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73)
강낭콩 초상(肖像)(4)
무언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강낭콩 씨앗을 심을 때도 말이다. 씨앗을 심었다고 싹이 바로 나는 줄 아나? 아니다. 10분, 20분. 하루. 이틀. 일주일. 그만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싹을 볼 수 있게 된다.
나도 어릴 때 강낭콩을 심어 본 적이 있어서 안다.
강낭콩을 심은 열 살짜리 애가 뭘 할 것 같은가? 당연히 매일 아침 싹이 텄는지 확인하지.
초록색이 보일 기미라곤 없는 화분을 보며 실망을 거듭한다. 열 살짜리 아이에겐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고 나면 드디어 싹을 볼 수 있다. 싹이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이 피기까지 기다림은 계속된다.
강낭콩 꼬투리가 자랄 때쯤엔 알게 된다.
뭔가를 키우는 일은 고된 일이라는 사실을.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강낭콩만 해도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데, 다른 건 어떨까. 물고기? 강아지?
하물며 사람이라면?
가끔 아저씨가 어떤 마음으로 날 키웠는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난 키우기 쉬운 아이가 아니었다. 선물 받은 화분 하나 제대로 못 돌보는 남자에게는 난이도가 높았을 거다.
그런 사람 밑에서 이십 년 동안 용케 죽지 않고 잘 살아남았다니. 장하다, 나.
어쨌든 햇빛 잘 보게 하고, 물과 통풍에만 챙겨 주면 되는 식물과는 달리 사람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배는 는다. 당연히 필요한 인내심도 더 크다.
그러니까 나도 인내심을 가지고 키워야 한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고, 지금 멍청하다고 해서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충분한 애정, 시간과 노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한 사람 몫을 할 줄 아는 인간이 될 거나.
참고 버텨 내자.
“제가 대장이니까요.”
이상하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들이 퇴화했지?
공략 가이드를 확인하고 칭찬 스티커 하나씩 줬을 때만 해도 좋았잖아. 솔직히 받으면 안 되는 애도 있었는데 응원의 의미로 줬다고.
그런 나의 배려를 신경 쓰는 시늉이라도 해 주면 안 되는 거냐. 이딴 헛소리나 하지 말고.
천천히 교실을 훑었다. 조용하다.
그러니까… 얘네는.
“대장으로서의 판단이 그렇단 말이지. 다른 사람들 생각은?”
목소리에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래. 얘넨… 아메바 같은 거다. 숨 잘 쉬고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도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교실 뒤쪽에 있는 강태우가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목소리에서 티 났나? 쟬 겁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다들 오현욱의 판단에 동의하나?”
나는 아이들이 작성했던 공략 가이드를 보았다. 중간중간 이걸 공략이라고 해 놨나 싶은 소리가 적혀 있긴 하지만 저렇게 얼빠진 소리는 없었다. 지정된 공략대 없는 가이드는 괜찮았는데, 자기네로 공략을 해 보라고 하자마자 이 모양이냐.
내가 애들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아니면 오현욱만의 문제인가?
“현욱이가, 저희 중에 제일 강하니까… 잘 빠져나올 거예요.”
그나마 믿었던 한은영마저 얼빠진 소리를 지껄인다.
애들을 너무 과대평가했나 보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현욱. 일어서.”
이런 정신머리는 미리미리 고쳐 놔야 한다. 증상이 심해지면 고칠 수 없다.
차라리 그냥 멍청해서 튀어나오는 말이라면 낫다. 그건 머리를 채워 놓으면 높은 확률로 해결된다.
하지만 오현욱의 저 자기희생적 발언?
이건 답이 없다.
하다못해 오현욱이 자신만만하게 자긴 할 수 있다고, 고블린들을 모조리 죽이고 귀환할 거라고 했다면 모를까.
같은 헛소리라도 본인이 당당하면 발언의 의도가 달라지는 법이다. 보통 이런 경우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 머리에 든 게 아무것도 없어서 되는 대로 내뱉었다.
