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4)
원치 않은 기회(3)
유지은이 죽었다.
그간 든 정이 미운 정이라면 미운 정이었다. 하지만 사이가 나빴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렇게 죽길 바라던 건 더욱 아니었다.
유지은 정도나 되는 헌터가 이렇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척거리며 유지은을 두고 일어났다. 유지은의 검을 주웠다.
아까 헤어졌던 경찰은 아직 살아 있을까? 다른 생존자를 찾았을까? 아니면?
다른 나라는? 전부 여기랑 비슷한 꼴일까? 아니면 그래도 거긴 어떻게든 버텨 냈을까?
알 게 뭐냐.
내 코가 석 자다. 최소한 대한민국은 확실히 망했다.
유지은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넌 살아라.
“여기서 뭘 어떻게 살라는 거야.”
아니면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희망 어린 말이었을까.
내가 아는 유지은은 그런 대책 없는 희망과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하긴,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고 했다. 유지은도 안 하던 말이나 내뱉고 죽은 걸 보면 사람이긴 했나 보다.
하지만 죽은 유지은과 달리 살아 있는 나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도시. 몬스터한테 죽고, 불에 타 죽은 사람들.
“개같네, 진짜….”
유지은의 검을 꽉 쥐고, 욕이나 중얼거리며 다시 걸었다. 얼마 걸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이능관리청까지 와 버렸다.
한때 이능관리청이 있던 자리였다. 번듯하게 서 있던 건물. 헌터 몇 명이 합심하고 옥상에 있던 공원도 손봐서 제법 보기가 좋았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부서진 건물 위로, 새까만 독기의 주인인 거대한 지네의 사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주위에는 헌터들의 시체가 쌓여 있다. 시체는 타 버렸지만 익숙한 무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리청의 헌터들이다.
본부장은?
아저씨의 무기는 눈에 감고도 그릴 수 있다. 생김새는 투박해도 창날에 푸른 물결이 섬세하게 새겨진 창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혹여나 잃어버릴까 싶어 손에 계속 쥐고 있던 본부장의 인식표를 보았다.
아저씨가 늘 목에 걸고 다니는 물건이다. 그리고 유지은이 이걸 가져왔다. 시체 대신.
아저씨는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아무리 헌터가 시체 못 남기는 직업이라고 해도.”
이런 건 아니잖은가.
시체 사이를 걸었다.
계속 걸었다.
‘넌 살아라.’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할 거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 줬어야지.
이제 어쩌지?
계속 생존자를 찾아?
생존자를 찾으면?
“…….”
애초에 생존자가 있기는 할까?
씨발.
“씨발!!!”
울분에 차서 인식표를 집어 던지려다가 멈췄다.
이게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거라고 생각하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유지은의 검을 휘둘렀다. 주인이 죽어서 그런지 까탈스럽던 유지은의 검은 내 마력에도 반응했다.
화르륵.
검에서 불꽃이 뻗어 나갔다. 내 마력으로 피어난 불꽃은 서울을 태우고 있는 불과는 달리 푸른색이다.
제대로 마력을 담은 건 아니라서 푸른 불은 비실거렸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흔들리는 불꽃은 용케도 땅을 기어가 지네 형태의 몬스터 사체에 다가갔다.
다리가 떨어지고, 짓뭉개지고, 베인 사체. 몸에서는 아직도 독을 머금은 체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나도 여기 오래 있다가는 저 독에 중독될 거다.
하.
이 모양이 되어서도 살 생각을 하네. 유지은도 이런 나를 알아서 그딴 말을 한 건가.
“…뭐야?”
그러나 그런 감상도 잠시, 매가리 없던 푸른 불이 사체에 닿자 지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가 영문 없이 구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지만….
멀뚱히 그 광경을 보다가 빈자리를 향해 뛰쳐나갔다. 혹시 본부장의 시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시체가 아니면 무기라도. 무기가 아니어도 다른 뭔가가. 다른. 다른 뭔가라도.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잖아. 그런 사람을 기릴 수 있는 게 인식표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러나 사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독에 부식된 건물 잔해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
아니,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하얀빛에 감싸여 있는 아이템 하나가 덜렁 있었다.
