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8)
코가 깨진다(1)
원래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상황의 연속이랬다.
누군가는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래서 인생이 골치 아프다고 했다.
본부장은 전자였고,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봐라.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휴가를 만끽하고 있던 내가 고전 SF 영화 주인공처럼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를 바꾸고 있다니.
이딴 게 재밌을 리가 없다.
“끄어엉.”
“저 새끼들은 도대체 어디서 계속 튀어나오는 거야.”
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아래를 내려 보았다.
거리에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 생각보다 남아있는 놈들이 많았는지 점점 수가 늘어나고 있다.
“뭐, 저것들은 여기 헌터들이 처리할 거고….”
차라리 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거라면 이해라도 빠를 텐데.
시간 여행이라.
그렇다면 정말 이곳에는 열 살의 우희재도 존재한다는 말인가?
열 살의 우희재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프다. 과거를 바꿨다가 자신의 존재를 지워 버린 시간 여행 영화가 있었는데….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떠냐.
과거의 사건을 바꿔서 어쩌구 하는 건 내가 시범고 애들을 구하면서 아무래도 좋아졌다. 원래 거기서 죽었던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아직 멀쩡한 걸 보면 그거 좀 바꾼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거나 하진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날 여기로 날려 보낸 수상쩍은 아이템도 그랬지 않았나. 멸망이 확정된 세계라고.
그 아이템이 하는 말을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망한다면 내가 뭘 하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다 얻어걸리면 안 망할 수도 있는 거고.
‘넌 살아라.’
유지은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겨우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아이템은 지네가 죽고 나온 거였지. 그 지네가 방이동 던전의 보스였다면….
방이동 던전이 언제 발생한 거더라?
마력 시계를 두들겼다. 어차피 배터리는 착용자의 마력이다. 통신 기능은 사용할 수 없지만 다른 건 멀쩡히 돌아간다.
사용자가 나와 본부장뿐인 시제품이다 보니 마력 시계에 넣는 데이터에 열람 제한을 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작은 시계에는 대한민국의 헌터와 던전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정보는 힘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홀로그램 창을 띄워 빠르게 살폈다.
2021년 4월 6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던전 발생.
“…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왜 하필 이 날인가 했더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긴 했다.
* * *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건물 옥상에 그대로 걸터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최우선 목표는 물론 방이동 던전이다.
하지만 어디 야산에 있는 거면 몰라도 송파구 중앙에 박혀 있는 던전을 몰래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확실한 신원과 믿을 수 있는 헌터의 보증이 필요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내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화둥둥 막내 손주를 구해 줬다고 해도 다연에서 신원불명의 헌터에게 들어가 보라고 허가를 받아 줄 것 같진 않은데….
험한 말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씨,
“씨발!!!!”
“……?”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내뱉었나 싶어 화들짝 놀랬다가 정신을 차렸다.
내 목소리가 아니다.
“이 소 새끼들은 갑자기 왜 지랄이야!!!”
걸쭉한 욕설이 뒤따라 들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살폈다.
콰콰콰쾅!!!
“꾸에엑!!”
요란한 폭음과 함께 소 떼가 쓸려나간다.
“뭐여, 거… 거 저놈이 부른 거 아냐? 아까도 그랬잖아!”
“소대가리 주제에 귀찮게도 구네!!!”
뭘 저렇게 태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나 살폈더니 남산 방향에서 내려오는 헌터들이다.
열 명 정도 되는 헌터들이 몬스터 떼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급하게 몸을 피했다. 뒤에서는 미노타우로스가 쫓아오는 중이었다.
“크어어엉!”
“시끄러워, 개새끼야!”
“개 아니고 소잖아.”
“…이 소 새끼야!”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들의 대화치고는 무게가 없다.
상황이 아주 여유로운 건 아니다. 그랬더라면 미노타우로스에게 밀려 여기까지 내려오진 않았을 테다.
그렇다고 걱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난 이미 이 일의 결말을 알고 있지 않은가. 미노타우로스는 제압되고 명동 던전도 폐쇄된다.
