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82)
습격(3)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흉악한 마력이다. 이딴 식으로 마력이 몰아치는 건 본 적이 없다.
붉은 마력은 거친 모래알처럼 굴러다닌다. 그러나 그 모래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느리게 흐른다. 모자를 푹 눌러쓴 놈을 기준으로 커다란 소용돌이를 그렸다.
“승연아!!”
뒤늦게 달려온 이미선이 아이들을 확인했다.
놈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에 맞추어 소용돌이의 흐름이 빨라진다.
건방지게. 어디 내 앞에서. 마력이 고이기도 전에 흐름을 걷어 냈다. 소용돌이를 이루던 마력이 흩어졌다.
놈은 더 움직이지 않고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 머리가 옆으로 기울면서 모자에 가려졌던 눈이 드러났다. 밝은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아이템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너… 보여?”
놈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물었다.
멈췄던 마력이 슬금슬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빤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가 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 뒤쪽에 있는 아이들에게 뻗어 가는 꼴이나, 슬그머니 내 발목을 기어오르려는 꼴이나.
검으로 바닥을 긁었다. 어차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어려울 건 없다. 물리적인 힘으로 마력의 연결이 약한 부분을 살짝 긁어 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마력의 연결을 끊어 내는 순간, 놈은 히죽 웃었다.
방주의 보스라는 소문이 있다고 했던가. 생글생글 웃어 대는 얼굴은 그 악명에 비하면 어이없어질 정도로 어리다.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 겉보기만으로 헌터 나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느낌이라는 게 있다.
심지어 홍석영이 소문을 들었다던 시기를 고려하면… 십 대 후반까지 내려갈지도 모른다.
방주의 보스라기에는 역시 너무 어리다.
“…….”
“보이잖아.”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떨어진 거지.
이런 놈이 있다는 말은 연구소에서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만한 실력자라면 소문이라도 돌기 마련일 텐데. 나는 그런 소문에서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른다.
“보이지?”
놈은 끈질기게 물었다. 마력이 다시 움직인다.
“씨발.”
이미선이 자신의 몸으로 아이들을 가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다. 힐긋 보이는 강태우나 이승연이나, 둘 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다.
어쩌면… 예상했어야 했다. 아니, 예상하였는데 방심했다.
여기에 헌터가 몇인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나.
이게 다 홍석영…
…….
아니, 됐다. 책임을 미루는 건 그만두자.
홍석영을 비롯한 모두의 잘못이다.
우리의 실수였다.
3호, 강태우를 시범고에 데려왔던 건 방주를 낚기 위해서였다. 강태우에게 협조를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강태우에게는 뭐라고 했었던가.
‘나쁜 사람들이 보육원을 없애려고 했던 것 같더라고.’
보호를 명분으로 댔다. 보육원을 습격한 놈이 널 찾으러 올지도 모르겠다고.
그럼 보호하는 시늉이라도 냈어야 했다.
이렇게 혼자 다니게 하는 것이 아니라.
“…….”
뒤를 돌아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놈이 보육원을 습격한 이유. 원장을 비롯해 아이들을 죽인 이유. 굳이 강태우를 찾아온 이유.
끈질기게 보이는지 묻는 이유.
고민은 짧았고 각오는 간결했다.
놈이 나에게 집중하게 하자.
놈 앞으로 뛰어가 검을 휘둘렀다.
“씨발, 그래. 보인다, 새끼야.”
어차피 내 설정은 방주의 내부 고발자다. 방주에서 나를 그렇게 착각해도 지장은 없다. 오히려 내 설정에 신빙성만 더해 줄 뿐이다.
놈이 연구소 출신을 노리고 있다면, 마력을 본다고 지껄이는 나에 대해서 파헤치려고 하겠지.
파헤치거나 죽이거나.
음. 어느 쪽이든 놈에게는 가망이 없는 이야기다. 어차피 내가 쓰고 있는 신분은 죄다 이미선이 만들어 준 거 아닌가. 내 뒷조사를 해 봤자 나오는 건 평범하고 불쌍한 D급 헌터의 삶뿐이다. 방주에서의 내 흔적을 찾는 건 더 불가능하고.
