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330)
진흙투성이(1)
“안녕!”
요정 타티는 방긋방긋 웃으며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여성처럼 느껴지는 고운 선은 여전했지만 진흙이 저렇게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야 의미가 없다.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디 하수구에서 기어 올라오는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난번에도 그다지 깔끔한 생김새는 아니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던전을 뒤덮었던 진흙 때문이 아니었는가? …아닌가. 아직 이 요정의 습성을 다 모르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지는 않았다.
“타티?”
“응!”
게다가 달라진 점은 외관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홍석영을 보았다. 홍석영도 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홍석영은 손가락으로 귀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요정과 대화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대로, 목소리를 통하여.
이 요정을 마주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 하지만 처음에 요정의 목소리는 귀, 고막이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울렸었다. 가끔 우리가 따라 할 수도 없는 새소리 같은 걸 내긴 했지만.
하지만 지금은… 뭐지. 갑자기 없던 성대라도 생겼나.
“이거!”
역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타티는 내게 들고 있던 검을 내밀었다.
“…고마워.”
작게 인사하자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주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닌다. 그를 따라 진흙이 뚝뚝 떨어진다.
호프는 요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달갑지 않아 했다. 정확히는 어려워했다. 갬블을 한 번 거쳐서도 그랬고, 본인이 직접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개체마다 차이가 심하기도 하고, 본인은 다른 요정을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잘못 말했다가 오해나 심어 줄 것 같다면서.
어쩌면 호프보다 홍석영이 더 많은 요정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홍석영도 타티라는 요정에 대해서 꽤 고심했다.
‘지능이 있는 놈들이잖나. 호프 같은 놈도 있는데, 인간에게 호의적인 이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히재, 찾았어?”
타티는 곧바로 형에 대해서 물었다.
사실 게이트 안으로 검을 던진 직후에는 이 요정이 검을 돌려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진 않았다. 타티는 시야에 방해되었는지 손등으로 진흙을 걷어 올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못 찾았어.”
“…….”
“찾는 중이야.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떤 거?”
“혹시 이런 걸 본 적 있어?”
내 말에 맞추어 홍석영이 요정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품에 넣고 오느라 구겨졌지만 어차피 그림을 보는 데는 지장이 없다. 종이에는 제법 잘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근육질의 남성이 구를 짊어지고 있다. 어깨와 등으로, 온몸을 사용해서. 말이 짊어지고 있는 거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딛고 있는 모습은 구를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흔히들 아는 신화 속의 거인, 하늘을 짊어지는 벌을 받았다는 아틀라스를 묘사한 그림이다.
보통 그러한 아틀라스는 지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홍석영이 내민 그림도 반쯤은 똑같다. 온몸으로 힘겹게 세계를 지탱하는 남자의 그림이니.
다만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짊어지고 있는 것이 푸른 지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깨 위에 있는 것은 말 그대로 활활 불타오르는 태양. 밝게 빛나는 태양 덕분에 그림자가 져서 아틀라스에게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요정 타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그림….”
“본 적 있어?”
타티는 몸을 숙였다. 그림 위로 진흙이 조금 떨어지자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그 작은 몸짓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인간적이다. 이 그림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 아닌가. 타인의 물건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자신이 물건을 상하게 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으며 그 사실에 미안함을 느낄 만큼 사회화가 되어 있다.
그간 던전에서 보아 왔던 몬스터를 생각하면 아예 다른 종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다르다. 아니, 다른 종이 맞겠지.
어쨌든 지난번부터 놀랍기는 했다. 형은 도대체 이 요정과 어떻게 만났길래 이렇게까지 우호적인 생명체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일까.
처음 던전 진입 때 공격했던 걸 생각하면… 아니지. 그건 내가 들고 있는 검 때문이었다. 원래 이 던전의 위험도는 높지 않았으니 애초에 성격부터가 얌전했을 수도 있고….
……오래전 형과 만났기에 던전에 들어오는 헌터들을 공격하지 않았던 것일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타티는 그림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기울였다. 형과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봐도 친구라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었다. 사용하는 단어 수준을 보면 못 알아들었다고 여기기는 힘들다. 대답하기가 싫은 건지, 아니면.
“이거.”
타티는 마침내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머리를 멈췄다.
“중요해?”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중요해?”
타티는 한 번 더 물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대답이다. 저렇게 되묻는 것도 대답이다.
모른다면 절대 저렇게 말하지 않을 테니까.
타티의 눈이 나와 홍석영 사이를 헤맨다. 흘러내리는 진흙을 걷어 내고 드러난 눈동자가 똑바로 인간의 눈을 바라본다.
요정이라는 존재에게도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우스운 격언이 존재할까. 아니면 이것도 누군가에게 배운 것일까?
나는 타티에게 말했다. 형을 아는 몬스터. 형을 친구라고 부르는 괴물.
“중요해.”
“정말?”
“그래.”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형을 찾는 데 필요해.”
타티는 입을 다물었다. 진흙이 머리에서부터 뚝, 뚝 내려온다. 검은빛을 띤 게 진흙이라기보다는 새까만 타르에 가까웠다. 역한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검은색을 불길하다고 여기는 것도 인간의 관점인가? 저 녀석한테는 다를 수도 있지.
