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341)
장미는 바다에서(2)
파도가 친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저 하늘 때문인지 던전은 무한한 공간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니 탐험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생태계, 식물, 훗날 괴물이라고 지칭되는 동물.
어떤 부분에서 그곳에 낭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별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감성적인 감상이 들기도 했으니까.
던전의 공간은 무한하지 않다. 아무리 넓은 던전이라 하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한없이 걷다 보면 벽이 나온다. 돔 형태로 둥글게 감싸는 투명한 벽.
벽 바깥으로 별이 보인다.
예외는 없다. 저 바다를 보아라. 파도가 치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선이 보인다. 지구의 바다와는 달리 배를 띄우면 수평선 너머로 가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던전은 지구가 아니니까.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있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영화. 이렇게, 파도가 치는 바다에 작은 배를 타고 나가면 푸른 하늘이 그려진 벽이 나오는 영화.
정작 그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도 나지 않으면서, 마지막 엔딩 장면만큼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아마 그 벽이 던전처럼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쿠웅!
“…흡!”
김채민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졌다. 헨리 레만은 김채민의 마법을 쉽게 부쉈다.
그래! 부쉈다. 차라리 흡수하거나 했으면 덜 놀랐을 텐데, 부쉈다! 어린아이가 장난감 블록을 가지고 놀다가 집어 던진 것처럼!
“이건 무슨 마법이지?”
헨리 레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에는 검은 실타래를 쥐고 있다. 김채민은 레만이 또 마법을 부수기 전에 마력으로 되돌렸다. 마법이 부서지는 건 타격이 컸다. 김채민은 메스꺼움을 삼켰다.
반면 레만은 자기 손안에서 사라지는 마법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방금 그건 무슨 마법이야? 처음 보는 마법인데.”
“…….”
레만은 딱히 김채민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혼자서 말을 이어 갔다.
“역시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라는 건가. 비장의 수를 숨겨 두고 있다?”
레만은 여전히 바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모래사장에서 약 10m가량 떨어진 곳. 넝쿨이 닿지 않을 거리는 아니지만, 제대로 힘을 쓸 수도 없는 거리다.
속성이 다른 마법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냥 레만에게 통할 만큼 충분한 위력을 내지 못할 뿐이다.
“노아도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비장의 수가 있겠지? 걔가 룬을 쓰는 것만 봐도…. 아! 그래, 그 룬. 노아가 그쪽한테 엄청 화를 내던데. 걔가 그렇게 짜증 내던 거 알렉스 이후로 처음 봤어.”
레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룬을 공개해서 노아 미셀을 자극하겠다는 의도는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김채민은 여전히 침묵을 고수한 채 헨리 레만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아, 이래서 던전은 혼자 들어가서는 안 된다. 특히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던전은.
가장 기본적인 던전 공략 수칙을 깨 버린 대가를 보아라.
김채민의 마법은 정보를 얻는 데에는 좋다. 사람이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을 파고드는 건 식물에게는 쉬운 일이다. 동물도 아니니 자라게 하기도 쉽고….
그런 만큼 김채민의 마법은 무게가 부족하다. 명동의 미노타우로스를 잡을 때처럼 발을 묶거나 제압하는 건 쉽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그러니 지금 손가락만 빨며 레만의 말을 듣고 있는 거 아닌가! 젠장,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넝쿨로 꽁꽁 묶어 처박을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레만도 그것을 알기에 끈질기게 바다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김채민처럼 그녀를 공격할 수단은 딱히 없어 보이는데.
“…….”
잠시 대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레만은 발밑까지 흘러온 장미 꽃잎을 하나 주웠다.
“난 꽃을 좋아한 적이 없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처럼 레만은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채민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도 굳이 참을 수 있는 종류를 꼽자면… 왜, 그런 애들 있잖아. 벌레 잡아먹는 애들.”
레만은 김채민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하더라? 알잖아? 그쪽 식물학자 같은 거 아니었어?”
“…….”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지만 다르다!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김채민은 어디까지나 마법사다. 마법사.
우희재가 저런 무신경한 소리를 지껄였다면 당장 무릎을 꿇리고 세 시간 동안 마법의 역사에 대해 강의했겠지만….
김채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 인간들은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길래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그쪽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이쪽도 답답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분명 위험한 기색은 없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마냥 기다리지는 않았을 텐데, 홍석영이다. 그 홍석영. 그 아저씨라면 다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희재… 우희재는, 뭐. 실력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홍석영이 옆에 있는데 차례가 올까 싶고.
“그거 알아?”
“…당신.”
“아! 드디어 입을 여네. 난 말을 못 하나 싶었지.”
김채민은 마음을 바꾸었다.
어차피 당장 레만을 잡을 방법은 없다. 자신의 마법으로는 확실히 무리였고, 익숙지 않은 속성 마법을 사용해서 공격해 보았자 레만이 계속해서 바다에 서 있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라도 끌어내 보자.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는 둘째 치고, 고전 영화의 고루한 악당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현재까지는 노아 미셀과 알렉스 호프에 대한 투정이 대부분이었지만.
“당신. 인간이야?”
“오. 바로 거기로?”
