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86)
내키지 않는 선택(2)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아세요?”
누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뿌연 안개가 들이찬 것 같았던 머리가 맑아진다. 내가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지? 내가 뭘 얘기했지?
너무 많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할 생각 없었는데. 혹시 예전에 했던 얘기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은 없겠지. 젠장젠장젠장….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아시냐고요.”
다시 한번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태우를 보았다.
간밤의 고생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이다. 보육원 습격을 알게 되었을 때도 저 정도로 얼굴이 안 좋지는 않았다. 창백한 안색. 퀭한 두 눈. 덜덜 떨리는 손.
창밖을 보았다. 여름이라 하늘이 밝은 거지 시간은 아직 한참 이르다. 새벽에 겨우 잠들었던 애가 일어나서 돌아다닐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생님!!!”
강태우는 파리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저러다가 숨이라도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빈 잔을 아쉬운 얼굴로 내려보았다. 아껴 마실걸. 한 잔 더 마시기에는 새벽부터 머리까지 당이 오르는 커피는 건강에 좋지 않아 보였다.
헌터가 되어서 건강 생각하는 것도 웃긴가. 하지만 신경 써서 나쁠 건 없잖아.
“저, 태우 학생? 그게.”
이미선이 벌떡 일어나서 강태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미선이 해결할 수 있을지 한번 볼까.
“그으게, 그러니까.”
볼 것도 없어 보였다.
“그으으… 우 선생님이.”
이미선이 나를 흘깃흘깃 본다. 얼른 수습해 보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다.
나는 이미선의 시선을 무시한 채 주방을 다시 뒤졌다. 내가 마셨던 커피 믹스. 원두. 그라인더. 프라이팬. 냄비. 과일 차. 홍차.
아. 역시 없을 리가 없지. 나는 찬장 안쪽에서 핫초코 통을 꺼냈다. 물은 끓여 놓은 게 남아 있으니 새 잔을 꺼내 핫초코를 넣었다.
…새벽부터 핫초코는 너무 미국 감성인가.
뭐 어떤가. 따뜻하고 단걸 마시면 기운이 나기 마련이다. 안 마시더라도 손에만 쥐고 있어도 제법 안정이 될 거다.
핫초코는 금방 만들어졌다. 강태우는 차가운 눈으로 어른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고, 이미선은 그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강태우에게 손짓했다. 당연하게도 오지 않았다. 건방진 놈.
사실 올 거라고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그냥 내가 가서 손에 핫초코 잔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강태우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긴 했지만 컵을 내팽개치진 않았다.
“앉아.”
“…….”
강태우는 나를 멀뚱히 보았다.
“앉아.”
단호하게 말하며 어깨를 붙잡아 이끌었다. 부엌 아일랜드 바에 앉히고, 나는 의자를 끌어다 그 맞은편에 앉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이미선은 슬그머니 강태우의 뒤에 섰다. 시야에 잡히지 않으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커피를 너무 일찍 마셨다. 지금이야말로 커피가 필요한데.
나는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강태우에게 말했다.
“마셔.”
“…….”
“마시라니까?”
강태우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컵을 들었다. 핫초코를 한 모금 머금고,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단 모양인지 미간에 주름이 잠깐 잡힌다. 그건 알 바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강태우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거다. 저 반항적인 얼굴을 봐라. 하지만 못마땅해 보이는 건 얼굴뿐이다.
내가 끄는 대로 얌전히 의자에 앉고, 내가 마시라고 하자 얌전히 핫초코를 마신다.
이게 중요한 거다.
충격을 받았어도 내 말을 듣는다. 나를 믿고 있다는 증거다. 아니면 나밖에 없다는 증거이거나.
어느 쪽이든 내가 말만 잘하면 끝날 사소한 일이다.
강태우는 박서현이나 오현욱에 비하면 훨씬 얌전하다.
엄한 할아버지에게 키워진 박서현은 칭찬이 고팠고 사기 계약에 당한 오현욱은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은 낮았다. 그래서 박서현에게는 칭찬을 잔뜩 해 줬고, 오현욱은 속을 긁어 내렸다. 나도 나름 생각을 해서 맞춤 교육을 해 주고 있었다고.