“…그놈한테서 나온 건가?”
던전 안에서 주운 것도 아니고, 몬스터가 아이템을 남긴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지네였으니 내단 같은 게 있었을 확률은 높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잖아. 굳이 비슷한 물건을 찾자면.
…시계?
시계다. 그것도 탁상용 전자시계. 시간을 알리고 있어야 할 화면은 새까맣다.
잠깐 망설이다가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수상쩍은 아이템을 향해 다가갔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이런 수상한 물건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않을 텐데.
[——- 확인. 인가 절차 시행.]“뭐야?!”
그때, 시계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만 화면이 깜빡거리면서 빛났다.
[보류] [비상 절차 가 동] [입력] [입력] [입력]화면이 변한다. 불규칙한 숫자들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멈췄다.
[ 0 0 0 0 – 0 0 – 0 0 ]목소리는 내게 물었다.
[—하시겠습니까?] [ 0 0 0 0 – 0 0 – 0 0 ] [설 정 하시겠습니까?]“…….”
깜빡거리는 여덟 자리의 숫자.
보통 저런 표기는 날짜를 표기하는 데 쓴다.
[설 정 하시겠습니까?]뭘 설정하는지 알아야 하든 말든 고민하지.
[설정하시겠습니까?]인공지능형 아이템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높낮이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게 인공지능이라면 대답해 주겠지.
“뭘 설정하는데?”
[날짜] [설 정 하]목소리가 뚝 끊겼다.
깜빡거리던 숫자도 사라졌다. 빛도 함께 사라진 아이템을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보고 있으니, 화면 위로 다시 숫자가 떠올랐다.
[재 가 동]…요즘 아이템은 자체 부팅 기능도 있어?
[자동 시퀀스 가동] [ 0 0 0 0 – 0 0 – 0 0 ]뭔 지랄이야, 도대체.
“야. 뭔데.”
[설 정 할 수 없 습 니 다]“뭘 설정할 수 없냐고.”
[재 가 동]아이템은 내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꺼졌다가 다시 켜지기를 반복했다.
[ _ _ _ _ – _ _ – _ _ ] [실 행 하시겠습니까?]말이 바뀌었다.
아까는 날짜를 설정하라더니.
“뭘 실행하는지 말해 줘야 할 거 아냐.”
[실행하시겠습니까?]“…….”
인공지능 성능이 좋지 못한 모양이다.
인공지능이 달려 있으면 뭐 하나.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게 하나도 없다. 잠깐 망설이다가 아이템을 주웠다. 변하는 건 없었다. 내가 조작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시계는 계속 깜빡거리기만 했다.
인공지능형 아이템은 위험하다. 아이템의 성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사용자를 속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아이템이 있다. 그런 건 드물다고 하지만 내가 당하면 백 퍼센트다.
아무리 암담한 상황이더라도 이런 수상한 아이템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은 없…
쿠르릉.
멀리서 짐승이 숨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쿵! 쿵! 쿵!
땅이 흔들린다.
꾸륵… 우르륵. 쿵.
남아 있는 건물들이 무너지고 있다. 온몸의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무언가 나타났다. 무언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무언가 나를 보았다.
거대한 뿔이 먼저 보인다.
뿔은 새빨간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놈이 움직일 때마다 뿔에서 화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불꽃이 서울을 불태우고 있는 불에 합세했다. 불길이 더욱 거세진다.
더불어 주변의 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이 커진다.
저놈이다. 저놈이 서울을 불태운 놈이다. 지네가 아니다.
쿠르르….
우뚝 솟은 머리는 검은 비늘로 덮여 있다. 거리가 제법 먼데도 뚜렷하게 볼 수 있을 만큼 크다. 샛노란 눈이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손에 쥐고 있던 시계가 빠르게 깜빡거린다.
[경고] [경고] [위험 탐지] [생 존 가 능 성 0 %]아이템이 떠들어 대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놈이 나를 발견했다. 점점 다가오고 있다.
쿠르르르….
냉정하게 생각하자.
저걸 이길 방법은 없다.
“…….”
