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6)
뒤로 넘어져도(2)
“잃어버렸다고요?”
“그래.”
사람은 찔리는 게 많을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한다.
상대가 노련한 이라면 통하지 않겠지만 눈앞에 있는 애들은 연령 18세의 고등학생들.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잃어… 그, 그럼, 어….”
봐라. 나름 날카로운 척하던 것도 잠시, 금방 당황하며 말을 못 잇지 않는가.
하지만 오현욱의 질문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난 지금 제대로 된 신원이 없다.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간다고 해도 그 뒤가 문제다. 무려 과거까지 와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십 년 뒤에 대한민국이 망하는 걸 뻔히 아는데.
최소한 그 던전이라도 확인해 봐야 한다. 유지은이 공략해야 한다고 했던 방이동의 그 던전.
던전에 들어가려면 확실한 신원이 필요하다.
…2021년에 내가 몇 살이었더라? 열 살?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열 살의 내가 존재하고 있을까?
과거의 나나, 신원 증명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게 도움 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나는 오현욱을 보았다. 미래의 S급 헌터.
그 뒤를 보았다. 헌터 시범고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 여자애가 둘, 남자애가 둘.
그중 미래에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명해지는 아이가.
…음.
역시 생명의 은인 정도가 딱 적당하지.
“헌터인 걸 증명해 주면 되는 거지?”
검으로 바닥을 슬쩍 긁었다. 파란 불꽃이 선을 따라 작게 피어올랐다가 꺼졌다. 마력이 가득한 불꽃.
“이 정도면 충분해?”
“…알았어요. 아저씨가 헌터란 거죠.”
오현욱은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진 못했지만 어쨌든 납득은 했다.
이게 각성자라는 증거는 되어도 착한 헌터라는 증거는 아니지만 거기까진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다른 시범고 아이들도 슬그머니 긴장을 풀었다. 현역 헌터가 있으니 한숨 돌린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반면 민간인들은 좀 더 노골적으로 반응했다.
“허, 헌터면 우리 나갈 수 있는 거예요?”
“몰라요. 하지만 애들만 있는 거보단 훨씬 낫겠죠.”
가능성을 점쳐 볼까.
활자로는 지겨울 정도로 보았던 일이다. 해외에서도 논문을 많이 냈고, 각종 헌터 사이트에서 심심하면 올라오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각자 저마다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대체로 결론은 나와 같다. 당시로서는 전원이 무사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총 몇 명이지?”
“…마흔하나요.”
“너희까지 다 해서?”
“그럼 마흔여섯, 아니, 아저씨까지 마흔일곱이요.”
알고 있는 숫자와 같다.
당장 떠오르는 탈출 방법만 해도 대여섯 가지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거 빼고, 준비물이 너무 많은 것을 빼도 그 정도다.
그냥 적당한 거 하나 골라서 하면 되기는 한데….
나는 다시 아이들을 보았다. 오현욱과 박서현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 유혜은, 최진우, 이승연.
이 중 내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놈은 하나.
이승연.
허여멀건 얼굴에 옆에 서 있는 박서현보다도 작은 키. 솔직히 검이라도 제대로 들 수 있나 싶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천재로 이름 날리던 오현욱이나 박서현보다도 어떤 의미로는 얘가 더 유명했다.
뭐, 얘가 걸음마를 막 시작했을 무렵부터 두각을 보였던 천재였거나 한 건 아니다. 얘는 그냥 태어나는 데 재능을 다 썼다. 집안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SSS급 헌터라 할 수 있다.
무려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 다연의 금지옥엽 막둥이.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쟤네 집안은 쟤를 끼고돌았다. 얼마나 아꼈냐면, 애가 죽고 난 뒤에도 아저씨를 물심양면 지원해서 시범고가 유지되게 했다. 이능관리청 설립에도 한 입김 했고, 아저씨가 본부장이 되는 것까지 후원해 주었다.
애가 죽었는데도 말이다.
그럼 애가 살아 있으면 어떨까?
죽을 뻔한 애를 살려 준다면? 내가 아는 다연은 가족과 관련된 일에 모른 척 입을 닦을 만큼 안면 몰수하진 않았다.
운이 좋으면 그쪽에서 신원을 보증해 줄지도 모른다.
