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90)
꽃 아래(3)
강태우를 따라서 보육원 복도를 걷는 동안 홍석영은 과거의 추억에 잠겼다.
홍석영이 있던 곳은 이렇게 깨끗한 시설이 아니었다. 항상 어둡고, 먼지 냄새가 나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다.
그때는 보육원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지.
그곳에 지냈던 시간보다 바깥에 있었던 시간이 더 길고, 이젠 그곳에 있었던 선생님의 얼굴마저 기억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가끔 추억에 잠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추억인가?
그건 모르겠다.
홍석영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항상 어둡고, 먼지 냄새가 나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고아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려도 옛날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홍석영은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꾸었는지 알았다.
단순히 한 사람 때문이었다. 단 한 명.
주목받는 젊은 헌터의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여성 기자.
‘잠깐….’
홍석영이 고아원을 나온 뒤로 유일하게 보았던 같은 고아원 출신의 여성.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기자치고는 너무 뻔한데. 좀 더 인상적인 멘트가 없습니까?’
‘네?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진짜 만난 적 없어요? 분명 어디서 봤는데.’
기자라는 직업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여자는 인터뷰가 끝나기 전 홍석영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홍시!’
‘…제 성이 홍씨인 건 맞습니다만.’
‘홍씨 말고, 홍시! 너 홍시잖아. 그렇지?’
가물가물한 오래된 별명. 고아원에 기부가 들어온 홍시를 먹다가 두드러기가 났던 이후로 모두가 그를 홍시라고 불렀다.
홍시 먹고 얼굴이 빨개진 놈. 홍시 먹고 토한 놈. 홍시도 제대로 못 먹는 놈.
홍시.
‘나 미미야, 미미! 나 기억 안 나?’
홍석영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빠가 사 준 인형이라며 금발 머리 외국 인형을 항상 품 안에 안고 다녔던 꼬질꼬질한 여자아이.
‘미미라고?’
그 여자아이는 입양되어서 홍석영보다 훨씬 빨리 고아원을 나갔다. 그날도 미미는 인형을 꽉 쥐고 있었다. 원장이 그 더러운 인형을 버리라고 화를 내며 억지로 빼앗아 던져 버릴 때까지.
미미는 인형을 되찾지 못하고 고아원을 나섰다. 홍석영은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인형을 안쓰럽게 보았다.
원장의 말대로 미미의 인형은 더러웠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인형을 뺏어가 가위로 머리를 자르기도 했고, 드레스에 콧물을 묻히기도 했다. 미미는 엉엉 울면서 수돗가에서 옷을 빨곤 했지만 드레스는 처음처럼 깨끗해지지 못했다. 파란색과 은색으로 반짝거리던 드레스는 제일 먼저 가짜 보석을 잃어버리고, 그다음엔 찢어지고, 끝내는 누더기가 되었다.
그래도 미미는 인형을 소중히 여겼다.
홍시는 인형을 걷어차며 놀던 아이들이 흥미를 잃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들은 금방 다른 놀잇감을 찾아 떠났다. 인형을 주워도 딱히 둘 곳이 없다는 건 그 뒤에야 깨달았다. 홍석영은 한참 고민하다가 창고 구석에 인형을 숨겼다. 이 안쪽 물건을 꺼낼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홍석영은 미미와 인형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 고아원을 도망치고, 헌터가 되고. 고아원의 일은 저 너머로 사라졌다고 여겼다.
미미가 홍시를 부르기 전까지는.
작고 더러웠던 여자아이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눈을 반짝이는 기자가 되었다.
부모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대상 없는 분노에 시달리던 남자아이는 헌터가 되었다.
그 간극이 우스워 홍석영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어어? 왜? 왜 웃어? 나 기억… 하는 거지?’
‘그래. 이제 기억나네. 못 알아보겠는데.’
‘너도 마찬가지거든!’
동갑내기 두 사람은 약 이십 년 만에 재회했다.
그리고 오 년 뒤 결혼했다.