레만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조곤조곤 이어지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레만은 목을 뒤로 젖혔다. 목에 길게 난 아가미가 뻐끔거리며 벌건 속살을 내보이다가 닫혔다.
“어때? 나 인간처럼 보여?”
“인간처럼 보인다고 해서 인간인 건 아니지.”
“똑똑하잖아!”
레만은 감탄했다. 감탄이라고 해도 오히려 김채민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근데 어쩌지.”
이번에 레만은 정말 안타까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아직 나는 인간이야.”
“아직? 인간이기 싫다는 소리인가?”
“난 노아처럼 인간이 싫지는 않아. 좋잖아, 인간. 인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덕분에 재밌는 거 많이 할 수 있는데.”
“…….”
“아니. 난 그냥 더 강해지고 싶을 뿐이야.”
“…….”
“왜 그런 표정이야? 이상해?”
방주는 둘째 치고, 중남미를 주름잡는 범죄 조직 수장의 입에서 나오는 장래 희망치고는 너무…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평범? 평범하지는 않고. 낭만적인? 어린애 같은? 시시한?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동기.
장난스러운 태도와 과장된 표정,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말투까지 더해지자 그게 진실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는 느낌도 없었다.
김채민은 헨리 레만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렸다. 평이한 인생. 어떻게 그런 조직의 수장이 되었는지, 어디서 방주와 접촉했는지도 알 수 없는, 비밀에 싸인 남자.
김채민이 대답이 없자 레만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마법사니까 이해할 줄 알았는데.”
“…내가 마법사인 게 무슨 상관이지?”
“노아는 나보고 유치하지만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알겠다고 했거든. 걔치고는 드물게 응원까지 해 줬어. 그 콧대 높은 아가씨가 말이야.”
레만의 웃음소리는 이제 거의 완전하게 동물의 소리처럼 들렸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김채민은 뒷걸음질 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그렇잖아?”
눈이 금빛으로 번뜩인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난다고. 그리고 동물은 뭐다?”
김채민은 그 눈이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눈을 닮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지.”
레만이 한 발짝 다가왔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형상을 바꾸고 있었다. 하얀 깃털이 우두둑 살갗을 찢고 돋아났다. 무릎 아래부터 새싹이 돋아나듯 깃털이 자랐다. 뚝뚝 떨어진 피가 바다를 적셨다. 레만의 주위로 핏빛 웅덩이가 생겼다.
그것이 처음 레만이 나타났을 때 보았던 물색과 같다는 것을 김채민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노아가 응원해 줬으니 충분하지. 걔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알렉스가 없는 지금은 나만 한 인물도 없거든.”
레만의 키가 커졌다. 김채민은 실드를 겹겹이 둘렀다.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부족하다. 부족해. 부족하다고!
레만은 그 모습을 보며 더욱 크게 웃었다.
“그러니까 아끼는… 소장품도 빌려주고. 부서져도 난 모른다고 했는데 빌려줬으니까, 뭐…. 잔소리 조금 들어 주면 되겠지.”
살갗이 찢기는 소리가 소름 끼친다. 피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린다. 깃털이 자라고, 핏줄이 불거지고, 발톱이 튀어나왔다. 누가 보아도 인간의 발이 아니다. 짐승. 짐승의 발.
김채민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만의 움직임은 보지 못했다.
쿵! 콰앙!!!
실드가 절반 이상 깨졌다. 김채민은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뱉었다. 모래사장 위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방금 실드를 덧대지 않았으면 죽었다. 김채민은 계속해서 실드를 쳤다. 마법을 사용했다. 장미 넝쿨이 마법사의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짐승은 장미를 파헤쳤다. 마치 실로 만든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노아가 빌려준 게 성능이 좋아서… 오히려 노아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거야.”
짐승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까 마법 많이 썼잖아? 덕분에 마력을 잡을 수 있었어. 예쁜 마력이더라. 찢는 보람이 있어.”
바다가 아니라면. 바다만 아니라면!
그러나 짐승이 바다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장미는 그것을 붙잡지 못했다. 짐승이 모래를 걷어찰 때마다 사라졌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그것이 김채민이 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여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인지 알아볼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김채민은 이를 악물었다.
우희재, 그 인간이 애들 훈련 시킬 때 나도 같이 훈련이라도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애들이랑 같이 하는 것도 웃기잖아! 난 선생님인데!!
그것도 그냥 선생님이야? 대마법사야! 대마법사!!
여기서 가만히 당할 순 없다.
생사가 달려 있어서가 아니다. 이건 김채민의 자존심 문제였다.
겨우 못 배운 짐승 새끼한테 당하고 있을 순 없다는, 자존심.
“들꽃이 너를 위해 춤추는 땅.”
김채민은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입에 고인 피가 흘러내렸다.
모래사장 위로 푸른 잔디의 형상이 떠오른다.
대마법사 김영헌의 고유 마법.
“나무가 지저귀는 달콤한 숲.”
대마법사 김강연의 고유 마법.
“만개하는 장미 넝쿨.”
대마법사 김채민의 고유 마법.
삼대에 걸쳐 갈고닦은 마법이 지금, 이 던전에서 피어났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