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91)
지부장의 업무(1)
이미선은 바쁘다.
그냥 바쁜 것도 아니고, 눈 돌아가게 바쁘다.
어제도 바빴고, 오늘도 바쁘고, 내일도 바쁠 예정이다. 아마 이십 년 뒤에도 바쁘지 않을까 싶었다.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한 건 본인의 의지였으니 불평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이 배은망덕한 조카가 알아주었으면 싶은 마음은 있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조카의 성취를 보기 위해 오가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겨우 얼굴을 내미는 건데, 고모의 눈물겨운 노력은 알지도 못한 채 조카는 흘겨보기 바빴다.
“아, 안 바빠? 좀 가!”
못된 녀석.
그러나 국제이능협회 사무국 특수활동부 한국지부 담당자라는 직함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이미선은 열여덟 살 조카의 반항쯤은 쉽게 무시했다. 더한 놈들의 말도 묵살하는데, 고등학생 말 정도야.
하지만 이미선은 마음씨 고운 고모였기 때문에 입을 가리며 웃으며 조카에게 다가갔다.
“가증스러운 웃음 집어치우라고!”
“고모한테 자꾸 버릇없게 굴래?”
그리고 그런 이미선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랑스러운 조카, 이승연은 똑같이 이미선을 무시했다.
“존경할 마음이 들어야 존경을 하지!”
건방진 자식.
그렇지만 이미선은 조카를 사랑하는 착한 고모이다. 예쁘고, 상냥하고, 능력 있고, 돈도 많은 그런 고모….
그래서 이미선은 몇 년 전처럼 조카의 머리를 쥐어박는 대신 말을 걸었다.
“나에 대한 존경심은 둘째 치고, 무슨 일인데? 말을 해 줘야 고모가 도와줄 거 아냐.”
“고모 도움은 필요 없어.”
“그럼 계속 방에만 있게?”
“…….”
“고모 헌터들이 너 챙겨 주니까 이러는 거야? 너네 아빠가 하던 말 기억 안 나? 아빠가 대단한 거지, 넌 조, 아무것도 아니니까 건방 떨지 말랬지?”
“욕하지 마.”
“안 했잖아.”
“하려던 거 다 들었거든.”
“하려던 거지 한 건 아니거든?”
이미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한 밥은 나가서 먹어. 방으로 가져다주는 거 기다리지 말고.”
“…….”
“수업도 듣고.”
“…….”
“선생님들이 걱정하잖아. 친구들도 그렇고.”
“…….”
평소라면 고모한테 딱 달라붙어서 조잘조잘 떠들어 댔을 애가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순순진한테는 말했나 싶어 슬쩍 물어보았지만 그 아이도 답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
“……응?”
“딱 이번 주까지만 봐줄게.”
이미선은 고민하다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일요일까지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그다음에는 안 봐줄 거야. 억지로라도 방에서 끌어낼 거니까 알아서 해.”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는 거 알잖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조카가 안쓰럽지 않은 건 아니다.
이미선은 이번엔 걱정 어린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면, 무서워서 그래?”
자기 조카한테 이런 평을 하기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가 갑작스러운 적의에 노출되는 일은 힘들었을 것이다.
우희재의 말로는 알렉스 호프가 아이들을 진심으로 상대했다면 자신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우희재는 불편한 얼굴로 말했었다.
‘장난쳤던 겁니다. 덕분에 애들을 구하긴 했지만.’
우희재는 또다시 조카를 구해 주었다. 본인은 그걸 인지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냐.”
이승연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정곡을 찔린 건지도 모르겠다.
이미선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헌터라고는 하나 제대로 공략도 해 보지 못한 조카 아닌가. 헌터 라이센스가 없었으면 상담이라도 받아 보게 했을 텐데. 아니지. 가족 주치의가 있으니 그쪽을 통해서 알아보면….
이승연은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침대 위에서 그러고 있는 게 퍽 안쓰러웠다.
“고모.”
이승연은 건조한 목소리로 이미선을 불렀다. 이미선은 살짝 움찔거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왜?”