“히재… 찾아?”
“찾고 있어.”
“이게, 필요해?”
“필요해.”
나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타티의 눈이 반짝인다.
문득 저 요정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영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 같은 태도와 어눌한 말에 당사자가 속이지도 않았는데 속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형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히재가?”
“형을 괴롭히던 사람이 있어.”
“사람. 인간.”
“그래, 인간. 형이 싫어하던 인간.”
하지만 타티가 들고 있었던 명함. 김유화가 가지고 다녔던 그 명함. 형이 굳이 믿을 수 있다고 길게 적어 놓았다.
형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언제더라?
정확한 시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열 살 이전이었던 건 확실하다. 이십 년 넘게 얼굴도 보지 못한 남자를 단순히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믿기에 나는 너무 어른이 되었다.
아니, 물론 믿지. 믿고 있지. 형인데. 믿고 있다고.
형이 내게 해 준 걸 잊지 않았다. 형이 나를 위해 하던 말이 거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약 없는 말에 매달려 달려들기에는 내게 걸린 목숨이 너무 많다. 홍석영이라면 그게 왜 너한테 달려 있냐고 뭐라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홍석영에게 모두 맡겨 둘 수는 없잖은가. 누나도 그걸 원하지는 않을 테고.
그냥 어렸을 때 기억을 바탕으로 무작정 달려들 순 없다는 거다.
형을 찾고 싶다. 솔직히 살아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고, 홍석영에게 말한 것처럼 시신이라도 찾아서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달려들 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거고.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이야.”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존재가 상표니 뭐니 하는 걸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알아?”
“…….”
“형이 말한 적이 있으면 말해 줘.”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타티의 몸짓이 일순 멈췄다.
홍석영이 가져온 그림, 태양을 짊어진 아틀라스는 문제의 제약회사 아틀라스 사가 임원진을 물갈이하기 전 사용했던 로고이다.
여러 부정행위를 저지른 임원진이 나간 뒤로 아틀라스 사의 로고는 지구를 도식화한 것으로 바뀌었고, 그 후로 몇 번 더 바뀌긴 했지만 파란색 원의 형태는 유지했었다.
그렇다면 태양을 짊어진 아틀라스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래. 이쪽이 문제다.
현재 그렇게 나간 아틀라스의 일부 임원과 직원이 괴상한 논리를 들먹이며 연구소든 뭐든 만들었다. 이 연구소는 이후 노아 미셀의 방주로 넘어갔다.
기존의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크를 그대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다른 아틀라스의 지원을 받는다는 폐쇄적인 컬트 마을은 이 그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건 미국에서 홍석영을 습격했다가 붙잡힌 에르베 슈나이더가 말한 정보이다.
스승을 죽인 마법사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자 빠르게 협조적으로 변했다. 자신에게 현상금을 건 죽은 스승의 가족들과 프랑스 마법 협회로 자신의 신변이 넘어가는 것보단 미국에 계속 남아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슈나이더가 제공한 사진을 확인한 홍석영은 불편한 진실을 하나 더 깨달았다.
‘이건 내가 따로 부탁해서 그림만 복사해 온 거야. 마을 입구부터 저 그림을 당당하게 그려 뒀더군.’
홍석영은 나에게 보여 준 그림을 거두며 말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난 이걸 본 적이 있어.’
‘어디서요?’
‘정확히는 그림 전체가 아니라… 이 태양.’
거인의 등을 태우고 있는 태양.
‘이거 내가 원래 쫓고 있던 방주, 그러니까 헨리 레만 말이지. 그놈 조직원들이 하는 문신이야.’
‘갱단 문신이라고요?’
‘그래. 내가 알기론 간부들은 다 하고 있어. 딱, 여기. 날개뼈 사이에.’
‘…아틀라스처럼요.’
그러니까 형의 일이 아니더라도 알아야 한다. 형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계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꼭 이 그림과 똑같지 않아도 돼. 여기 보이는 원 있지? 이거랑 비슷한 그림이라도 본 적 있어?”
그러니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타티는 내 눈을 한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
“봤어?”
“어디서?”
“으으응….”
타티는 손을 뻗었다. 나를 붙잡는 건가 싶어서 잠시 긴장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 타티는 바닥과 수평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흠!”
가벼운 기합과 함께 마른 흙바닥이 물컹해졌다. 파도처럼 울렁거리고,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다. 마치 물이 빠진 갯벌처럼 땅이 움푹 패는 것이 보였다.
타티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숨이라도 참고 있는 것인지 볼이 부풀었다. 몬스터도 폐 호흡을 하나? 인간처럼 생기긴 했지만….
“……!”
그리고 진흙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홍석영이 덩달아 긴장해서 무기를 찾아 허공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후우웁!!”
타티는 손바닥을 위로 올렸다. 그에 맞추어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것들이 올라왔다.
기이한 형태로 꺾인 시체들. 진흙 속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지만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기만 했을 뿐 생전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었다.
“이거!”
타티는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얘네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