둘. 그딴 작전으로도 공략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두 번째의 가장 훌륭한 예시가 이 학교에 있다. 본인의 무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별 희한한 방법으로도 무식하게 던전을 밀어 버리는 인간이.
홍석영.
세이렌의 둥지만 봐도 그렇다. 나중에 김채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황당해했던가.
세이렌 대응법이랍시고 단순하게 청각을 봉인했다. 발 디딜 곳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김채민을 데려갔다. 심지어 공략대조차 홍석영과 한두 번 합을 맞춰 본 게 다인 급조된 이들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비록 그 뒤에 대국민 사기극이 있었긴 했지만 중상자 없이 공략에 성공했다.
그래. 헛소리를 할 거면 그를 뒷받침할 실력이 있으면 된다.
실력이 없다면 목소리라도 커야 한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던전에서는 간혹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짐꾼으로 따라갔던 헌터가 깨달음을 얻어서 S급 던전을 공략한다든지.
음.
거짓말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작전을 성공시키고 기적적으로 귀환하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다. 모두가 무리라고 만류한 던전에 기어이 들어가더니 정말로 공략을 해 버리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의 말이란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된다 된다 하다 보면 정말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나도 마음에 들진 않아도 목소리가 크고 자신감 넘치는 헌터들에게 일감을 더 몰아주게 된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는 놈보다는.
“자길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지?”
결국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 나온다.
새끼 돼지가 생각하는 거라곤 뻔하지. 남들을 희생시켜서 던전을 공략하던 놈보다 더 나은 놈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 몸을 희생하자!
“그거 아냐? 남을 희생시키거나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나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취급하는 건 똑같더라고.”
아니, 왜 정석적으로 던전 공략할 생각은 못 하냐고! 내가 가르쳐 주고 있잖아! 기초부터! 착실하게! 던전 공략하는 방법을!!
오현욱은 이를 악물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턱에서 옛날, 아저씨의 부탁을 받아서 날 돌봐 주었던 남자가 떠올랐다. 아직 술독에 빠지기 전. 살이 뒤룩뒤룩 찌기 전. 돼지가 아니라 홍석영의 뒤를 이을 유망주로 주목받던 재기 넘치던 청년.
싫은 놈과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기 싫어서 성격에도 맞지 않는 좋은 일을 아득바득 하던 남자.
아저씨가 내게 해 주던 말이 떠오른다.
‘훨씬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
어쩌면 그 말은 미래의 오현욱이 찾았던 길에서 힌트를 받았던 걸까.
돼지 새끼가 얻은 깨달음이 돌고 돌아 나한테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하지만….
그게 다시 새끼 돼지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던전 공략은 실패했다고 끝나지 않아.”
목소리에 실렸던 힘을 뺐다.
“공략에 실패하면 던전이 사라지나? 아니. 게이트는 몬스터들의 출입만 막지 헌터들이 드나드는 건 막지 않아.”
막혀 있던 게이트가 몬스터의 출입을 허용하는 것. 그게 던전 브레이크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이 말이다.”
“…….”
“A급 던전이나 S급 던전이면 몰라. 겨우 고블린 던전을 빠져나오는 데 목숨을 써? 그딴 실력으로는 던전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마.”
더 얘기해 봤자 똑같은 이야길 반복하게 되겠지.
“…아까 그 상황에서 낙오자 없이 모두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루트를 찾아 와. 너희 수만큼. 일곱 개.”
유혜은은 제외다. 동생과 함께 김채민과 있다. 던전 공략 수업을 더 들어 봤자 크게 도움은 안 될 테니까.
나는 강태우에게 손짓했다.
“태우 학생은 나 따라오고. 오늘은 따로 봐주마. 아마….”
나는 아직도 우뚝 서 있는 오현욱과,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만 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당분간은 나와 둘이서 수업해야겠지만 말이다.”