“…걘, 괜찮아?”
“걔?”
“걔….”
조카가 누굴 말하는 건지 몰라 되묻자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해 주었다.
“전학생.”
“태우?”
“…….”
제대로 대화를 한 적은 없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같이 있었다고 걱정은 되었던 모양이다.
이미선이 아는 조카는 조금 결벽적인 면이 있었다. 한 살 어린 동생이 자신을 이끌고 도망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조카는 항상 동생을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한 살이라고는 해도 동생은 동생이지 않은가. 책임감을 느꼈겠지.
이미선은 어쩐지 조카가 대견했다.
“다행히 다친 곳도 없고 괜찮아. 우 선생님이 걔 수업해 주는 거 나도 좀 봤는데, 실력이 쑥쑥 늘더라니까?”
“…….”
“교장 선생님도 한 번씩 봐주던데, 잘 따라온다고 놀라는 거 보면 꽤 기대해도 되겠더라고.”
“됐어.”
“응?”
“됐다고. 나가.”
뭐지?
이미선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조카를 보았다.
이승연은 여전히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채로 딱딱하게 말했다.
“나가라고.”
“이승연! 고모한테 말이 그게 뭐야!”
“일요일까지는 봐준다며.”
“그게 고모한테 버릇없이 구는 걸 봐준다는 건 아니거든?”
“나가!”
이승연이 언성을 높였다.
가끔 조카를 놀리다 보면 목소리가 커질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다. 이승연의 목소리에도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그래서 이미선도 마음껏 조카와 놀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그런 장난이 아니라….
“나가!!!”
이승연이 고개를 들어 이미선을 노려보았다.
이미선은 조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내렸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 * *
임시로나마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건 적어도 몸은 편한 일이었다.
공터에 있는 컨테이너 세 개는 솔직히 끔찍하게 불편했다. 수업이야 어찌어찌하면 되지만 1년 365일 내내 휴일도 없이 굴러가는 이미선에게는 업무를 볼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SUV에 앉아서 전화로 보고를 듣고, 노트북을 확인하며, 전산으로 옮길 수 없는 중요한 정보를 직접 실어 나르는 부하들 하며…. 보안을 고려하면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형편없었다.
최소한 이곳엔 서재가 있다. 몇 가지 보안 업데이트를 하면 이미선이 임시로마나 업무를 처리할 공간이 마련된다.
“시범고로 언제 돌아갑니까?”
이미선이 늘 데리고 다니는 헌터 중 하나가 보고를 끝마치고 슬쩍 물었다.
“왜?”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 놓게요.”
“가기 싫어?”
“솔직히 지부장님도 불편하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거기서 만족하던 건 유건이 저놈밖에 없을 겁니다.”
“아, 형님. 전 왜요.”
“저놈은 헌터가 아니라 어디 카페에서 알바를 했어야 하는 놈이라고요.”
“왜 알바입니까? 하다못해 사장이라도 시켜 주세요.”
지유건이 투덜거리자 최대현은 코웃음 쳤다.
“넌 인마, 사장할 깜냥도 안 돼.”
헌터들이 투덕거리는 걸 보던 이미선은 머릿속으로 일정을 계산했다.
“홍 헌터님이 이 기회에 건물 짓자고 했으니까…. 그거 다 지을 때까진 여기 있지 않을까?”
“진짜 짓습니까?”
“그럼 저 카페테리아도 지어 주면 안 됩니까?”
“너 아예 거기 취직하지 그러냐.”
“애들 먹이는 거에 그렇게 인색하게 굴면 안 됩니다, 형님.”
“네 취미 생활 하는 데 애들 끌어들이지나 마!”
이미선은 손가락을 튕겼다. 지유건과 최대현이 자세를 바로 했다.
“얘들아. 누나 지금 생각하고 있잖니.”
“넵.”
“예.”
“…교사 휴게실도 만들어야 할 테니, 은근슬쩍 이사장실을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좋죠.”
