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95)
어썸 룬(3)
눈을 감으면 꽃이 보인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이다. 빛 한 점 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곳에 꽃이 피어 있다.
가지가 얽히고 얽혀 서로를 지지한다. 복잡하게 뒤엉킨 넝쿨은 커다란 아치 모양으로 자랐다. 푸른 잎사귀는 생기를 잔뜩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으며,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큼지막한 꽃은 하염없이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붉은 꽃잎은 눈처럼 휘날렸지만, 꽃이 지는 법은 없었다. 푸른 잎도 그대로였고,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에 시간마저 멈추게 한 우뚝 선 장미 아치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김채민은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생생하던 장미 아치는 사라졌다.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장미 아치가 어른거리다가 겨우 잔상을 없앴다. 마법사란. 귀찮기도 하지.
건조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려다가, 탁상에 올려 둔 인공 눈물이 기억났다. 김채민은 손을 뻗어 인공 눈물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시계가 떨어졌지만 다시 주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인공 눈물을 넣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촉촉해진 눈을 감고 잠시 잠기운을 쫓아내던 김채민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끄응.”
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 피부 아래가 간질거린다.
단순히 신체가 간지러운 감각과는 다르다.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다.
원인이야 알고 있다. 지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까지.
김채민은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이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법사란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영역 동물이다. 반 평만 한 공간이라도 좋다. 자기 한 몸 들어갈 정도의 넓이라면 충분하다. 그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한 다음 마력을 채워 넣는다. 주인 허락 없이 영역에 들어가는 행위는 자살이나 다름없다.
김채민은 욕실에 들어가며 자신의 영역을 떠올렸다.
싱그러운 흙냄새와 달콤한 꽃향기.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푸른 식물이 보이는 곳.
욕조에 뜨거운 물을 채우며 인상을 찌푸렸다.
영역이 없다고 해서 문제 되는 건 없다. 그냥 사람이 조금 예민해지고 성질이 급해질 뿐이다. 특히 다른 마법사에 비해 성격이 무딘 편인 김채민은 영역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편이었다. 있으면 당연히 좋지.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가꾼 공간인데 사랑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풀 냄새 잔뜩 맡으며 책 한 권 읽으면 지상 낙원이 따로 없다.
욕조에 물이 찰랑거리기 시작하자 김채민은 곧바로 잠옷 바지를 걷어 올리고 발을 담갔다. 욕조에 걸터앉아 발을 첨벙거리고 있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영역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김채민이 이렇게까지 영향을 받는 이유는 있다.
이 별장이 이미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아니니 영역이라고 하면 안 되려나.’
그렇지만 여긴 이미선의 가족 별장이다. 영역 동물로서의 마법사의 본능은 이곳이 다른 무리의 거주지라고 울어 대고 있었다. 마법사는 이리도 귀찮은 동물이다.
다른 이의 영역에 들어와 있으니 이성은 안전하다고 여겨도 본능은 경계를 한다. 결국 지난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한 덕분에 온몸이 뻐근하다.
김채민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어린 두 마법사를 떠올렸다. 성취가 빠르긴 하지만 아직 마법사로서는 갓 걸음마를 뗀 정도다. 영역 선포를 가르치려면 멀었다.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다. 다른 무리의 영역에서 영역에 대한 개념을 깨우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
발만 담근 채 욕조에 한참을 앉아 있던 김채민은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준비를 해야 한다.
“좋아! 기운 내자!”
몸이 처질수록 움직여야 하는 법. 김채민은 힘차게 일어나 욕조에서 나가기 위해 발을 들어 올렸다.
기우뚱.
“어?”
대마법사라고 해도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는 없다.
콰당!
“…아, 진짜!”
김채민은 욕조 안에 넘어진 채로 눈을 꿈뻑였다. 아프진 않다. 아프진 않지만….
“되는 일이 없어!”
축축하게 젖은 잠옷이 기분 나쁘다. 김채민은 욕조 안에서 버둥거리다가 포기했다.
“…….”
어쩌겠나. 자기 몸 책임지는 건 자신뿐이다.
일이라도 하면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겠지.
김채민은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씻고 얼른 나가자. 선생님이 지각할 순 없지.
어느덧 훌륭한 교사의 마음가짐이 되었다.
* * *
“…네?”
되는 일이 없다.
“오늘은 제가 수업한다고요.”
“왜요?”
“…제가 하면 안 됩니까?”
우희재는 몸을 풀다 말고 김채민을 보았다. 김채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되는 게 아니라…! 태우, 태우 학생은요? 태우 학생은 우 선생님이 맡기로 했잖아요!”
