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40)
그림자와 빛(3)
손 안 대고 코 푼다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을 뜻하는 걸까?
박서현은 가장 완벽한 해결책을 들고 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친절한 전개라 세상 모두가 나를 놀리고 있는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도 생각은 했지만 차마 말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나는 박서현을 살폈다.
열여덟 살짜리 여자애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다. 어른 된 도리로 표정 관리를 하고 박서현의 의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네 할아버지 마법을 전부 가르치겠다는 말이니?”
“네.”
박서현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할아버지 마법이 사라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가르쳐 주긴 싫어요.”
“최진우는 괜찮아?”
어차피 하겠다고 하는 거 가만히 놔둬도 되지만…. 나중에 못 하겠다고 나오는 것보단 처음부터 안 하는 게 낫다.
말 몇 마디에 바꿀 마음이라면 거기까지인 거지.
“그렇게 따지면 네가 최진우와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 최진우는 아무나가 아냐?”
“알아요. 하지만 교장 선생님이 데리고 오기도 했고….”
“아까도 말했지만.”
“네, 네. 다른 사람의 판단에 맡기지 말라구요. 이게 제 판단이에요.”
박서현은 내 말을 잘라먹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진우라면 괜찮아요.”
“뭐… 당사자가 괜찮다는 게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
그래도 혹시나 싶어 또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막상 걔가 마법 쓰는 거 보면 달라질지도 몰라.”
이번에는 박서현이 조금 망설였다.
그러나 눈동자가 흔들리던 것도 잠시. 박서현은 여전히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쓰는 걸 봐야지 제가 정말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됐고.”
나는 박서현에 대한 평가를 조금 정정했다. 그렇게까지 멘탈이 바닥은 아니라고.
아직 어려서 회복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겨우 몇 시간 되는 그 짧은 사이에 성장하기라도 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에게 나도 모르던 상담 재능이 있었다거나.
이렇게 살짝 칭찬해 주는 것만으로도 애가 백팔십도 바뀌는데, 아저씨는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냥 아주 놔 버렸나?
어쨌든 박서현은 꽤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선생 된 도리로 나는 학생을 지지해 주기로 했다. 최진우에게는 잘된 일이다.
물론 고유 마법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대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고유 마법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전되었다고 생각한 고유 마법의 부활 아닌가. 좋은 징조가 아니고 뭐겠는가.
* * *
“네? 싫은데요.”
최진우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뭐?”
오히려 당황한 건 최진우를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이다.
“아니, 그렇지만…. 제가 서현이를 무시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요. 제자는 좀 그런데요.”
“뭐가 좀 그렇다는 거니?”
김채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최진우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싫다는 거니?!”
최진우가 학생이 아니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었을 기세다. 실제로 김채민의 손가락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실 내가 이렇게 번듯하게 서 있는 것도 김채민이 너무 흥분하고 있어서다. 옆에 날뛰는 사람이 있으면 되레 냉정을 되찾을 수 있다.
“…….”
김채민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게 심신의 안정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소리만큼은 한결 차분해졌다.
“저기, 진우야. 네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아뇨, 저도 명색이 마법사인데 어떤 건진 대충 알아요.”
정말 알고 있다면 이렇게 딱 잘라 싫다고 말할 수 없다.
“좋은 기회인 것도 알고요.”
그러니까, 단순히 좋은 기회라고 말하고 끝날 수준이 아니라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느낌이 안 오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싫다고 하고?
김채민이 워낙 심상찮은 기운을 내뿜고 있어서인지 최진우는 조금 더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만 역시… 안 할래요.”
시늉만 했다.
대답은 바뀌진 않는다.
“…왜? 이유나 한번 들어 보자.”
“아니, 그야….”
최진우는 부끄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를 스승으로 모시기는 좀.”
“…….”
“…….”
겨우 그딴 이유로?