…어린 내가 얘 손에 벌써 죽은 건 아니겠지?
콰앙!
놈의 손이 검날을 잡았다.
순간 손이 얼얼해질 정도의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짧게 혀를 찼다. 나도 몸을 안 쓰기는 했지. 이십 년 전의 과거로 온 뒤로 몸을 움직였던 건… 애들 굴릴 때나 했나. 그게 몸을 쓴 건가. 그냥 숨 좀 쉬고, 스트레칭을 한 수준이지.
날 죽인다?
그건 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이딴 놈한테 당한다면 아저씨한테 미안하지. 아저씨 수업을 이 악물고 따라갔던 과거의 나에게도 미안하다.
그리고 몇 대 맞으면 뭐 어떤가. 내 목에 걸려 있는 인식표가 피해를 대신 흡수해 준다.
…그거 내 지갑 안에 있던가?
아, 뭐. 됐다. 이 정도 충격이면 인식표에 획 하나 새겨지지도 않을 거다.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주위에서 마력이 널을 뛴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하!”
놈이 웃는다.
그게 기분 나빴다.
검은 불편하다. 창에 비해서 거리를 너무 좁혀야 한다. 몇 번 거리 가늠에 실패해서 검이 허공을 갈랐다.
몇 번 공기와 마력을 함께 베어 내던 검 끝에 모자가 걸렸다. 붉은색 머리카락 몇 올과 함께 모자가 뒤로 넘어갔다.
“오.”
여름 해는 이제야 지고 있다. 조금씩 붉게 물드는 하늘 아래로 새하얀 얼굴이 드러난다. 놈은 눈을 깜빡였다. 눈 주위가 금가루라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거리는가 싶더니 평범한 갈색 눈이 되었다.
얼굴 전체가 드러나자 분위기가 확연히 바뀐다. 사나운 눈매와 뒤틀리는 입매는 여자라기보다는 남자, 소년이었다.
“와.”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톡. 톡.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재밌긴 한데… 흐응. 역시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네. 거기엔 너처럼 큰 애는 없었다고 들었는데.”
“거기?”
“아, 왜. 지하 말이야. 뭐라고 부르더라. 약속? 참 감성적이야. 그치?”
말하는 걸 봐서도 방주의 보스 같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잖아. 어느 조직의 보스가 직접 사람을 죽이러 돌아다니겠나. 그런 조직은 제대로 된 곳이 아니니 나와야 한다.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긴 하지만.
놈은 생글생글 잘도 웃었다. 살벌한 분위기와는 달리 웃고 있는 얼굴은 아이돌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예쁘장하다.
…역시 모르는 얼굴이다. 저런 특색 있는 놈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잊을 수 없다. 놈은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떨어진 모자를 주워 쓰고, 그 위로 후드를 눌러썼다. 얼굴이 다시 가려졌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리고 나자 다시 성별이 모호해 보이는 체형만 남았다.
놈은 얄밉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 나아아아중에 또 보자. 거기, 너도!”
놈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강태우에게도 크게 손을 흔들었다. 이미선이 아이들을 감쌌다.
“이래서 세상 사는 게 재밌다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톡. 톡. 톡.
놈은 여전히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이쿠, 얼른 가야지. 아, 이렇게 소득 없이 가면 안 되는데. 오히려 나만 손해 봤잖아.”
잠깐 울상을 짓다가.
“어쩔 수 없지!”
다시 활짝 웃었다.
톡. 톡.
톡.
톡.
“…….”
놈은 사라졌다.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그제야 풀렸다. 놈이 없어지고 나서야 이 골목의 마력이 얼마나 짓눌려 있었는지 깨달았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던 건 그 탓일 거다. 비각성자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마력이 부족한 곳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잠깐 서서 숨을 돌렸다. 이미선이 아이들을 뒤에 두고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이미선을 보지 않았다.
“크흠.”
정리가 되지 않은 채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
홍석영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내가, 늦었나?”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늦었습니다.”
* * *
“그러니까, 제가! 연구소가 있는데요!!”
