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5)
뒤로 넘어져도(1)
만 19세 이하 D등급 이하의 헌터들에게는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헌터 아카데미는 본부장이 심혈을 기울여 세운 헌터 교육 기관이다. 이름이 구리다고 대차게 까이긴 했지만, 취지 자체는 좋았고, 초반에 삐걱거리던 걸 제외하면 최근까지도 괜찮게 굴러갔다.
헌터 아카데미의 설립 취지는 간단하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미성년자 헌터들이 던전에서 떼죽음당하는 걸 방지한다.
몇몇 길드에서 막 각성한 어린 헌터들을 노예 계약으로 붙들어 놓고 고기 방패로 써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 본부장이 뜻이 같은 헌터들을 몇 명 모아 만들었다. 갓 각성한 애들을 모아서 교육하자고.
“저 아저씨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바로 그 교육 기관의 교복을 입고 있는 애들이 나를 두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다 들린다.
옛날 교복은 또 어디서 구한 거래?
“머리 다친 거 아니고?”
“내 능력으로는 외상은 고칠 수 있지만 내상이 있었으면 어쩔 수 없어…. 뇌진탕이면 어쩌지?”
“아냐, 우리 선생님 생각해 봐. 원래 헌터들은 머리가 좀 이상해.”
“우리도 헌터라는 거 잊지 말자?”
황망한 얼굴로 애들을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둔해진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저릿한 손을 꿈틀거리다가 뒤늦게 본부장의 인식표를 아직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서히 머리도 굴러가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 머리가 어쨌든 간에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어.”
“그럼 어쩔 거야? 전화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잖아.”
유지은의 검은 여전히 내 손에 있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풍경이 내 상상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제대로 돌아가기는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오래된 컴퓨터가 아니면 특색 있는 건 없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사무실이다.
사무실.
사무실….
벽에 있는 달력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2021년.
“2021년?!”
“뭐야?”
“아저씨! 이제 정신 좀 차렸어요?”
나는 달력을 다시 봤다.
2021년 4월.
눈을 비볐다.
달력은 그대로 2021년 4월이다.
왜… 왜 저 날짜야?
이 사무실 주인이 이십 년 전 달력을 벽에 걸어 둘 만큼 취미 고약한 인간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저기요! 아저씨!”
“현욱아!”
“야, 놔 봐.”
남자애 하나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가슴에 명찰이 붙어 있다.
오현욱.
이상하다. 왜 아는 이름이지?
“아저씨. 지금 아저씨 정신 차리는 걸 기다려 줄 시간이 없거든요.”
“쿠어어엉!!”
바깥에서 몬스터 소리가 들렸다. 남자애는 얼굴을 찌푸렸다.
“…들리죠?”
나는 달력을 봤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저씨?”
좋지 않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향했다.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지만 혹시 모르니 몸을 낮췄다.
블라인드 사이로 부서진 거리가 보인다.
폐허가 아니다. 엉망이긴 했지만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
도로에 남아 있는 자동차는 쓰레기처럼 찌그러진 채 굴러다니고 있다. 1층에 있는 상가들의 유리창은 모조리 박살 나 있고, 검은 물소 한 마리가 킁킁거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커 보이는 뿔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물소가 엉망으로 만들고 나온 음식점 간판을 확인했다. 들어 본 적 없는 상호였지만 간판 구석에 적혀 있는 글씨를 알아보는 데 문제없었다.
명동점.
2021년 4월. 명동. 검은 물소.
사무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민간인들.
헌터 아카데미의 옛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
…저 교복이 옛날 교복이 아니라면? 지금 현재의 교복이라면?
“저기요!”
“조용히.”
그러니까….
“거기. 남학생.”
나는 불만 어린 얼굴로 서 있는 남자애를 불렀다.
오현욱. 씨발.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 이제 보니 얼굴도 아는 얼굴이다. 내가 알던 얼굴보다 이십 년 정도 젊어 보여서 바로 못 알아봤을 뿐.
“…왜요?”
“오늘이 며칠이지?”
오현욱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저씨, 혹시 속이 메스껍다거나 하지 않아요? 어지럽진 않고?”
“뇌진탕 아니니까, 오늘 며칠이야.”
“…4월 5일이요.”
2021년 4월 5일.
“하, 씨발.”
결국 욕을 내뱉었다.
기억을 되짚었다.
정신을 잃기 전 있었던 일. 고속도로에 넘쳐흐르던 몬스터들과 죽은 사람들. 유지은. 본부장.
지네가 사라지고 나타났던 수상한 아이템.
아이템에 적혀 있던, 날짜처럼 보였던 그 숫자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이 모든 게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이다.
시간 여행.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시간 여행을 시켜 준다는 아이템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냥 죽기 전 보는 환영이라고 하는 게 더 신빙성 있다.
이게 정말로 시간 여행이라면 더 좋은 날짜도 있지 않은가.
…연구소라면 모를까 왜 이날, 명동일까.
차라리 내가 휴가를 가기 직전이라든지. 그러면 유지은의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고 빌어먹을 방이동 던전을 공략했었을 텐데.
하필, 왜 하필 이날이냐고!
2021년 4월 5일.
내가 정말 이십 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라면.
오늘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다섯 명을 빼고 모두 죽는다.
* * *
20년 전, 명동에 있는 던전이 터졌다.
그 당시에는 아직 마력 측정기가 개발되기 직전이라 던전은 수동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물론 명동 던전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만큼 그 시절 나름으로는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하지만 던전이라는 게 그렇듯, 어제는 얌전해 보였더라도 오늘은 터질 수도 있었다.
명동 던전이 그랬다.