아, 뭐… 박서현에게는 잘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
“계속 마셔.”
“…….”
그래도 그 두 명에 비하면 강태우는 알기 쉽다. 내가 강태우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인정하긴 싫었지만 강태우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손을 타지 않는 어른스러운 아이.
차이점이 있다면 난 꾹 밀면 뛰어나와서 왈왈 짖어 댔었고, 강태우는 밀면 미는 대로 밀리는 성격이었다. 연구소에서 무탈하게 살기 위해서는 강태우 같은 성격이 나았을 거다. 사실 난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굴었던 거고.
강태우가 연구소에서 몇 년을 지냈더라. 한번 잡힌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강태우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모범생이다. 자길 속였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말을 따라 착실하게 핫초코를 마시는 모습을 봐라.
“어떻게 아냐고 물어봤지.”
“…….”
“그거야 널 속였으니까 알지.”
‘우 선생님!!’
강태우의 뒤에서 이미선이 입 모양을 움직여 나를 불렀다. 양팔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강태우가 아니었으면 한 대 쳤을 만큼 역동적이다.
난 이미선을 무시했다.
강태우는 어른스러운 만큼 손을 타지 않는 아이다.
이게 무슨 뜻일 것 같은가?
보기보다 고집이 세고 독립적인 성격이라는 말이다. 얌전한 외관에 속으면 안 된다. 얘가 졸업하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던가. 소장이 듣고 싶은 말도 해 주고 그러라고 했었지?
보기보다 훨씬 약아빠진 놈이다.
그리고 저 녀석보다 훨씬 더 약아빠진 아동기를 거친 입장에서 말하는데, 어설프게 속이다가는 들킨다. 그럴 바엔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이 더 신뢰를 쌓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감이 안 좋긴 한데… 속였다기보다는 말을 안 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런가?”
이미선이 숨넘어가는 표정을 하는 게 우습다. 한 번 기회를 줬잖아. 그럼 잘했어야지. 나한테 바로 떠넘기기나 하고.
“아, 하지만 널 보호하려고 데려온 건 맞아.”
그리고 모든 아동이 그렇듯, 어른 대접을 해 주면 좋아한다. 강태우도 예외는 아니다.
즉, 대응 전략은 간단하다.
적당히 솔직하고 어른스럽고 독립적인 개체로 대하되, 숨길 건 숨기고 잘 구슬려서 이쪽에 협조하게 한다. 얘가 협조한다고 해 봤자 뭐 대단한 게 있겠냐마는.
“보육원을 노리는 사람이 있던 것도 사실이고. 선생님이 숨긴 건….”
지칭은 선생님으로 한다.
어찌 되었든 내가 자기 선생님이란 사실을 떠올리게 해야 한다. 사건 수사하는 헌터는 너무 고압적이고 딱딱하잖아.
“…….”
잠깐 말을 멈췄다.
여기서 말을 잘해야 하는데.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다. 무슨 말을 하냐에 따라 강태우에 대한 교육 방침이 정해진다고 봐야 한다.
뭐라고 할까.
보육원이 방주인 걸 알고 있다? 네가 연구소 출신인 걸 알고 있다?
“숨긴 건요?”
침묵이 길어지자 강태우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핫초코 덕분인지 그래도 어느 정도 진정된 듯한 모습이었다.
…기왕 하는 거 좀 충격적인 게 좋겠지. 어차피 아까 이미선한테 말해 둔 것도 있었고.
“선생님이 방주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거다.”
* * *
아침이 되었다.
하늘만 밝아진 게 아니라, 시계를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아침이다.
최진우와 한은영은 다선의 헌터들이 고이 모셔 왔다. 다선의 헌터라고 해도 되려나 모르겠지만, 다선의 명함을 들고 다니는 이상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
“엑. 합숙이요?”
당연하지만 홍석영의 개소리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언니인 유혜은은 그래도 귀를 기울여 주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유지은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유지은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합숙이 자는 사람 깨워서 데려오는 걸로 시작해요?”
