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325)
복수선언(1)
딩동.
울릴 일이 영 없었던 초인종이 울린다.
나는 화장실 쪽을 슬쩍 보곤 현관문을 열었다.
“굿모닝!”
이사벨라 블레이크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아이구, 같이 가자니까.”
“당신이 너무 느린 거야! 그렇게 느려서 어떻게 던전에 다녔던 거야?”
“당신이 빠르다는 생각은 안 하고?”
이사벨라는 로버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사벨라의 어깨 너머로 로버트를 보았다. 로버트는 내게 손을 흔들었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라고는 해도… 뭘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조부모가 있어 봤어야 알지.
“오빠, 안녕….”
그리고 로버트 블레이크의 뒤로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소피아 블레이크가 보였다.
물론 새로 생긴 손자의 존재에 블레이크 부부가 들떠 있다고는 해도 아침부터 열 살짜리 어린애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올 만큼 정신이 없진 않다.
나는 열려 있는 현관문을 보았다.
나와 우이록이 살고 있는 집 말고.
맞은편 집.
한 층에 두 가구가 사는 아파트였으니까 저 집이 우리의 유일한 이웃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블레이크 부부와 소피아가 살고 있는 그 집 말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분명 홍석영에게 이 집에서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앞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사… 를 나갔던가? 나갔겠지. 솔직히 낮에는 학교에 있었으니 잘 모르겠고, 중간중간 아예 집을 비운 적도 있어서 언제 이사하였고 이사 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괘씸할 뿐이지. 그만큼 홍석영이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니까.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리고 소피아의 뒤로 강태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강태우가 정확히 어떤 설명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하나 빠진 듯 헤실거리는 강태우와 얘기를 해 본 결과, 나와 우이록의 생활도 자기들과 비슷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연구소에서 도망친 우리를 홍석영이 도와주고 있다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 되는… 그런 감성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틀린 말은 아닌데, 아니긴 한데, 뭐랄까. 지적하고 싶은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지적할 곳도 없어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놔두었다.
뭐, 그렇게 스스럼없이 상황을 받아들인 주제에 학교 선생님의 이웃이 되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지만.
“아침 먹어야지! 이록이는 아직 자니?”
“아뇨, 지금 씻고 있습니다….”
“얘는 아직도 딱딱하게.”
이사벨라는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아프지 않게 내 등을 쳤다.
한국인이었던 딸을 위해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익혔던 노부부는 단순히 한국어를 잘하기만 하는 산드라 갬블과 비교하면, 비교하는 게 미안할 만큼 한국 문화에 익숙했다. 딸이 죽은 이후에도 홍석영과 계속 만나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왔, 어요?”
“얼굴 제대로 닦고 나와야지! 수건 가져오렴.”
우이록은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몰골로 화장실에서 뛰쳐나왔다. 이사벨라는 호들갑을 떨며 수건으로 우이록의 얼굴을 닦았다. 조심스럽고 애정 어린 손길에 우이록은 눈을 깜빡이며 얌전히 서 있었다.
나는 쟤가… 처음으로 어린애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니, 그전에도 어리긴 했다. 당장 양성고 애들과 비교해도 어린 티가 확 났는데.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린아이답지 않은 모습도 존재하긴 했다. 낯선 이를 경계하고,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도 싫어하고. 날카로운 말과 은은히 깔려 있는 염세적인 태도까지.
나도 똑같은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그게 뭐가 이상한지 모르고 있었다.
“배는 안 고프니? 할머니가 이록이가 좋아하는 거 많이 해 놨어요. 얼른 밥 먹자.”
“오늘은 할아버지랑 같이 놀러갈까?”
“…또 등산해요?”
“등산이 얼마나 몸에 좋은데! 한국은 산이 많아서 좋아. 할아버지가 사는 곳엔 높은 산이 없어서 심심했거든.”
우이록은 이사벨라의 옷을 꽉 쥔 채 앞집으로 건너갔다.
“등산 싫은데.”
“할아버지가 업어 줘도?”
“…….”
“업고 달려 줄까? 꼭대기까지?”
“…안 힘들어요?”
“할아버지가 왕년에 유명한 헌터였어. 이록이는 깃털처럼 가볍지! 얼른 할머니 밥 먹고 쑥쑥 자라야겠는데!”
로버트는 우이록을 번쩍 들었다.
내 생각에 쟤가 저렇게 들린 적은 아마 이게 처음일 거다. 나는 음, 좀 더…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앉아서 뭔갈 보는 것을 더 좋아했지. 아마 내가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버지를 따라 아침마다 운동했던 걸 빼면 그다지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우이록은 나만큼 영화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태권도장에 다니고, 헌터가 되고 싶다고 하고.
…쟤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자못 궁금해졌다.
곧 우이록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 웃음이 우이록을 평범한 아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연구소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아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다. 싫다는 말은 아니지만 다른 층에 사는 주민들에게서 항의가 들어오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야옹.”
고양이마저 내 말에 동의하는지 길게 울어 댔다.
“희재야?”
“…네.”
이사벨라는 앞집으로 건너가기 전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이 이렇게 낯설게 들릴 줄이야.
“아침 먹어야지.”
“네. 잠시만요. 고양이 밥 좀 챙기고….”
고양이 담당은 우이록이지만, 이 정도는 내가 챙겨 줄 수 있다.
