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54)
반가운 얼굴(2)
나는 12호다.
그 말은 1호부터 11호까지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내 뒤에도 번호가 더 있었다. 아저씨가 연구소를 박살 낼 때는 33번까지 있었다.
중간에 3호처럼 졸업하거나 간혹 폐기되는 번호도 있었으니 보통 열댓 명 정도 되는 애들이 연구소에 있었다.
대부분 열세 살 전후로 졸업과 폐기 처분이 결정된다. 딱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다. 3호는 그 나이를 지나고도 꽤 오랫동안 연구소에 남아 있었다. 아마 연구원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기 때문이리라.
그게 아니면 내가 최연장자가 되니까.
날 싫어하는 연구소장의 입장에서는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겠지.
연구소의 아이들은 대부분 열 살 미만이다. 걔네도 꼴에 인간이랍시고 그 안에서도 파벌이 생긴다. 중학생 정도만 되었어도 무리를 나누는 기준은 더 세분화되었을 것이다. 대장을 정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열 살 미만의 애들이 뭘 알겠는가? 아이들 입장에서 대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단 하나였다.
바로.
나이.
나이가 많으면 다 끝난 거다. 신입이 왔다. 아이들은 이름보다도 먼저 나이를 물어봤다.
‘너 몇 살이야?’
같은 나이였다면 덩치가 큰 아이가 대장이 되었겠지만…. 막 납치된 아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닌가.
어쨌든 3호는 연구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였다. 열다섯인가까지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열 살 남짓한 아이들 사이에서 그 정도면 어른이지, 어른.
3호가 연장자의 입장에서 소장의 지시를 받고 아이들을 관리하는 동안, 나는 연구소에 가장 오래 있었던 고참 입장에서 아이들을 충동질했다.
3호가 사라진 후에는 더 쉬웠다.
3호를 방패막이 삼아 어디까지 해야 연구원들에게 혼나지 않는지의 경계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소장한테는 안된 일이었지. 그나마 나를 제어하던 3호가 사라졌으니 거리낄 게 없었거든.
3호는 열여섯 살이 되기 직전 사라졌다. 말 잘 듣는 3호를 폐기했을 리는 없고, 어디서 청소부로 써먹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래도 나름 정은 들어서 이제 볼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했던 기억은 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지만.
* * *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물론 성격도 다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 보니까 이게 정답이다, 하는 건 없어요. 그 점을 항상 유의하시고요. 아이들을 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요?”
“사랑과 인내!”
“바로 그겁니다!”
“…….”
정말 놀라운 일이었지만 전국새마음정신협회에서 준비한 강의는…
의외로 들을 만했다.
정말로.
왜? 왤까?
방주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그냥 해 준다고?
처음부터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으면 사람들이 꺼릴 테니…. 사람을 낚아 올리기 위해서는 역시 이런 단체 강의보다는 좀 더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 더 효과적이다.
“그럼 그룹을 나눠서 이야기해 볼까요?”
바로 지금처럼.
강의를 듣던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었다. 나는 아닌 척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 주위에 온 사람들을 보았다. 이 네 사람도 방주의 작업팀일 수도 있다. 원래 사이비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꼬여 낸다고.
순진한 척. 무해한 척. 정말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인 척.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저번에는 안 나오셨더라고요?”
“네. 학교 일이 바빠서 짬이 안 나더라고요.”
“아아, 그렇죠. 4월이나 5월은 행사가 너무 많다니까요.”
“그래도 애들이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귀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그래요….”
얌전히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뭘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어설프게 말을 붙여 봤자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떡하나.
이런 건 나 같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전문가한테 맡겨야 한다니까. 홍석영은 도대체 뭘 보고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어머, 선생님 혹시 여기 처음 온 거예요?”
한창 즐겁게 떠들고 있던 선생 한 명이 드디어 나를 발견한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대충 주워듣기로는 초등학교 교사라고 했었다.
“…네, 뭐.”