이걸, 거절한다고? 대마법사의 고유 마법을 아무 대가 없이 알려 준다는데?
배가 불렀네!
지금 누구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아 돌아 버리겠는데, 그런데도 아무것도 못 하고 이딴 학교에 묶여서! 애나 보고 있는데!
미래의 인재를 키우는 일의 중요성은 안다. 하지만, 젠장. 솔직히 다 키우는 데 몇 년 걸릴지도 모르는 병아리 새끼들 돌보는 것보다 내가 여길 뛰쳐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방이동 던전을 바로 공략해 버리거나 서울을 불태웠던 놈이 어느 던전에서 기어 나왔는지 분석하고, 또 방주 놈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추적하거나 어린 내가 어디서 뭘….
서울이 불타기까지는 이십 년이 남았다.
당연히 그 시간을 꽉 채울 생각은 죽어도 없다.
얘넬 키우거나 사람을 모으는 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서 하는 거다. 홍석영을 적으로 두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서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그래, 뭐. 나중을 대비하는 거? 좋지.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만할 때.
그럴 때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게 최고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래서야 아무것도 못 한다. 가만히 기다리다가 홍석영이나 이미선이 던져 주는 정보에 허덕여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짜증 났다.
게다가…. 이 애들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원래는 죽었어야 할 애들이, 혹은 나중에라도 죽게 되는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있는 걸 보니 숨이 턱턱 막혔다. 시체 사이를 걷고 있는 기분이다.
아니.
진정하자. 정신 차리자.
그냥 현실에 집중하자.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해. 그 이상은 생각하지 말고. 뜨거운 열기 속에서 피를 토하던 여자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말자.
‘넌 살아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시야가 맑아지고, 어색한 얼굴로 쭈뼛거리고 있는 최진우가 보였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니?”
내가 저 나이에 어땠더라.
아저씨가 그 시절 얘기를 할 때면 유독 헛웃음을 지었던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지. 난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아마도.
다시 최진우를 보았다.
나처럼 얌전한 애가 있다면 말 안 듣고 고집 센 애가 있을 수도 있지. 그렇고말고.
한참 예민한 나이잖은가. 동갑내기 스승을 모시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마법사가 자존심이 어디 있어?!
고유 마법을 가르쳐 준다는데 납작 엎드려서 감사하다고 빌어야지!
“그게….”
최진우는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저도 안다니까요. 이게 저한테 다시 없을 기회라는 거. 하지만….”
최진우는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이어 말했다.
“저한테 좋은 기회인 만큼 서현이한테는 중요한 마법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런 걸 지금 저한테 아무 대가 없이 가르쳐 준다는 거고.”
차분한 눈빛. 떨리지 않는 목소리.
대개 마법사들은 어린 나이에 각성한다. 빠르면 걸음마를 막 시작할 때 즈음 각성한다.
열여덟 살에 각성한 최진우는 마법사치고는 각성이 어마어마하게 늦다.
“근데 전 제가 그걸 다 배울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최진우는 사고방식이 마법사치고는 순진한 면이 있다.
좋게 말해서 모범생 타입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소시민이다. 마법사가 아니라면 평범하게 잘 살았을 유형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일찍 한정 짓는다. 그게 진짜 한계든 아니든.
단순히 자존심 때문에 박서현의 제안을 거절한 게 아니었다. 최진우에게는 최진우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채민도 그걸 알고 조용히 최진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서현이가 저 가르치다가 저한테 실망하거나 자기가 못 가르쳤다고 자책하는 걸 보기도 싫고, 제가 서현이를 못 따라가서 지치는 것도 싫어요. 그러다가 어색한 사이가 되는 건 더 싫고요.”
종전까지 치솟았던 짜증은 차분하게 이어지는 최진우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가라앉았다. 마법사 같지 않은 사고방식이 이런 식으로 티가 나는구나.