원래 자기가 다 하겠다고 해 놓고서 보호자에게 이것저것 미루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의 특권 아닌가.
나는 한숨을 쉬며 고양이 사료를 꺼냈다. 밥 주는 인간에게만 간드러지게 우는 영악한 생명체는 꼬리를 바싹 세우며 내 다리 사이를 지나갔다.
* * *
내게 꼭꼭 숨긴 채로 자기 처가를 통째로 앞집으로 이사시킨 건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홍석영의 판단 자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고 할 수 있다.
홍석영은 아이들의 안전을 두고 장난치지 않는다. 그게 아들이라면 더욱.
블레이크 부부는 홍석영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일 거다.
게다가 로버트가 우이록에게 호언장담한 대로 로버트 블레이크는 유명한 헌터였다. 그냥 유명한 게 아니라 정말 유명했다. 지금은 은퇴한 지 오래되어서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지만, 그래도 그 시대에 헌터가 훈장까지 받았다고 하니….
지금은 그냥 등산 좋아하는 할아버지로 보일 뿐이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이니 나도 마음 놓고 우이록을 맡길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해도 남인 다선의 헌터들에게 맡기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놓이기도 했고.
그리고 우이록의 눈에 관해서도 말하기 편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기숙사에서 지내야 하는 거 알지?”
“아, 네. 알고 있어요.”
강태우는 조수석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더 일찍 기숙사로 돌아가도 되는데….”
“여동생이랑 그렇게 같이 있고 싶어 하더니. 벌써 지쳤어?”
“아하하….”
강태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부정하진 않았다.
“이록이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피곤해졌어요.”
“뭐….”
“걔네 그렇게 싸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그러는지…. 소희, 소피아도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
강태우는 요 며칠 동안 동생에게 제법 시달렸는지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강태우의 말대로 요즘 우이록과 소피아는 싸우기 바빴다.
“이록이도 그런 애가….”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강태우는 우이록의 행태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다.
나는 말을 바꿨다.
“걔가 잘 지내다가 갑자기 그러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네.”
“음…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잖아요.”
그걸 애가 말하면 안 되지.
“그래도 기껏해야 쿠키 틀을 누가 찍냐로 싸우고 있으니까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요.”
“……소피아가 각성할 것 같니?”
“소피아요?”
초등학생 각성자 두 명이 쿠키를 두고 싸우는 건 생각도 하기 싫다. 특히 한쪽이 우이록이라면 그건 재앙이다.
강태우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록이도 각성했다면 하지 않을까요? 그, 연구소 실험이.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그렇지.”
“아, 근데 제가 알기론 소피아 친오빠가 각성자였거든요?”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운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빠가 있었어? 걔한테? 너 말고?”
“소피아가 오빠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지나가면서 몇 번 말하긴 했는데, 그때도 잘은 기억 못 하는 것 같았거든요.”
강태우는 눈을 찌푸렸다. 오래전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 표정이다.
“아마… 각성자 맞을걸요? 그러니 소피아도 각성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그러더니 이제 막 생각난 듯 덧붙였다.
“저도 아버지가 각성자였거든요.”
“…….”
갓길에 차를 세울지 잠시 고민했다. 내가 학교에 있는 상담실을 그리워할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혹시 모르니 속도를 늦추었다.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기억하니?”
“전 당연히 기억하죠. 매일 아침 엄마가 방송했는데, 약 먹으라고.”
“…….”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고요…. 저도 가족 중에 각성자가 있고, 소피아나 이록이도 마찬가지잖아요.”
강태우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저랑 이록이가 각성했으니까, 소피아도 각성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그렇겠네.”
“할아버지한테 말했었거든요, 하와이에 있을 때. 할아버지가 계속 지켜봐 준다고 했으니까, 걱정은 되지 않지만….”
“그래. 넌 힘 조절 못 했었으니까.”
“아, 그게 언제 적 이야기예요!”
“아직 일 년도 안 됐어, 인마.”
“지금은 잘해요.”
“아니면 곤란해.”
강태우는 내 말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 녀석도 많이 바뀌었다. 당연히 좋은 쪽으로. 우희재나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좀 더 아이처럼 보이게 되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너도 이제 조나단이라고 불러 줄까?”
“싫어요!”
“왜. 네 본명이잖아.”
“아… 선생님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나도 거기서 나오면서 사람이 바뀌었나 보지.”
“으.”
강태우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진저리쳤다.
“솔직히 소희가 왜 소피아라고 불러 달라고 하는지도 이해 못 하겠다고요. 그냥 영어 이름이라서 마음에 들어 하고 있을 거예요.”
“넌?”
“전 싫다니까요…. 이상하잖아요.”
“조나단 블레이크.”
“이상하다니까요!”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사춘기 청소년과 대화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대화 주제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다행히 나는 경험이 많았다.
“아, 그렇지. 선생님.”
“음?”
“선생님이 나중에 뭐가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잖아요.”
“뭐….”
“소희, 소피아가 왔으니까 제일 하고 싶은 건 벌써 이루었거든요?”
강태우가 그렸던 것을 떠올렸다. 여동생.
“그래서 이번에는 그걸 해 보려고요.”
“그거?”
“네. 복수요.”
거기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것만으로 나는 훌륭한 교사라고 생각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