“저희끼리 떠들어서 어떡해. 말 좀 하지 그랬어요.”
“뭐… 얘기만 들어도 많이 도움이 돼서요.”
“선생님네 아이들도… 하긴, 여기 오시는 분들 제자가 다 힘든 경험을 했죠.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친척 중에라도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 사망한 사람이 없는 애를 못 봤다니까요.”
“아무래도 던전 브레이크가 자주 일어나다 보니….”
“그러니까요! 어휴, 나라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피해도 만만찮은데….”
“워낙 수가 많으니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는 해도….”
교사들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 봤자 해결할 길도 없는 거, 애들 이야기나 해요. 여기 선생님은 어느 학교 선생님이에요? 중학교?”
“고등학교입니다.”
다행히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교사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이야기에 끼어들 수 있었다.
내가 대화를 주도하지 않아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 주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정보를 빼낼 수 있나? 내가 무슨 정보를 빼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음.
아니지. 우리 3호가 있지 않은가.
“저 잠깐 화장실 갔다 오겠습니다.”
자기들끼리 대화에 빠져 있던 교사 무리들은 나를 크게 돌아보지 않았다. 뭐, 화장실 가겠다는데 붙잡길 하겠어, 어쩔 거야.
전국새마음정신협회에서 대관한 다른 층의 홀들도 강의를 진행 중인지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3호처럼 명찰을 목에 걸고 있는 학생들이 몇 명 보였다. 하지만 방주 출신인 게 분명한 3호를 두고… 굳이?
게다가 방주에서 나를 먹잇감으로 찍었다면 접근해 올 것이다.
휴대폰을 보는 척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저, 선생님?”
역시.
사이비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도와드릴 거라도 있나요?”
3호가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말을 걸어왔다.
“…음.”
“혹시 강의가 마음에 안 드셨다거나?”
“아니. 그건 아닌데.”
당연하지만 3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도 연구소에서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못 알아보다니. 조금 서운해진다.
하긴, 알아보면 그거야말로 문제지. 연구소에서 코나 찔찔 흘리고 있던 꼬맹이의 어른 버전이 미래에서 찾아왔다? 그걸 방주에서 알아차렸다면 그냥 방주를 찾아가서 살려 달라고 비는 쪽이 낫다.
“…학생은 봉사활동이라도 하는 건가?”
“네? 아, 네. 봉사 시간 채우려고요.”
꽤 현실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3호는 멋쩍은 듯 웃다가 대답했다.
“아니,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데요.”
“그럼?”
“어… 그게. 제가.”
어리숙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나도 추억에 잠기느라 깜빡했는데, 난 3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3호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기 쉽다.
3호는 사사건건 연구원들의 말에 트집 잡고 반항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자존심도 없이 연구원들에게 설설 기며 애들을 단속하는 3호가 싫었다.
3호가 연구소에서 사라지기 직전, 날 붙잡고 뭐라고 했더라.
‘너같이 주어진 기회에 감사할 줄 모르는 애가 어째서…. 야. 내가 열 살짜리 애한테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긴데, 진짜 그렇게 살지 마라.’
열다섯 살짜리가 뭐라는 건지, 참.
난 뭐라고 대답했더라. 나도 뭐라고 대답하긴 했었는데.
“저도, 그,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고립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선생님들이 오시지만 애들이 올 때도 있거든요. 막, 체험 활동이나 그런 거 하러요. 걔들 도와주는 게 좋아서….”
아. 그런 설정이라고.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3호를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쟤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다가 연구소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나야 아저씨의 도움으로 탈출해서 번듯한 직장까지 얻었지만 얜… 여기서 이렇게 사이비 전도를 돕다가 사이비 전도사나 되었겠지.
내가 열 살이었을 때는 쟬 골탕 먹이려고 그렇게 기를 썼더랬다. 쟤도 날 싫어해서 내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소장한테 일러바쳤다.