“솔직히 지부장님이 절반 이상 자금을 대고 있지 않습니까. 동상도 하나 놓죠.”
“유건아.”
“네, 지부장님.”
“가서 커피나 가져오렴. 아이스로.”
“넵.”
지유건을 밖으로 쫓아낸 이미선은 엊그제 완성된 시범고 도면을 확인했다. 아직 학생이 열 명도 되지 않으니 학교라고 하기에도 여전히 귀여운 수준이다. 그래도 증축을 고려해서 건물을 배치했으니 시범고가 본격적으로 운영이 되면….
고등학교로 정식으로 인정받는 건 올해가 끝나기 전에 진행된다. 내년 신입생 모집하는 게 걱정이긴 하지만, 초반 몇 년은 추천제로 운영하면 지금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유지은이 있지 않은가? 최소 한 명은 이미 확보가 되었다.
지금 있는 아이들 중 그만두는 애가 더 나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초반에 그만둔 아이가 있는 게 꽤 치명적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게 한다니?
실습차 나간 길드에서 관리 태만으로 던전 등급을 잘못 매기고, 하필이면 그 던전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리고 홍석영은 던전 보스를 잡고 있었다!
…짜증을 내 봤자 바뀌는 건 없다. 이미선은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미래를 봐야지. 암, 과거보다는 미래를 더 생각하자.
“지부장님. 여기 커피 가져왔습니다.”
지유건은 공손하게 커피를 바쳤다.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커피를 단번에 반 이상 비우고 나서야 이미선은 머리를 식혔다.
자, 해야 할 일은 산더미같이 남아 있다.
시범고는 나중에 해도 된다. 급한 일은 따로 있다.
“수첩에 있는 연락처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강태우의 협조로 찾은 원장의 수첩.
당연히 그 조사 업무도 이미선에게 넘어왔다.
“생각보다 속도가 더딥니다. 그 번호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을 다 조사하고 있다 보니….”
“그래도 한 명도 놓치면 안 돼.”
“당연하죠. 저도 압니다, 지부장님.”
이미선은 커피 잔에 꽂힌 빨대를 휘저었다.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보육원 쪽은? 내가 거길 우선시하랬잖아.”
“네. 거기도 조사하고 있는 중인데… 우 선생님이 말해 준 이름의 아이는 없어서 말입니다.”
“그 이름을 그대로 썼다면 진작 찾고도 남았어.”
“그렇죠. 그래서 그냥 보육원에 있는 아동들을 다 조사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 리스트를 만들면 우 선생님이 확인해 보고 말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손은 많이 가지만 제일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그러나 최대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왜? 뭐 문제 있어?”
“저, 그게 말입니다. 저도 아침에 보고를 받았는데….”
“받았는데?”
이렇게 뜸을 들이며 나오는 소식은 보통 좋지 못한 일이었다.
“…사망자가 있는 보육원이 있습니다.”
“사망자?”
이미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네.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려서…. 적으면 두세 명, 많으면 거의 전멸 수준으로 죽었습니다.”
“…….”
“사망자에는 공통적으로 보육원 원장이 포함되어 있고요”
“…젠장.”
“예. 젠장입니다.”
“그놈 짓인가? 알렉스 호프? 왜 죽었는지 찾을 수 있어?”
“아뇨. 자료가 없습니다.”
“…현장이 남아 있는 곳은?”
“없습니다.”
“제에길, 이래서 던전 브레이크 업무를 따로 분리해야 한다니까. 던전 브레이크가 허구한 날 일어나는 데 왜 안 하는 거야? 미국처럼 각성자 범죄랑 던전 관리랑 다 따로 구분하면 좋잖아!”
이미선은 머리를 헤집었다.
“…설마 우 선생님 동생도 죽은 건 아니겠지?”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죽은 애들도 확인해.”
“우 선생님 동생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선은 속이 타는 듯 연신 커피를 들이켰다.
“그래도 알려 줘야지, 어쩌겠어.”
설사 죽었더라도 가족이라면 그 소식까지 알고 싶을 것이다.
이미선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최악의 상황만 피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