나는 깜빡거리며 빛을 내는 아이템을 보았다. 생존 가능성을 점쳐 줬었지.
크르릉…. 쿵!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진동이 더 심해지고 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저놈한테서 도망칠 수 있어?”
[??? 위험? 죽? ????능]“도망칠 수 있다면 뭐든 좋으니까 실행해.”
[인식?? ? ??? 확인] [비상 프로토콜 가동] [실 행] [자격 확인 절차 가동]아이템을 중심으로 마력 돌풍이 분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마력이 뒤틀린다.
“크허어어엉!!!!”
그리고 놈이 왔다.
[확 인 ??? 이?? 상? 류????]나를 놓칠 수 없다는 듯. 화염과 함께. 지워지지 않는 피 냄새와 함께.
[???이상? 실?? 실패??? 숭고????한 ?????? ? ????? 구원자는???]“또 뭔데!!”
삐, 하는 불길한 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휘몰아치는 마력이 허공에 새빨간 글씨를 써 내려갔다.
[!!! ERROR !!!] [!!! ERROR !!!] [!!! ERROR !!!] [재가동] [재가동] [재가동]시간이 없다.
“크르르….”
놈이 웃고 있다. 발톱 하나가 내 몸보다도 크다. 놈의 전체 크기는 죽어 있던 지네와 비슷하다. 그 지네를 죽이는 데 본부장과 유지은, 다른 헌터들이 죽었다.
다 죽었다.
이제 나밖에 없다.
[재가동]시계가 다시 꺼졌다 켜졌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가능할까? 모든 감각이 곤두선다. 놈이 날 본 이상,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격 확인] [부 적 합] [자격 확인] [부 적 합] [!!! ERROR !!!] [가능한 기능 검색] [강제 시퀀스 가동] [불가] [불가] [불가] [최후 시퀀스 가동] [승인] [절차 시행] [자격 확인] [발견] [확인] [가동] [??? 격?? 가능성이 확인된 자격] [멸 망 이 확 정 된 세 계] [ 최 후 의 생 존 자 ] [확인] [임의의 시간으로 이 동 합 니 다]ERROR 문구로 뒤덮인 시야. 뚝뚝 흘러내리는 불. 뜨거움. 떨리는 진동. 나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괴물.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다.
* * *
찰싹.
“…씨!”
“…저씨! 아저씨! 정신 차려요!”
찰싹. 찰싹.
제일 먼저 돌아온 건 통각이다.
누가 내 뺨을 때리고 있다. 어떤… 어떤 새끼야.
뺨을 찰싹찰싹 치고 있는 손을 떼어 내고 싶은데 내 팔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물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 찰싹거리는 손도 귀찮고 이대로 다시 잠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저씨!!”
“컥!”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모든 감각이 돌아왔다. 눈과 귀가 확 뜨였다.
“아저씨,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얼굴의 여자애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헌터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고 있다. 그것도 바뀌기 전의 교복.
빠르게 가슴에 붙은 명찰을 봤다. 유혜은.
“일단 치료는 해 봤는데요, 그래도 급하게 움직이면 안 돼요.”
“…….”
“저, 지금 상황이 많이 안 좋아서 그런데, 아저씨 헌터죠? 헌터 맞죠?”
“…….”
“칼을 들고 있길래….”
“…….”
“아저씨? 괜찮아요?”
이게… 뭐지.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자애와 같이 오래된 헌터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애들 몇 명이 수군거리고 있다. 반대쪽 벽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뭉쳐서 벌벌 떨고 있다.
어수선한 사무실 안이다. 책상 위에는 넘어진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가 있다. 엄청나게 구식 모델이다. 요즘도 저런 컴퓨터를 쓴다고?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된 회사가 아니다.
눈을 깜빡였다.
서울은 불탔다. 대한민국은 망했다. 아마 전 세계가 망했다.
그런데 창문에서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은 뭐고, 헌터 아카데미의 옛 교복을 입고 있는 애들은 뭔가.
“이상하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는데…. 아저씨, 내 말 들려요?
“…내가 아저씨로 보이니?”
“네?”
도대체… 여긴 어디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