* * *
[오현욱 – S급] [주 무장 – 맨손 격투] [길드 메모리얼의 마스터] [헌터유가족협의회 회장] [메모리얼 재단 이사장] [헌터 아카데미 운영위원회 회장]관리청에 저장된 오현욱의 프로필을 보면 그 돼지 새끼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힘들다. 공략한 던전보다도 기부와 후원 목록이 먼저 떠오른다.
돼지 새끼의 사회 환원 활동 아래에는 헌터 생활을 하면서 공략한 던전 목록이 나온다. 주요 공략 던전 몇 개가 적혀 있고, 그다음은.
[…던전 외 156건]유지은이 공략한 709개의 던전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은 숫자다. 유지은이 소처럼 일하긴 했지만 그걸 고려해도 오현욱의 명성에 비하면 수상할 정도로 적다.
그거야 당연하지. 오현욱의 전문은 던전 공략이 아니었거든.
정보 열람 등급을 높인다. 나와 본부장밖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절차는 필요 없다. 검색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숨겨져 있던 문서가 드러난다.
[오현욱 – S급] [■■■■■■■■■ ■■■■■■] [■■■■ ■■ ■■■■■■ ■■■■■■■■] [■■■■■ ■■■■ ■■■■■■■■로 인하여 보안등급 격상. 이후 관련된 일에 협조하기로.] [그 외 ■■■■■의 경우, ■■■■■■와 ■■■한다.]검열로 가득한 문서.
오현욱은 주로 던전 공략보다는 불법 각성자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했다. 대부분 국가 기밀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이런저런 외교적 문제로 말소되는 일이었다.
검열이 없는 것도 볼 수는 있긴 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 오현욱은 이제 없다. 지금 새끼 돼지를 여기까지 키우려면… 차라리 귀여운 새끼 돼지로 두는 편이 낫지. 최소한 술은 입에도 못 대게 나약해 빠진 정신머리를 담금질도 좀 하고. 쓸데없는 기합도 좀 빼고.
“그럼….”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는 거의 없다. 잠깐 귀를 기울였다가 말았다. 기억해라. 시간과 노력.
강낭콩도 키웠는데 얘네도 키울 수 있다. 아저씨도 날 키웠지 않은가. 내가 아저씨보다 못한 게 뭔데?
“넌 또 왜 여기 있어?”
“헤헤.”
유지은은 헤벌쭉 웃었다.
“기왕 오늘 여기 온 거, 저도 얘랑 같이 들으면 안 돼요? 언니가 하는 건 재미없단 말이에요.”
유지은은 강태우를 가리켰다. 얘가 아니라 오빠라니까. 강태우는 유지은을 슬쩍 훔쳐보곤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봐주다가는 끝이 안 난다. 언니한테 돌아가라고 하려다가… 생각을 고쳤다.
어차피 홍석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이론 수업은 몇 번 듣게 했다. 원래 어정쩡하게 아는 게 제일 위험하다.
유지은을 봤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 동그란 눈. 화사하게 웃는 입가. …또 어디서 마력으로 노폐물을 어쩌고 하는 헛소리에 혹하고 있지는 않겠지?
어차피 강태우에게도 기본 안전 수칙에 대해 가르칠 생각이었다. 유지은도 알아 두는 게 좋겠지. 이런 건 빨리 알고 있을수록 좋으니까.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유지은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새 다선이 파라솔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 찬 바람이 느껴졌다. 바리스타인지 헌터인지 알 수 없는 지유건은 종이로 만든 명찰을 가슴에 단 채 커피와 스무디 두 잔을 가져다주었다.
하늘은 맑다. 구름 한 점 없는 여름 날씨다. 해가 지는 시간도 많이 늦어졌지. 원래 수업은 해가 질 때까지 하는 거다.
나는 일몰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헌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뭐일 것 같아?”
강태우는 눈을 한 바퀴 굴렸고, 유지은은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대답했다.
“싸움?”
“가장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거.”
“…어. 음.”
유지은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네 목숨이다.”
“…….”
“항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라.”
나는 커피를 쪼르륵 마셨다.
“목숨 걸고 던전을 공략해 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