사상자 수는 어마어마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회복한다. 그 과정에서 명동 던전 담당 길드는 조사를 받게 되고, 결국 길드장을 비롯한 주요 길드원들은 구속된다.
이 이후로 던전은 길드의 자율이 아니라 국가에서 도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그건 나보다는 본부장과 관련된 일이다. 지금… 저 앞에서 신나게 창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
“아이고, 이거 이렇게 해서 언제 끝내나.”
“홍 씨, 투덜거리지 말고 창이나 한 번 더 휘둘러.”
“지금 뭐 빠지게 휘두르고 있는 거 안 보여?”
“대가리 뗀 놈보다 붙어 있는 놈이 더 많잖아. 홍 씨도 이제 나이를 먹었어.”
“아직 한창이거든?!!”
창을 휘두를 때마다 푸른 바람이 휘몰아친다. 거센 마력의 칼날이 몬스터들을 난도질하고, 끝이 미노타우로스의 다리에 닿았다.
“쿠어어어!!!”
이미 여러 번 당했는지 미노타우로스의 종아리가 엉망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다 못해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이족보행 거인형 몬스터의 경우 다리를 노리는 게 공략법이긴 하지.
약이 오른 미노타우로스가 콧김을 씩씩 뿜으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주위에 바글바글한 부하들이 쓸려 나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모양새다. 미노타우로스의 기세에 질겁했는지 물소들은 그제야 흩어지기 시작했다. 좁은 거리였던 탓에 자기들끼리 들이박고 밟고 난리가 났다.
이거 완전 특등석인데.
여기 모인 헌터들은 급하게 모인 것치고는 하나 같이 명성이 높은 이들이다. 이십 년 뒤에도 살아 있는 사람은 많진 않지만 그래도 저들 모두가 대한민국 현대 헌터사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전성기 시절 전투를 언제 이렇게 가까이서 보겠느냐고. 카메라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새끼 헌터들 의무 교육 때 보여 주면 딱….
“좋아! 한 번 더!”
바닥에서 넝쿨이 피어올랐다. 반쯤 박살 난 거리 위로 푸른 이파리가 가득한 게 어쩐지 낭만이 느껴졌다.
물론 그와 별개로 덩굴은 순식간에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몸뚱이에 비하면 연약하기 짝이 없으나 막상 그 가냘픈 덩굴에 붙잡힌 놈은 꼼짝도 못 했다.
“오.”
대마법사 김채민의 고유 마법이다.
저걸 내 눈으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김채민이 죽은 이후로는 완전히 실전되었었다.
김채민은 어떻게 죽더라. 시범고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김채민 같은 거물을 살려 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되면 됐지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이십 년 동안 방이동 던전은 위험도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런 안정적인 던전 안에 그딴 괴물이 숨어 있었는데 S급 헌터 한두 명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게다가 서울에는 그 지네만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시범고 애들처럼 죽을 사람을 구해 놓으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먼저 방이동 던전을 닫고, 서울에 불 지른 놈이 숨어 있는 던전을 찾아서….
괜찮은데?
아니,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이것밖에 방법이 없잖아. 목숨을 구해 주는 김에 겸사겸사 빚으로 달아 두면 안락한 노후도 보장될 테고….
“됐어! 들어갔다!”
본부장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마침내 미노타우로스의 다리가 잘렸다.
김채민의 넝쿨 덕분에 곧장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미노타우로스에게는 잘린 다리를 대체할 수단이 없다. 그 비대한 상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두 다리가 필수.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만 한다면 그 이후에는 비교적 간단하다.
“없앱니다!”
후방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외쳤다. 화려한 이펙트도 없이 넝쿨은 단숨에 사라졌다. 미노타우로스는 중심을 잡기 위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전봇대가 쓰러지고 건물 몇 개가 부서졌다. 부디 저 안에 사람이 없었기를.
“크허어어엉!!!!”
그래도 보스는 보스라고, 미노타우로스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건물 하나를 붙잡고 버틴 미노타우로스는 재차 공격에 나서는 헌터들에게 팔을 휘둘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는데. 나도 슬슬 시청으로 가 볼까.
“홍 씨, 남은 다리도 잘라 버려!”
