어 했을 텐데.
“…블레이크. 블레이크… 블레이크라.”
반면 김채민은 뭔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김채민도 이사벨라와 로버트에게 소개해 주긴 했다. 다만 두 사람의 관심이 극동의 대마법사보다는 우이록에게 향했을 뿐이다.
“왜 그럽니까?”
“아뇨, 왠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나는 로버트 블레이크를 보았다.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 키와 커다란 체구, 전혀 죽지 않은 근육.
지금은 우이록 앞에서 헤벌쭉 웃고 있긴 하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서 은퇴한 헌터라면 보통 실력은 아닐 거다.
심지어 홍석영이 일부러 한국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실력.
…나의 당혹스러움과는 별개로 우이록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긴 했다. 솔직히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지.
“형!”
결국 노부부의 관심을 버티지 못한 우이록이 나에게로 도망쳐 왔다.
나는 우이록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리 영악한 녀석이라고는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다. 게다가 아직까지 우이록에게는 내 어린 시절의 버릇이 남아 있다. 이제 우이록이 내가 되지 않을 테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버릇도 달라지겠지만… 당장은 녀석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형, 저 사람들 이상해.”
우이록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래 봤자 블레이크 부부도 이 말을 듣고 있을 거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말했다.
“뭐가 이상한데?”
우이록은 아래로 늘어뜨린 손에 닿는 제 바지를 꽉 쥐었다. 바지에 자글자글 주름이 생겼다.
…어른이 되고 난 뒤에 보면 결국 나도 어린아이였다니까. 이렇게 뻔히 다 보이는데, 왜 나는 내가 어른을 속여 넘겼다고 믿었을까.
연구소에 있던 인간들이 내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해서?
누군가의 거짓말을 간파한다는 건, 상대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정도로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열 살짜리 어린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는 건 그만큼 그 애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다. 아니면 굳이 그걸 지적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거나.
나는 그 사실을 아이에게 가르쳐 줄 만큼 잔인하지 않다. 대신 쑥스러울 때마다 옷자락을 잡곤 하는 동생이 입을 열길 기다려 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우이록은 한껏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멈췄다.
“그… 러니까.”
“그러니까?”
“…….”
우이록은 바지를 꽉 쥐었다.
눈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아닌 척 블레이크 부부를 훔쳐보는 것이 갸륵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할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지껄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걸 못 본 척해 줬을까.
눈앞에 있었으면 멱살을 잡고서 말하라고 닦달했을 텐데.
아니, 반대로 평생 그 입으로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만날 수 없다. 내 앞에는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 있다.
“그게…. 이상하잖아.”
“이상해?”
잠깐. 나 왠지 얘가 뭐라고 할지 알 것 같은데.
“외국인인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잖아!”
“풉.”
“큭.”
이사벨라와 로버트에게서 참지 못하고 새어 나온 웃음소리를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기억하자. 얘는 내가 아니다. 이건 나의 과거가 아니다. 별개의 인물이다. 얘가 십 년 뒤에 놀림받는 건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내가 놀리면 놀렸지!
어쩐지 귀가 화끈거린다. 난 모르는 일이다. 모르는 일. 얘는 내가 아니라니까?
“……?”
우이록이 고개를 번쩍 들자, 블레이크 부부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키며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우이록은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뭐가 이상한지는 알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푸훕….”
“…조용히 해요.”
나는 김채민에게 속삭였다. 김채민은 요란하게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숨겼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외국인이 한국말 잘할 수도 있지.”
“하지만….”
“갬블 박사님도 한국말 잘하잖아?”
“그 사람은 한국에서 일하는데 당연히 잘해야지.”
우이록은 제법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우이록이 블레이크 부부의 친근함에 낯설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말 싫었더라면 발이든 주먹이든 말보다 물리적인 행동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아마 나라면 그랬을 거다. 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다니더니 그래도 저 나이의 나보다는 사회성과 예의가 잘 장착이 되어 있다.
혹은 주먹을 뻗는 대신 뾰족한 말을 내뱉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이록은 미친 노인네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발광하는 대신 연신 두 사람을 흘깃거리며 옷을 쥐어뜯었다.
그러니까… 보인다는 거다. 우이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록이,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배웠다던데.”
“…응?”
“아저씨가 예전에 결혼했던 거 알아?”
우이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몸을 낮춰서 우이록과 눈높이를 맞췄다.
“아저씨네 아내는 몸이 안 좋아서 옛날에 돌아가셨대. 저분들은 아저씨 아내의 부모님이야.”
“…….”