물론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얘기지만.
“이동하는 데 불편한 사람 있어?”
“불편한 사람이요?”
“부상자나 어린아이.”
내 기억엔 없었지만 확인은 해야지.
“아, 아뇨…. 없어요.”
좋다. 아주 좋다.
신원이 없다고?
그렇다면 다소 의심스럽더라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영웅이 되는 거다. 한국 사람들은 그런 거에 약하거든. 최소한 이승연이 내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고마워서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딱 적당한 방법이 하나 있다.
모두가 살아남지만 누군가의 영웅적인 희생이 필요한 방법.
* * *
“시청으로 간다.”
“…시청이요?”
아이들은 미심쩍어했다.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청이라고?”
원래 헌터들의 작전 회의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면 안 된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만….
“거 제정신이야? 헌터 양반, 여기서 시청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아!”
꼭 저렇게 주제도 모르고 끼어드는 사람이 발생한다니까.
나는 웬 아저씨를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 비상 지휘 통제권… 통제권이 필요하다. 던전 브레이크 발생 시 헌터들의 지휘가 우선시되는 법령이다. 이게 언제 만들어졌더라? 이것도 여기서 사십 명이 죽은 다음에 만들어졌던가?
그랬던 것 같다. 어린 학생들이라고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했던가.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었지.
“이봐요.”
나는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그동안 머리를 깬, 아니, 친절하게 타일렀던 머리 빈 헌터들이 몇이던가.
목소리만 큰 민간인 정도야.
“죽고 싶습니까?”
“뭐, 뭐야?! 지금 헌터가 사람 협박하는 거야?”
“입 닥쳐요.”
통제권이 없다는 말은 헌터에게도 민간인 구출 의무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내가 이 아저씨를 챙기지 않는다고 해도…. 아니, 내가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나 하나 몸 빼는 건 일도 아닙니다. 저 애들을 그냥 두고 가기도 뭣 하니까 도와주려는 거지. 거기, 학생들.”
“네, 네?”
“너희만 갈래? 난 상관없어.”
관리청 헌터들에게 하는 것처럼 퉁명스럽게 말하다가 정신 차렸다. 헌터라고 말하기도 힘든 애들을 상대로 화풀이하면 안 되지.
아이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유혜은이 대표로 말했다.
“아, 아뇨…. 사람들을 두고 그냥 갈 수는….”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습니까? 저 학생들 때문에 아저씨 같은 사람도 살 수 있게 지금 머리 굴리고 있는 겁니다. 싫으면 남아 있으세요. 같이 안 가도 됩니다. 안 말려요.”
“아니….”
그건 또 싫었는지 우물쭈물거린다.
아직 고민되는 모양이니 도와주기로 했다. 그래도 문명인인데 최대한 말로 끝내야지.
“참고로 저 몬스터 말입니다. 생긴 게 소처럼 생겼다고 해서 풀을 뜯고 살지는 않거든요. 몬스터잖아요.”
“그, 그게 무슨?”
“육식이라고요.”
“…그런데?”
말귀가 어둡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었는데.
“여기서 저놈들이 먹을 만한 고기가 뭐겠습니까?”
나는 새하얗게 질린 사람들을 보며 친절하게 웃었다.
“놈들한테 걸리면 시체가 멀쩡할 거란 생각은 버리세요.”
“…….”
마침내 아저씨도 알아들었다. 나는 아저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이제 조용히 합시다?”
“크흠.”
“그리고 명동 처음 와요? 여기서 시청까지 금방 갑니다.”
“그, 그건… 저 몬스터들이 없을 때의 얘기지!”
이건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길드 사무실이죠? 여기서 일하시던 분?”
“저, 저희예요.”
길드 사무실이니까 지도가 어디 있을 거다.
작전 회의에 민간인을 배제할 수 없다면 그냥 다 듣게 해야겠다.
“명동 지도 인쇄해 놓은 거 있습니까? 큰 거요.”
“회의실에 있어요! 가져올까요?”
“네. 저쪽 벽에 붙여 주세요.”
길드 사무직이라 그런지 행동이 빠르다.
지도 앞에 서서 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지하철역 사이. 회현역과 명동역의 중간. 사거리.