“알았다고!”
본부장이 미노타우로스의 팔을 가볍게 피하고 놈에게 바싹 붙었다. 멀리서 마력의 칼날로 조금씩 갉아 먹는 것보다는 한 번에 폭파할 생각으로 보였다. 다른 헌터들이 그를 엄호해 주고 있었다.
김채민이 또다시 넝쿨을 소환했다. 미노타우로스가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매섭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는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헌터 하나가 넝쿨을 잡아챘다.
도로에 발을 박아 넣은 채 근육을 크게 부풀렸다. 대단한 걸 노리는 것은 아니다. 미노타우로스를 조금이나마 비틀거리게 하면 충분하다.
본부장이 남은 다리에 일격을 넣었다. 본부장이 대답한 것처럼 잘라 내진 못했지만 꽤나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노타우로스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고, 넝쿨을 잡고 있던 헌터는 그대로 잡아당겼다.
미노타우로스는 건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거대한 몸집이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넘어지기 시작했고, 놈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씨발!”
내가 있는 건물 옥상을 향해.
* * *
‘이게 B급 던전이라고?’
홍석영은 던전에서 튀어나온 미노타우로스를 마주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이래서 자율신고제를 하면 안 된다고 했던 거다. 도대체 뭘 믿고 던전 등급 산정을 길드에게 맡긴단 말인가?
그래서 감찰제도라도 도입하자고 외쳤건만, 길드 조합의 반대에 부딪혀 미적거리는 사이 결국 이 사달이 났다.
반대했던 이유야 뻔하지. 던전 등급을 속인 이유도 뻔하고.
결국 피해가 발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갈까요?!”
김채민이 등 뒤에서 외쳤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로 대마법사 타이틀을 딴 헌터는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뽐냈다.
가느다란 넝쿨이 집채만 한 몬스터를 꽁꽁 붙들어 맨다. 역시 탐나는 인재다.
그러잖아도 학교에 마법 재능이 넘치는 아이가 둘이나 있지 않은가. 다른 분야면 몰라도 마법은 자신이 가르치기가 힘들다. 저런 헌터가 수업 몇 번만 해 줘도….
문득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잘 대피했겠지.
“크르륵!!”
“홍 씨, 남은 다리도 잘라!”
“알았다고!”
이럴 때가 아니지.
홍석영은 정신을 차리고 창을 꽉 쥐었다. 지금은 저 놈을 잡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창끝에 마력이 모인다. 이미 다리 하나를 잘랐다. 일단 넘어뜨리기만 하면 그 뒤는 더 쉽다.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다리를 자르는 건 불가능하지만 남은 다리에 충격을 가해 넘어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충분하다. 긴 준비 과정도 없이, 홍석영은 그대로 창을 휘둘렀다.
거대한 몸집이 기우뚱거린다. 필사적으로 팔을 허우적거리지만 중심을 되찾기란 불가능하다. 놈의 팔이 요란하게 근처의 건물들을 쓸었다가, 결국 앞으로 넘어지고 만다.
“…어?”
홍석영은 재차 공격을 퍼부으려다가 멈칫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손을 뻗었던 건물 옥상에 사람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잔뜩 구겨지고, 먼지투성이의 양복을 입고 있는 남자.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홍석영은 눈을 찌푸렸다. 분명 검을 들고 있었다. 워낙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걸 못 알아볼 순 없었다.
그리고 옥상의 남자는 홍석영만 본 것이 아니었다.
“사람?”
“민간인이야?”
“아냐, 뭘 들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미노타우로스의 등을 타고 푸른 불길이 내려와 거리를 채우고 있는 몬스터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불에 닿은 몬스터들은 그대로 불길에 휩싸였다.
“어… 수고들 많으십니다….”
난처한 듯, 혹은 의욕이 없는 듯 나른한 목소리가 미노타우로스의 등 위에서 들려왔다.
“바쁘신 모양인데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 계속 하시면 됩니다.”
“…뉘쇼?”
홍석영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요?”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미노타우로스의 등에 박혀 있는 검을 빼며 머리를 긁적였다. 푸른색 불티가 검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