일견 평범해 보이는 사고지만 폐쇄된 사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마법사들에게서는 보기 힘들다. 유지은이 괜히 공략팀 신입 뽑을 때 의사소통 능력을 높이 사는 게 아니다. 마법사 하나 잘못 들였다가 와해되는 길드가 얼마나 많은데.
최진우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상향했다.
홍석영은 정말 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왔을까.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나.
“그래서 싫어요. 대마법사든 고유 마법이든 솔직히 전 크게 욕심도 없고….”
박서현이 들으면 또 앞머리로 커튼을 치겠군.
그러나 다행히 이 자리에는 박서현이 없다.
“그러니 괜찮아요. 전 그냥 평범한 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그 정도가 저한테 딱 맞아요.”
어떻게 할까.
그냥 무턱대고 동급생한테 배우기 싫다, 이런 게 아니라서 무작정 윽박지를 순 없다. 어쨌든 공부든 마법이든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은가.
게다가 난 최진우를 모른다. 명동에서 죽은 아이는 관리청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얘가 본인이 말하는 대로 마법 재능이 고만고만한 수준인지, 아니면 뜻밖의 대마법사 재능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옆에 있는 대마법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네?”
“잠깐….”
최진우를 놔두고 김채민과 둘이서 빠져나왔다.
“최진우, 쟤 어떻습니까?”
김채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재능이 없습니까?”
“아. 음. 글쎄요…. 요 마법 재능이라는 게 너어어무 애매하거든요.”
김채민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마법사가 아닌 사람한테 이걸 설명하기는 힘든데…. 기초 마법과 공용 마법까지는 솔직히 노력만 하면 시간은 걸릴지언정 일정 수준까지는 올라갈 수 있어요.”
또다시 고개가 반대쪽으로 꺾인다.
“하지만 고유 마법은 그런 게 통하지 않아요. 쉽게 말하면 운이고… 운도 실력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요.”
김채민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기초 마법 하나도 못 쓰는 사람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서 고유 마법을 펑펑 날리는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는 거고, 다른 마법은 눈 감고도 쓸 수 있을 실력인데 평생 고유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진우 학생은…?”
“까 봐야 아는 거죠.”
김채민은 까딱거리던 고개를 멈췄다.
“하지만 저렇게 자기 한계를 그어 놓는 건 안 좋아요. 사람의 상상력은 빈약해서 그 이상은 상상하지 못하거든요.”
“대마법사가 될 재능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란 말씀이죠?”
“까 봐야 안다니까요.”
정답지가 없으니 답답한데. 김채민은 교실 안쪽을 흘깃 보았다.
“들어 보니까 진우 마음도 이해는 가요. 친구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마법 수식? 어휴, 완전 부담스럽지.”
“선생님도 할아버지 수식으로 고유 마법 익힌 거 아닙니까?”
“그거랑 이게 같아요? 저는 가족이잖아요. 그리고 전 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 다 각성자가 아니셔서 다른 마법사 가족에 비해서 엄청 자유로웠거든요. 제가 마법사 안 한다고 해도 그러려니 했을걸요?”
그래서 김채민이 이 성격으로 자라서 개죽음당했구나.
“그래도 이렇게 날리기엔 아까운 기회인데.”
“본인 의지가 저러면 억지로 시키는 것도 좀…. 서현이는 꼭 진우여야만 한 대요?”
그 부분에 관해서 박서현은 명확히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채민도 시름에 잠겼다.
“박노경 선생님의 고유 마법은 여러모로 쓰임이 좋아서 이대로 묻히기에는 아깝긴 해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어떻게 하면 최진우를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는 박서현이 보였다. 그 짧은 새에 룬을 연습하고 있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나는 턱을 매만졌다.
최진우를 마법사가 아니라 비각성자라고 생각하자. 딱 그 나이의 고등학생.
굳이 복잡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 저 나이대 아이들에게는 때로는, 정공법이 가장 잘 먹히곤 하니까.
경험담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