나는 도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내려왔다.
“여기가 던전 위치고요.”
“이렇게 가깝다고요?”
도보로 10분밖에 안 된다.
정말 서울 한복판에 있는 던전이다. 그래서 더 관리를 철저히 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남산을 가리켰다.
“두 시간 전에 보스 공략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던전 보스를 남산으로 몰았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이들 중 하나가 물었다.
아직 관련 법령도 미비하고 대응도 미진하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몇몇 부분이 있다.
명동같이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피해가 어마어마하다. 여기처럼 건물 안으로 피신한 사람들도 많을 거다. 전투 중에 그런 건물 하나 무너졌다고 생각해 봐라.
“명동 던전의 보스는 미노타우로스야. 20m의 소대가리. 그걸 도시 한복판에서 잡는다고? 어떻게 될 것 같아?”
“…피해가.”
다행히 명동 던전 바로 뒤에는 남산이 있다.
“그래. 게다가 육식이라고는 해도 습성 자체는 소와 비슷해. 떼를 지어 이동하지. 지금쯤은 대부분 보스를 따라 남산으로 갔을 테고, 무리에서 떨어진 놈들만 도로에 남아 있어.”
“그래서 시청으로 간다는 거예요?”
나는 땅에 덜어진 볼펜을 주워 지도에 원을 그렸다. 우리가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숭례문과 시청역, 을지로입구역, 명동역이 원의 둘레가 된다.
“이게 뭔지 아는 사람?”
“…….”
“몰라?”
유혜은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지선… 이요.”
“그래.”
던전 브레이크 시 몬스터들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구축하는 방어선이다.
“시청역이 본부야. 근처까지만 가면 확실히 살 수 있다.”
“…몬스터들이 남산으로 갔다면 우, 우린 가만히 있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보스가 잡히면… 던전 브레이크도 끝나고….”
민간인 중 하나가 질문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노타우로스는 말입니다, 독재자예요.”
“네?”
“자기 말을 듣지 않는 부하는 필요 없어요. 그래서 몬스터들은 미노타우로스가 집합하라면 집합하고, 사냥하라면 사냥해요. 먹는 것도 마찬가지죠.”
지금은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몬스터들이 남산으로 향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보스가 공략됐다고 생각해 봐요. 미노타우로스가 죽었다는 말이고, 그건 몬스터들을 제어하고 있는 대장이 사라졌다는 뜻이죠. 대장이 없으면 몬스터들이 뭘 할 것 같습니까? 힌트를 줄까요? 놈들은 육식이고, 굶주렸어요. 그동안 대장이 먹이를 독점했거든요.”
미노타우로스를 잡던 헌터들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놈들은 냄새를 잘 맡습니다. 지금은 대장 눈치를 보느라 먹지는 못하고 주위를 어슬렁거릴 뿐이지만….”
나는 턱 끝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아까 대답했던 게… 유혜은? 도로에 몬스터가 몇 마리 있는지 보고 와.”
유혜은은 멈칫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몇 마리야?”
“모, 모르겠어요. 스무 마리 정도? 전부 여길 보고 있어요….”
“앞으로 더 늘어날 거야.”
무리에서 떨어진 놈들. 혹은 대장의 말을 무시할 정도로 굶주린 놈들.
미노타우로스가 잡히는 즉시, 놈들은 사람들을 향해 돌진한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 그럼 헌터들한테 보스를 잡지 말라고….”
“헌터들보고 죽으라고요?”
지금 명동 던전은 B급 던전 판정을 받았지만 브레이크의 규모와 미노타우로스를 보스로 두고 있었다는 사실 덕분에 몇 년 뒤 등급이 재조정된다.
S급으로.
이게 다 주먹구구식 행정의 문제점이다. 던전 등급을 길드가 자율적으로 상정하도록 하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서울 한복판에 있는 알짜배기 던전을 놓칠 수 없어서 등급을 B급으로 속인 거다.
“미노타우로스 같은 놈을 봐주면서 잡을 수 있는 헌터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놈이 지금 여길 없는 걸 감사히 여기세요. 목숨 걸고 놈을 잡고 있는 헌터 덕분이니까요.”
나는 작게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그러니까 미노타우로스가 잡히기 전에 빨리 움직입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