하지만 이쪽은 이제 어른이다. 사이비에 세뇌당한 어린 애를 옛 기억에 기대어 싫어할 순 없다.
당장 얘를 빼내는 건 무리다. 3호도 싫어할 테고. 하지만 내년쯤, 혹은 시간이 더 걸리게 되더라도 홍석영이 방주를 무너뜨리면. 그때 잘 지낼 수 있도록 살펴봐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래? 대견한데.”
“아뇨,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구요….”
“나도 너처럼 고립된 경험이 있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거든.”
“저처럼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더라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미안하다. 볼일 있으면 가서 해도 돼.”
“아뇨, 저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좋아해요.”
3호는 서글서글 웃었다.
“가끔 저한테 물으러 오시는 선생님도 있거든요.”
“그래?”
“저도 제 상담 선생님께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해 보는 걸 추천받았거든요. 처음에는 떠올리는 것도 싫었는데,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좋더라고요. 제 경험으로 다른 애들을 도울 수 있는 거잖아요.”
내가 평범한 교사였다면 정말 대견하게 여겼을 텐데.
생글거리던 얼굴이 천천히 굳어진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입술이 불안한 듯 꿈틀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얜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배우라도 돼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르다. 아무리 그래도 내 눈은 못 숙인다. 일단 눈이 웃고 있지 않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몸짓도 그렇다. 얌전하고, 불우한 과거를 떠올리며 힘들어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상대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분산시키는 행동이 많다.
사이비가 다 그렇지, 뭐.
“좋네. 우리 애들도 너처럼 강해지면 좋겠다.”
“하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오래 걸렸어요.”
“그래. 아까 강사님도 그 얘기 하더라.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씩 나아가라고.”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다시 들어가 봐야겠다. 힘든 일이었을 텐데 얘기해 줘서 고맙다.”
“저도 얘기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거기까지 고맙다고 하는 거야.”
나는 잠깐 망설이는 시늉을 하다가 품 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아저씨 밑에서 일하다 보면 필기구가 없으면 정서 불안에 빠진다. 그리고 아날로그가 좋을 때가 종종 생기거든.
나는 수첩에 내 폰 번호를 휘갈겼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연락해.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헌터니까….”
“와, 헌터셨어요?”
3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까지 떠먹여 주는데 삼키지도 못하고 뱉는 건 아니겠지.
글쎄, 적당히 기회가 오거든 3호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전화하지 않을까? 선생님, 도와주세요 하면서?
* * *
“3호?”
내 보고를 듣던 홍석영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어디서 심기가 불편한지 바로 알 수 있어서 나는 홍석영의 기분을 더욱 나쁘게 해 주었다.
“이름 없이 번호를 붙이거든요. 지금이면 아마… 20번대까지는 확실히 있을 텐데.”
“자네 동생은?”
“걘 12호라고 불렸죠.”
홍석영은 길게 침음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는 하는데 차마 발산할 수는 없었는지 꾹꾹 담아 누르는 게 보였다.
“어쨌든 수고했네. 3호… 강태우라고?”
“보육원을 조사해 보세요.”
“보육원?”
“전국새마음정신협회에서 보육원이나 뭐… 아동 후원 사업을 한다고 했거든요. 거기서 봉사 활동도 하니까 관심 있는 사람은 많이 참여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자네도 가 보게?”
“그건 좀.”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다.
“지난번 그 수련원에서도 아이들을 급하게 빼낸 흔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보육원에 분산시켜 놨다면 시선을 피하기 좋겠죠.”
“음….”
홍석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어. 이 헌터가 그 협회와 관련된 걸 조사하고 있거든. 송파구 던전도 그렇고 처리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속도가 좀 더뎠는데…. 보육원만 우선적으로 찾아보라고 해야겠군.”
그다음 홍석영은 덧붙였다.
“아차, 그리고 내가 조만간 던전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
“던전이요?”
“강원도에 급한 게 하나 있어서…. 그동안 애들 좀 부탁하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