“그래.”
“3호라고 불렸는데, 번호가요, 우리 소희도 같이 지냈는데. 저희 말고도 많았고.”
“알았으니까.”
“그 사람은 집행자라고 생각하는데, 집행자가 뭐냐면요….”
“강태우.”
나는 단호하게 강태우의 말을 끊었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횡설수설하던 강태우는 내가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기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가서 자.”
“…하지만.”
“괜찮아. 이건 어른들한테 맡기고, 넌 가서 씻고 잠이나 자.”
“…….”
나는 강태우의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이승연을 보았다. 아까부터 편의점 비닐봉지를 계속 손에 들고 있다. 뭐야?
애들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온몸으로 걱정하는 티를 내는 애한테 박정하게 굴 수도 없다.
“이승연.”
“네? 네!”
“태우 학생 데려가서 욕실이랑 안내해 주고 자라고 해.”
“넵.”
이승연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렇게 비장할 일인가….
이승연은 강태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숙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난 뒤에야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슬며시 다가왔다.
어쩐지 눈이 반짝이는 오현욱이 대표 격으로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인가요?”
“…….”
“선생님?”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
뭐? 전학생이 사실 사이비 비밀 단체의 연구소에 있었는데, 날 속이려다가 몸담은 보육원이 어느 미친놈한테 습격당해서 우리가 데리고 왔다?
어디 하나 사실인 점이 없다.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닌 게 더 골치가 아프다.
미루자. 책임자는 내가 아니다.
“교장 선생님이 설명해 주실 거야.”
“…….”
놈은 홍석영을 피해 도망갔다. 그건 확실하다.
홍석영에게는 늦었다며 타박을 주긴 했지만 안 온 것보다야 낫다. 적어도 대낮에 사람을 습격할 만큼 제정신이 아닌 놈도 홍석영을 무서워한다는 말이니까.
놈이 사라졌다고 해서 안전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놈이 노리는 건 3호인 강태우지만 주변인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급하게 기숙사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데려와 다연에서 운영하는 펜션으로 왔다. 펜션이라고는 해도 다연 패밀리의 별장으로 주로 쓰는 곳이라고 했던가.
학교에서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들 급하게 왔으니까 일단 쉬고. 밥은 먹었어?”
“아뇨….”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유혜은이 말했다.
젠장. 왜 이렇게 됐지?
“아, 얘들아!”
타이밍 좋게 구세주가 왔다.
몇 시간 전과 비교해서 확연히 지쳐 보이는 이미선이 다선의 헌터들을 끌고 다가왔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나나 선생님, 아니면 여기 헌터들한테 얘기해. 알았지? 1층에 있는 부엌은 아무나 써도 되고. 냉장고도 가득 채워 놨으니까 다 먹어도 돼.”
아이들이 눈빛을 주고받는다. 이미선은 싱긋 웃었다.
“우리 애, 우리 다선의 헌터들은 요리도 잘하거든? 먹고 싶은 거 말하면 어지간해선 다 해 줄 거야.”
“진짜요? 헌터잖아요.”
“너네 학교에서 음료수는 누가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
이미선의 뒤에서 지유건 헌터가 수줍게 웃었다.
이미선은 일부러 더 호들갑 떨며 말했다.
“아까 누가 밥 못 먹었다고 했어? 혜은이랑 지은이? 가서 얼른 밥 먹어. 너희는? 먹었어? 먹었어도 또 먹어. 너희 나이에는 소 한 마리도 먹을 수 있어. 한우도 있으니까 지 헌터한테 구워 달라고 해.”
먹을 거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은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오현욱이 슬쩍 나를 돌아보았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자 아이들 무리에 합류했다.
이미선은 아이들이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나에게 말했다.
“누군지 알아냈어요.”
“…벌써요?”
아무리 이미선이 유능하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너무 빠르지 않은가.
이미선은 손가락을 움찔거리다가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입 안에 와르르 털어 넣었다.
“그런 얼굴이잖아요. 알아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헌터예요.”
“…헌터요?”
“네. 멀쩡하게 잘 활동하고 있는 헌터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