나중에 밝혀지는 일이지만, 사실 담당 공무원이 제대로 일을 안 한 탓도 있었다. 잘못은 그 공무원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탓에 경보가 늦어졌다. 1차 피해가 나온 뒤에야 던전 브레이크 소식이 알려졌다.
명동 던전을 담당하는 길드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출동했지만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홀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원을 기다리는 동안 몬스터들은 명동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마침 해당 길드에 현장 실습을 나와 있던 헌터 양성 시범 고등학교의 학생 다섯 명이 길드 사무실에 고립되었다. 같은 건물에 있는 민간인들과, 헌터가 아닌 길드 사무직들과 함께.
민간인들의 수는 마흔하나. 몬스터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까지 더한 숫자였다.
여기에 학생들을 합치면 마흔여섯.
외부의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몬스터들이 건물 안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건물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이 던전 브레이크 대응 방법을 알 리가 없다.
생존자는 다섯 명. 헌터 양성 시범 고등학교의 학생 두 명과 민간인 세 명.
이 일은 막 발족한 헌터 양성 학교의 발목을 잡았다. 본부장이 그 뒤로도 몇 년 더 고생하는 걸 옆에서 봐서 안다.
나중에 학교명을 헌터 양성 고등학교가 아니라 헌터 아카데미로 바꾼 이유도 이 일 때문이었다. 솔직히 바뀐 이름이 더 구리다고 생각하지만 죽은 학생들이 자꾸 생각난다나 뭐라나.
어쨌든 명동 던전 브레이크는 각성자 의무 안전 교육 시간마다 단골로 끌려 나오는 사건이다. 던전 관리를 좆같이 하면 어떻게 되는지, 던전 브레이크 시 초기 진압이 얼마나 중요한지… 등등.
당연히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강사 입장이었으니까 더 잘 알아야만 했다.
대학교 때는 이걸로 논문도 썼다. 미숙한 미성년자 헌터들이 어떻게 했어야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참고로 그 논문은 당시 기술과 학생들의 무장 수준을 고려하면 전원 생존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끝난다.
…바꿔 말하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미래 지식과 괜찮은 무장이 있다면 마흔여섯 명 전원이 살아남을 방법이 있다는 거다.
뭐? 시간 여행이면 타임 패러독스 같은 건 신경 안 쓰냐고?
내가 여기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신경 써서 뭐 해.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고, 그 정체 모를 몬스터와 헌터들의 시체, 활활 타오르던 서울을 생각하면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유지은의 검이 있다. 나 혼자라면 이 수렁을 벗어날 자신이 있다.
하지만….
“던전이 폭주한 지 얼마나 지났지?”
다 죽는 걸 아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 활자로 보는 것과 눈앞의 실재를 보는 건 다르다.
내가 그 정도로 매정한 놈은 아니다.
마흔여섯… 아니, 마흔하나의 목숨이다.
“아저… 네?”
“너희 헌터 아카, 시범고 학생들 아냐? 던전 브레이크에 대해서 배운 거 없어?”
“어어….”
2041년의 헌터 아카데미 교육 과정이라면 달달 외우지만 이 시기는 모르겠다.
그래도 생존자 오현욱과 박서현은 세기의 천재로 이름 날리는 헌터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일 인분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싶은데.
“…오늘, 배우기로 되어 있었는데.”
“…….”
“그게, 저희가 원래 길드에 현장 실습하러 온 거거든요. 던전 관리법이나 공략 절차 같은 걸 배우려고….”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아직 애들이잖은가. 내가 아는 오현욱은 술배가 나온 털북숭이 아저씨고, 박서현은 소름 끼치게 히죽거리는 음울한 아줌마지만.
지금은 애들에 불과하다. D급 정도는 됐으려나? 보통 D급 헌터라고 하면 막 헌터가 되었다고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 놈들이 많다. 의무 교육 때 얼마나 짜증 나게 굴어 댔는지…. 그런 헌터들에 비하면 얘들은 적어도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배워. 던전이 언제 폭주했는지 알아?”
“어, 얼마나 됐지, 얘들아?”
“아마 네 시간 정도….”
“아마라는 말은 필요 없어. 던전 공략에는 구체적인 숫자가 최우선이야.”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들이 불편한 얼굴로 몸을 뒤척였다. 그래도 한 명이 똑바로 대답했다.
“세 시간 오십 분 됐어요.”
유혜은. 아까 내 뺨을 열심히 때렸던 여자애다.
“외부와의 연락은?”
“안 돼요. 가끔 신호가 가긴 하는데 연결은 안 돼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정보는 뭐였어? 언제 들었는지 시간까지 말해.”
“…어, 두 시간 전에, 헌터들이 던전 보스 공략을 하러 모인다고 했어요.”
나는 본부장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안다. 보스 공략팀에는 본부장도 있었다. 자기 제자들이 죽는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보스나 잡고 있었다며 자책했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겠네.
“잠깐만요, 아저씨.”
가만히 있던 오현욱이 뭐 씹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누군데요?”
“현욱아!”
“야, 가만히 있어 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아저씨 헌터 자격증 있어요? 자격증 있으면 좀 보여 줘요.”
하.
돼지 오현욱이 이렇게 빠릿빠릿할 때도 있었다니. 세월이란….
하지만 예리한 질문이었다. 고마운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데.”
지갑에 고이 모셔져 있지만 2029년 날짜가 적혀 있는 라이센스를 어떻게 보여 줘.
“뭐라고요?”
“잃어버렸어.”
“…잃어버렸다고요?”
“지갑에 있는데 지갑이 없어졌더라고. 아까 기절했을 때 어디 떨어뜨렸나 봐.”
잃어버렸다는데 어쩔 거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