“지은이 너 안 자고 있었잖아.”
“언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말 안 해도 괜찮거든?”
홍석영은 유지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게 됐단다.”
“뭐가 그렇게 됐단 거예요! 저 학교 가야 해요! 졸업장 따야 한다고요!!”
유지은은 제법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번에는 학교 빠지고 시범고에 놀러 오더니, 이제 와서 무슨 졸업장을 찾… 아, 지난번에 중졸 이야기 때문에 그런가? 역시 진작 그렇게 얘기했어야 했는데.
“학교에는 말해 놨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며칠 결석해도 졸업은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유지은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그럼 저, 여기서 헌터 되는 법 배울 수 있어요?”
“으음?”
“아무것도 할 게 없는데 그냥 놀라는 건 아니죠? 여긴 놀 것도 없어요! 놀 사람도 없고!”
“으음….”
“그냥 불러 놓고 가만히 있으라고요?”
유지은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눈을 저 모양으로 뜨니 다 큰 유지은의 모습이 겹친다. 오동통한 볼살을 보니 다시 지워졌지만.
홍석영은 슬그머니 유지은의 눈을 피했다.
“우 선생님이 봐주실 거다.”
“…네?”
“진짜요?”
“아뇨. 잠깐만요.”
유지은 스승은 댁이잖아! 왜 나한테 떠넘기는 건데!!
“와! 저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반짝거리는 눈을 마주하니 나올 말도 안 나왔다.
내가 말문이 막혀 있자 홍석영이 옆에서 기분 나쁘게 웃었다.
젠장…. 자기 제자 찾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유지은은 어차피 반년 뒤에 시범고에 입학한다. 지금부터 훈련하나, 반년 뒤에 훈련하나 거기서 거기다. 홍석영이 병원에 있는 동안은 거의 교실에서 이론 수업만 진행했으니까….
쯧.
적당히 봐주다가 홍석영에게 넘겨야지.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의 첫… 제자는 아니지만, 애제자를 내가 뺏을 수 있겠나.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허락이라고 여겼는지 작은 유지은이 활짝 웃었다.
“자, 그럼 해산. 밥부터 먹고.”
홍석영은 박수를 두 번 치며 말했다.
“밥 먹고 쉬다가 10시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여기로 온다. 알겠지?”
“네!”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진다. 유지은은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다가 언니에게 끌려갔다. 아침에 와서 상황 파악이 덜 된 최진우나 한은영은 아무 고민이 없어 보이고, 박서현과 오현욱은 잠깐 망설이다가 아이들이 나가고 나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선생님. 승연이가 없는데요….”
“승연 학생과 태우 학생은 잠시 일이 있어서. 오후나 내일 올 거다.”
“어제 여기에 같이 왔었잖아요?”
홍석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음. 개인적인 일이라 가르쳐 주긴 그렇고. 별로 걱정할 건 없다.”
“…괜찮은 거죠?”
“괜찮다니까. 가서 밥이나 먹어.”
박서현과 오현욱은 미심쩍은 눈으로 나와 홍석영을 바라보다가 움직였다.
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물었다.
“그래서, 승연 학생은 괜찮답니까?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던데요.”
“이 헌터가 괜찮다는데 내가 뭐라 하겠나.”
“그건 그렇죠.”
홍석영은 몸이 찌뿌둥한지 기지개를 쭉 켜며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강태우는?”
“새벽에 그러고 다시 좀 재웠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나?”
“아까 일어났던데요. 씻고 회의실에 먼저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음… 회의실은 너무 딱딱하지 않나? 그래도 걔가 미성년자인데 좀 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본인 요청인데 뭘 어쩌겠습니까.”
나는 새벽에 보았던 강태우를 떠올렸다.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단단해지던 눈빛.
작게 떨리던 몸이 차분해진다. 내 말이 끝나니 하는 말은 더 가관이다.
‘그러면 선생님.’
‘음?’
‘제가 정보를 제공하면 뭘 해 주실 수 있어요?’
봐. 얘도 약아빠졌댔잖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