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87)
내키지 않는 선택(3)
세 시간 전.
“선생님이 방주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거다.”
“…….”
깜빡깜빡.
“…….”
“…….”
어쩐지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다. 강태우는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태우 학생?”
“…….”
그나마 깜빡이던 눈도 멈췄다.
…기절한 거 아니지?
“태우 학생!”
“…….”
“…괜찮니?”
“아, 네. 네…. 아니. 그러니까.”
강태우는 멍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바닥과 내 얼굴, 손에 쥐고 있는 머그잔을 번갈아 보며 한참을 부산스럽게 굴던 강태우는 머리를 크게 한 번 흔들었다.
눈을 질끈 감는 게 보였다. 모른 척했다.
잠시 후, 마음을 정리했는지 강태우는 눈을 부릅뜨고서 고개를 들었다.
“방주에서 도망쳤다고요?”
“그래. 지금은 홍 헌터님… 을 도와서 방주를 쫓고 있었지.”
깜빡깜빡.
강태우의 눈이 다시 빠르게 깜빡거린다. 이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강태우!”
“아. 음, 어… 그럼, 저, 절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네가 누군지?”
“…네.”
“그렇지, 뭐. 원래는 전국새마음정신협회가 방주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갔던 거였는데, 거기에 네가 있더라고.”
나는 시원하게 말했다. 이미선은 입을 떡 벌리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뭐라고 요란하게 입술을 움직이긴 했지만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묵살했다.
나한테 일을 떠넘기더니. 애초에 강태우 뒤에 서 있는 거 자체가 끼어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미선에게서 시선을 뗐다.
나는 강태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이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했다. 너무 진지하게 들려도 안 된다. 강태우가 이 발견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면 안 된다.
같은 의미로, 생각을 길게 할 시간을 주어서도 안 된다.
손이 안 타기는 개뿔. 귀찮을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애다.
“덕분에 방주와의 연결 고리를 확실히 할 수 있었어.”
“…….”
“솔직히 그 뒤에 네가 각성했다고 나한테 도움을 구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다.”
강태우는 할 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끙끙거렸다.
음. 웃기지 말라며 고함을 지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반응이다. 어린 나였다면 소름 끼치는 스토커라며 욕설을 퍼부었을 텐데. 사람은 항상 최악을 염두에 둬야 하는 법이다. 이 온건한 반응을 보아라. 역시 모범생은 다르다.
“그럼… 진짜 다 알고 계셨던 거네요.”
꼬박꼬박 말도 높여 주고.
“널 속이려던 건 아니고.”
처음부터 속이려던 계획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두루뭉술하고 편리한 변명 중 하나다.
“사실 우리도 네 저의가 뭔지 얘기가 좀 많았거든.”
“…저의요?”
“네가 방주의 일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으니까.”
강태우는 불편하게 몸을 뒤척였다.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강태우는 그 주제에 대해 더 들어가지 않고 우아하게 말을 돌렸다.
“…그럼 저희 원장님을 쫓고 계셨던 거예요?”
심지어 멋지게 책임 전가도 했다.
감탄할 만한 솜씨다. 저 짧은 문장으로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킨 건 원장님이었다고 범인을 지목했고, 헌터들이 쫓을 만큼 나쁜 짓을 한 것도 원장이었다고 말해 온다.
알고 했어도 칭찬받아 마땅하고, 모르고 했다면 경탄받아야 할 만하다.
“그중 하나지. 연구소가 그렇게 된 이후로….”
쯧.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고 있어서. 홍 헌터님은 연구소장이나 다른 관리인들을 쫓고 있지만, 선생님은… 찾는 사람이 있거든.”
“…….”
“아. 아직 눈치 못 챘을까 봐 말하는 건데, 난 네가 3호란 것도 알고 있어. 그러니 바로 알아봤지.”
3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잠시 혈색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던 강태우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나는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저었다.
아직 멈출 때가 아니다. 더 말해도 된다.
“난 그 연구소에 청소부로 간 적이 있어.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하지.”
“…….”
“그리고… 널 보호하고 싶다고 한 말도 거짓말은 아니야.”
이건 강태우를 시범고에 데리고 오며 한 말이다. 보육원을 습격한 사람이 있다고. 혹시 모르니 너도 우리와 같이 있는 게 낫지 않겠냐,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원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사기꾼인 법이다. 홍석영에게 한번 그 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홍석영은 헌터는 전부 사기꾼이라며 되레 코웃음 쳤다.
사람 할 말 없게 만들기는.
강태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절 통해서 원장님 잡으려던 게 아니라요.”
끝까지 원장님을 들먹이다니. 잘 키우면 쓸 만한 인재가 될 것 같은데. 훌륭한 헌터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진 않는다.”
“그럼!”
“하지만 그게 널 보호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냐. 넌 미성년자야. 게다가 그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뻔히 아는데…. 네가 방주에서 나오고 싶다는 의사만 확실하다면 도와주려고도 했어.”
나는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말투를 고수했다.
이미선의 얼굴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가고 있다. 읽기 어려운 표정이다.
“도와….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요?”
“연구소에만 있던 네가 방주에 대해서 알아 봤자 얼마나 알겠냐. 내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을걸.”
“…….”
이젠 강태우의 표정도 오묘해진다.
잠깐 망설이던 강태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그 사람은 누군지 아세요?”
“아니. 몰라.”
저 건방진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눈빛이 바뀌었다.
…연구소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3호처럼 보인다.
그래도 하던 말은 끝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계속 말했다.