“누나가 여기 많이 찾아봤다니까….”
이미선의 목소리가 홍석영을 깨웠다. 이미선은 미덥지 않아 하는 얼굴로 원장실 문을 열었다. 우희재가 옆에서 누나가 아니라 이모… 라고 중얼거리다가 이미선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강태우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미선을 따라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 본 곳이 있다니까요.”
“어디?”
그래도 조금 어수선하다는 느낌이던 보육원의 다른 공간과는 달리 원장실은 확실히 엉망이었다.
캐비닛은 서랍이 열린 채로 빈 공간을 내보이고 있었고, 다른 책장이나 책상도 마찬가지였다. 컴퓨터가 있었을 자리도 비어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곳을 보며 이미선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나가 심지어 천장도 열어 봤어.”
“천장이요?”
“의외로 거기가 단골이야. 거기에 뭐 숨겨 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액자 뒤는 안 봤습니까?”
“어머, 그건 진작 다 봤죠.”
이미선은 깔깔 웃으며 우희재의 팔뚝을 때렸다. 우희재는 인상을 쓰며 이미선에게서 멀어졌다.
우희재는 강태우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서 뭘 하고 싶어?”
“어….”
강태우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는 화분이 많았다. 제법 키가 큰 나무부터, 고풍스러운 화분에 있는 난, 몬스테라 같은 흔한 식물부터 이름 모를 식물까지. 창턱에도 작은 화분이 여럿 있었다.
나무 종류는 그래도 아직 푸릇푸릇했지만 꽃이 맺힌 화분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축 늘어져 있었다. 시든 것처럼 바스러진 것도 있었다.
강태우는 그런 화분 앞에 쪼그려 앉더니….
줄기를 잡고 쑥 뽑았다.
“으응?”
“아, 왜 안 빠져.”
처음에는 가볍게 흔들었지만, 곧 강태우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거의 시든 것처럼 보이는 수국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강태우가 화분을 뒤집어 들고 나서야 화분에서 떨어졌다.
툭.
흙이 바닥을 더럽혔다. 바싹 마른 뿌리는 이리저리 엉켜 있다. 그러나 묵직한 소리는 흙이 떨어져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홍석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강태우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어깨 너머로 훔쳐보자 흙 사이로 작은 수첩 하나가 보였다. 흙이 묻지 않게 지퍼 백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거요.”
강태우는 수첩을 주워 내밀었다. 홍석영은 지퍼 백을 열어 수첩을 꺼냈다.
그러고 씩 웃었다.
“아날로그. 좋은 방법이지.”
수첩 안에는 빼곡하게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휴대전화 번호가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는 보육원을 비롯하여 여러 조직들의 이름과 전화번호였다.
홍석영은 그중에 주유소도 있는 걸 보고 코웃음 쳤다. 이 작은 나라에서 열심히도 활동을 했다 싶었다. 오히려 작으니 이런 게 가능한 거일 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방주는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질 나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연구소.
우희재는 방주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고 했다. 아메리카 등지에서 활동하는 범죄의 온상지와 동북아에서 주로 움직이는 연구소.
아메리카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이쪽으로 흘러들어 온다고 치면.
‘방주에 내분이 일어났다면 그 때문일 수도 있겠군.’
자기들이 벌어들인 돈이 밑 없는 독처럼 돈만 빨아먹는 연구소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실험은 계속 실패했다고 했었지?’
아메리카 쪽에서 연구소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 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홍석영은 팔랑거리며 수첩을 살펴보다가 멀뚱히 서 있는 강태우에게 물었다.
“혹시 더 있나?”
“제가 아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래?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화분도 뒤져 보는 게 좋겠군.”
화분을 일일이 뒤집어엎었지만 수국 화분의 연락처 말고는 소득이 없었다.
“더 없구만.”
홍석영은 흙과 식물 더미로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음? 무슨 소린가. 태우 학생이 왜 사과를 해. 아주 잘해 줬어. 말해 주기 힘들었을 텐데 용기를 내 줘서 고마워.”