우이록에게는 형이 채워 줄 수 없는 결핍이 존재한다.
어렸던 나는 미처 몰랐던 부분이다. 바로 지금까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색하게 굳은 채로도 차마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을 뿌리치지 못하는 우이록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깨달았다.
아무리 관심 없다고, 상관없다고, 더 이상 엮이는 것도 끔찍하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도… 부모라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처음 맞이하는 보호자의 애정과 관심의 결핍은 나에게 상처로 남아 있었다. 형이 아무리 나를 돌보았어도 그 흉터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우이록에게도 그런 결핍은 있다.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홍석영이 올 때마다 밝아지는 얼굴만 봐도 그렇다. 홍석영의 아들 타령에 뾰족한 소리를 내뱉던 것도 최근에는 거의 사라졌다.
옛날에 연구소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영화를 보며 막연히 품었던 꿈이 생각났다. 영화의 주인공은 생일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요란한 축하를 받았다.
헌터라는 절대적인 무력을 꿈꾸기도 전.
그런 헌터를 휘두르는 보이지 않는 힘을 꿈꾸기도 전.
나는 많은 가족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냥, 그랬다.
미련이거나 후회는 아니다. 난 가족을 가졌으니까.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이제… 우이록 차례다. 형뿐만이 아닌 다른 가족을 가질 시간이 된 거다.
“아저씨가 아들이 되라고 했잖아. 싫어?”
“…….”
“네가 싫다고 해도 아저씨는 널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닐 거고, 저분들도 널 손자라고 생각할걸.”
“…그게 뭐야.”
“그리고 어차피 나이 드신 분들한테는 할머니랑 할아버지라고 불러 드려야지.”
“이상해.”
“그래. 이상하지? 싫어?”
“…….”
우이록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건 블레이크 부부와 나, 김채민뿐이다. 강태우는 여동생과 함께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다. 다행이다. 걔네가 있었으면 우이록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을 거다.
“…아저씨 부인은 죽었다며. 그럼 남남 아냐?”
우이록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미약하게 반항을 시도했다.
“저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인데?”
“……이상해.”
“싫어?”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네가 싫다는 일을 가만히 둘 순 없으니까. 싫으면 형이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 말할게.”
“아니!”
“응?”
“아니….”
우이록은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텐 공손하게 말해야 한다고 배웠어….”
“그래? 그럼 괜찮은 거지?”
이사벨라와 로버트는 기대 어린 눈으로 우이록을 기다렸다.
홍석영이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구소에서 지냈다는 것만큼은 두 사람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김채민도 웃음을 멈추고 우이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분들이 널 손자라고 해도 괜찮아?”
나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내가.”
우이록은 제 옷을 꽉 쥐었다. 저러다 옷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그… 게 되면.”
“응. 되고 싶어?”
우이록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우이록을 기다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었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린애 하나만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그리고 결국 우이록은.
“…….”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 어린 순간이 끝났다. 블레이크 부부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우이록에게 다가오려는 순간.
우이록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형은?”
“……어?”
“형도 손자가 되는 거야? 아저씨 아들이 되는 거구?”
우이록은 바지를 쥐어뜯고 있던 손을 놓았다. 대신 이번에는 내 옷을 잡았다.
어릴 때 내가 형의 옷자락을 잡았던 것처럼.
“형은 그래도 괜찮아?”
아.
이 영악한 녀석.
블레에크 부부는 손을 든 채로 멈췄다. 우이록과는 달리 나를 대놓고 바라보고 있는 게 무엇을 원하는지 뻔했다.
우이록은 자기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
아니, 근데.
그래도….
“…….”
모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되니까 아무래도 좋아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우이록을 보면서 계속 말했었지. 결국 나와는 다른 인간이 될 테지만, 그래도 같다고.
홍석영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도 똑같고.
홍석영이 이걸 계산해서 자신의 장인어른과 장모를 이곳에 부른 걸까?
그렇진 않을 거다.
하지만 으레 경험 많은 노련한 헌터가 그렇듯,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본능적으로 판을 만들었을 수는 있다.
“네가 괜찮다면.”
나도 마지막 반항을 시도했다.
물론 우이록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도 형이 싫다는 거 하기 싫어.”
그래서 나는 백기를 들었다.
어차피 나는 항상 홍석영의 아들이었다. 시간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 사실도 없는 일이 되진 않는다.
“좋아.”
“…좋아?”
“형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거든. 어떨지 조금 궁금하네.”
“우리 손주들!”
로버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처럼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이젠 조금 유쾌해지기도 했다.
이렇게도 가족이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