“방주와 관련된 곳을 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있어. 확실하지는 않아. 우리도 조사 중이라. 뭐, 그래도 설마하니 홍 헌터님 코앞에서 널 노릴 줄은 몰랐지만.”
강태우는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살펴보는 것처럼 내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럼 선생님은.”
강태우는 나직하게 말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래.”
“선생님은 방주에서 왜 나오신 거예요?”
“…….”
이 자리에 이미선과 홍석영, 김채민같이 어른들만 있었다면 늘 대던 핑계를 입에 담았을 것이다.
‘동생을 구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 가짜 동생과 아는 사이인 강태우를 눈앞에 두고 그걸 말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이미선이 있다. 이미선은 이젠 측은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아니, 진짜 그렇게 보면 내가 뭘 어쩌라는 거야. 짜증이 울컥 솟았지만 참아 냈다. 난 어른이니까.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
“…찾고 싶은 사람이요?”
동생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입 밖으로 내뱉기는 진짜 싫은데.
이미 실컷 말해 오긴 했지만 어린 나를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릴 것 같다.
인생은 항상 내키지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내가 원치 않게 과거로 돌아와서 온갖 고생은 다 사서 하고 있는 것처럼.
“…내 동생이 너처럼 연구소에 있었거든.”
방금도 날 열렬히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보고 있는 거였다.
강태우는 눈빛만으로 날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
“…태우 학생?”
“……아. 그렇구나.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알겠어요.”
“뭐?”
얜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강태우는 내 당혹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쩐지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높였다. 방금 전까지 핼쑥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던 애가 맞나?
뭔데. 불안하게 왜 이러는 건데.
“선생님 그 사람이잖아요.”
이미선의 눈이 불길하게 반짝인다.
“12호와 같이 있던 형이요.”
“……뭐?”
“선생님이 12호한테 하는 말 저도 들었어요. 그래서 연구소 나왔구나. 12호는 아직 못 찾은 거죠? 소희가 그랬는데, 연구소 폐쇄되고 애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다고만 했거든요.”
“흩어졌… 아니, 잠깐.”
“괜찮아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도와드릴게요.”
강태우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살짝 흥분해서 얼굴까지 시뻘겋게 되었다.
…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간다. 왜 날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더욱 이해가 안 가고.
가면 한번 벗어 본 적 없는 사람인데, 뭘 보고 날 그 사람이라고 여기는 거야?
그러나 강태우는 혼자서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선생님이 말한 대로 전 연구소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강태우는 아일랜드 바 위에 쥐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근데 보육원은 달라요. 혹시 꽃 보셨어요?”
“꽃?”
“봐요. 모르잖아요. 제가 뭘 찾아야 하는지 가르쳐 줄게요.”
핫초코가 담겨 있던 머그잔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강태우는 그 머그잔만큼이나 환하게 웃었다.
* * *
현재.
홍석영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말간 얼굴을 한 소년이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홍석영은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한 번 꿈틀거릴 뿐 아무 말 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다른 건 몰라도 강태우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범생의 모습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홍석영이 평범한 사람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반백 살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나이라면 열일곱 살짜리가 갓 태어난 아기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건 보편적인 감성이다. 홍석영도 인간이라면 느끼겠지.
더군다나 시범고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은가. 홍석영은 시범고 아이들에게는 무른 면이 있었다.
“그래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이참, 홍 선생님.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세요. 우리 학생이잖아요!”
…정작 강태우의 전략은 홍석영보다 김채민한테 더 먹힌 것 같지만.
“애가 그 난리를 겪었는데도 와서 말하잖아요! 칭찬은 못 해 줄망정.”
“커험. 김 선생. 이건 학교 일이 아니니까 나도 사무적으로 대할 수밖에….”
“홍 선생님이 언제 사무적이었다고 그래요?”
“…….”
홍석영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나도 직책이 있는데 이런 건 프로페셔널하게 하고 그래야….”
“태우 학생. 정보를 가르쳐 주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했지.”
보다 못해서 내가 끼어들었다.
“네? 네. 대단한 건 아닌데….”
대단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것 치곤 강태우는 꽤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그게 있으면 연계된 연구소, 그러니까 제가 있던 곳 말고 다른 연구소나 보육원이나 재단 같은 곳들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전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꽤 많이 있어요. 확실해요.”
“그래, 그래서 우리가 뭘 해 줬으면 좋겠어?”
“그냥… 별거 아닌데요. 저, 그, 그걸 찾으려면 어차피 보육원에… 가야 하거든요.”
강태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를 잠깐 들썩이다가 코를 훌쩍이길래 이미 거쳐 간 세 학생이 떠올랐다.
…우는 거 아니지?
다행히 강태우는 코만 조금 훌쩍이고 고개를 들었다.
“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어디에?”
“보육원에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저기, 태우 학생. 지금 보육원이 운영을 안 하고 중단되었거든. 거기서 생활할 수는….”
이미선이 조용히 말했다. 강태우는 화들짝 놀라 이미선을 보았다.
“네? 아뇨! 잠깐 보고 싶어서 그래요! 거기서 살겠다는 게 아니라….”
“그래?”
“하, 할 수만 있다면 챙겨 오고 싶은 물건도… 있는데.”
강태우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서늘하던 홍석영의 눈매가 풀린다. 아저씨가 저런 표정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하다.
“태우 학생, 너무 기죽어 있지 말고.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용기 내서 말해 줘 고맙네. 아침은 먹었나?”
“…아뇨.”
“그럼 밥부터 먹고, 같이 가 보자고. 알겠지?”
“……네.”
홍석영은 큼지막한 손으로 강태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아저씨 성격에 맞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