강태우는 그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고 웃었다. 홍석영은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강태우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너무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고. 나머지는 선생님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지, 우 선생님 수업은 어때? 그동안 열심히 들었다고 열심히 했다고 들었는데.”
“어, 네! 그, 그래도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
“벌써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한단 말이야? 각성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되었잖나.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도 좋진 않아.”
“그래도,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게… 도움이 되어서요.”
“가르쳐 준 거?”
강태우의 수업은 우희재가 맡아서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홍석영은 첫날 수업 이후로는 강태우에 대해서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우희재가 알면 그렇게 날 믿고 있냐며 어이없어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애를 데려와 놓고선 무신경하게 굴지 말라고 화를 내거나.
홍석영으로서도 자신이 너무 터무니없이 경계를 놓고 있다는 걸 안다. 이미선도 한번 지적했었다.
‘저야 우 선생님을 도울 이유가 확실하긴 한데, 홍 헌터님은 그래서는 안 되지 않나요?’
‘음.’
‘그렇게 팔짱 끼고 음. 해 봤자 안 통해요. 홍 헌터님한테도 말했지만 전 우 선생님이 갑자기 돌변해서 사람 죽이고 다닌다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면 지원해 줄 거라고요.’
조카 사랑이 이렇게나 대단하다.
‘나도 우리 애들 구해 줬으니 그럴 수도 있지!’
‘제가 아는 홍 헌터님은 그런 살가운 성격이 아닌데.’
‘사람을 뭘로 보고 있나? 나도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야.’
‘누가 뭐래요? 하지만 홍 헌터님은 공과 사 구분이 대단하잖아요. 제가 서운했던 적이 한두 번인 줄 아세요?’
이미선은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런다고 속을 줄 아나. 홍석영은 코웃음 쳤다.
‘그러는 이 헌터야말로 본인이 해야 하는 경계를 나한테 떠넘기지 말지?’
‘음.’
‘그렇게 팔짱 끼고 음. 하지 말고!’
그런 대화도 했었지.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조금씩 어라, 싶었고 확신했던 건 알렉스 호프를 막았을 때의 영상을 보고 난 뒤였다.
아마 본능이 먼저 알아차린 거겠지.
“마력 느끼는 훈련이요…. 그게 아니었으면 못 피했어요.”
강태우의 눈이 반짝 빛난다. 방금 전까지 여동생의 팔찌를 손에 쥐고 우울해하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수업이 도움이 됐다면 좋은 일이지. 앞으로도 우 선생 수업 열심히 들으렴.”
“네!”
뭐,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릴 일이 있으면 좋은 거지.
강태우는 여동생의 팔찌의 비즈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홍석영의 손에 있는 수첩을 흘깃거렸다.
“저기, 호, 홍 헌터님?”
“교장 선생님이라고 부르렴.”
우희재의 눈초리가 따갑다.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 헌터라는 호칭이 먼저 나오는 걸 부끄럽게 여기라는 눈빛이다.
홍석영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손 놓고 있긴 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수업을 봐주고 이야기도 하고 해야지. 당분간 던전 공략도 취소했고, 김 팀장에게도 호출에 응답 못 한다고 했으니 시간이야 많다.
“교, 교장 선생님?”
“그래.”
“저, 저 수첩이 있으면… 우 선생님 동생도 찾을 수 있겠죠?”
“……!”
“연구소가 폐쇄되고 애들이 다 흩어졌다고 들었거든요…. 수첩에 연구소에서 관리하던 보육원 명단도 있을 텐데…. 거기라면 선생님 동생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구나.”
홍석영은 뒤늦게 왜 우희재가 애들 곁에 남아 있으란 소리에 기분 나빠 했는지 깨달았다.
동생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는데 손 놓고 기다리고 있으란 건 너무 잔인한 이야기였다.
홍석영은 우희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서 좀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래. 우 선생님 동생을 찾을 거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