“앞으로 제가 계속 맡을 생각은 없는데요. 지은 학생도 있으니까 오늘 그 두 명은 홍 선생님이 맡을 겁니다.”
김채민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홍 선생님이요? 애들 기죽일 일 있어요?”
“현직 헌터의 벽을 느껴 보라는 겁니다. 던전 공략한 이야기도 좀 해 주고…. 강태우가 아직도 홍 선생님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친해져야죠.”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래도 김채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우 선생님은 마법사들 데리고 뭐 하려고요? 새로운 룬?”
룬 그리기라면 자신도 참여할 수 있다.
“뭐하기는요.”
그러나 우희재는 목검을 들었다.
“두드려 패야죠. 그 두 학생 속성이 불 같은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마법을 써도 정원에 크게 피해가 안 가지 않습니까?”
마침 정원으로 나오던 십 대 마법사 두 명이 자신들의 미래를 느꼈는지 몸을 떨었다.
결국 김채민은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수업하면 안 될까요?”
“왜요?”
“제가 하면 안 돼요?”
조금 전 했던 대화가 주체만 바뀐 채 똑같이 나왔다.
“뭐… 정 하고 싶으면 오후 수업하세요.”
“윽. 오후 수업만요?”
“저도 애들 성취도를 평가해야 할 거 아닙니까.”
김채민은 눈을 살짝 내려 우희재가 쥐고 있는 목검을 보았다.
“그걸로요?”
“저 이래 봬도 마법반 담임입니다.”
“…근접반 담임도 따로 있나요?”
“김 선생님이 하실래요?”
“…….”
결국 김채민이 뒤로 물러나고, 우희재는 박서현과 최진우를 불렀다.
그리고 어떻게 됐냐 하면.
“…마법만 쓰라고 했지!”
“어떻게 마법만 써요!!”
“너넨 마법사라고!”
고성이 오간다. 고성이라고 하면 미안하지. 우희재는 어디까지나 친절하게 타이를 뿐이라고 주장할 테고, 두 학생은 살기 위한 발악일 뿐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마법사라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캐스팅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근접전을 하는 헌터만큼은 아니어도 몸을 쓸 줄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희재는 두 어린 마법사에게 제한을 걸었다. 공격을 피하는 건 된다. 하지만 방어와 공격은 오로지 마법만 사용한다.
홍석영과 오래 훈련을 해서 그런지 박서현과 최진우는 마법사치고는 주먹이 빨랐다. 김채민이 보기에는 우희재도 그걸 심화시키면 시켰지, 완화하지는 않았다. 다른 애들과 차이를 두지 않고 공평하게 굴리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뭐… 못 싸우는 것보단 낫지.’
정원이 번쩍거린다. 김채민은 정원의 돌계단에 앉은 채 박서현의 그림자 마법과 최진우의 빛 마법을 감상했다. 상성이 안 좋은 두 마법사에게 동시에 덤벼들라고 하다니. 난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닌가?
박서현이 그림자를 움직여 우희재를 감싸는 돔을 세웠다. 최진우는 작은 빛의 공을 손안에 만들어 내더니 볼링공처럼 우희재를 향해 굴렸다. 돔이 닫히기 직전 김채민은 빛의 공이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돔이 녹아내렸지만… 작전은 괜찮은데.
“방금 건 괜찮았다.”
우희재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가볍게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나 박서현은 멀쩡히 걸어 나오는 우희재에 자존심이 퍽 상했는지 이를 악물었다.
김채민도 본 걸 우희재가 못 봤을 리 없다. 우희재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성격 나빠 보이는 웃음.
“나한테 한 방 먹이고 싶어? 아직 십 년은 일러.”
그림자가 짓밟혔다. 우희재의 발아래서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단순히 그림자 속에 숨기는 게 아니라 그림자를 늘리는 것 자체는 괜찮은 전략이야. 하지만 그러려면 계산을 잘해야지. 너무 생뚱맞은 곳에 있으면 다 티 나잖아.”
우희재의 말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이 방법을 쓸 거면 최진우, 네가 광원을 늘려. 크리스마스 전등처럼 반짝거리면 박서현의 그림자도 숨겨지겠지. 실내면 효과가 더 좋을 거야. 여긴 바깥이라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광원이 있으니까.”
우희재의 손이 하늘을 가리켰다.
“흐음….”
우희재는 그거 말고도 몇 가지 더 전략적인 조언을 해 줬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채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애들은 다선의 헌터가 놀아 주고 있어 자신이 낄 틈이 없으니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영 입맛이 없어 아침을 걸렀더니 정신이 든 지금에야 배가 고파 왔다.
김채민은 별장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선에서 분명 밥을 해 놓은 게 있…
“으앗!”
“아야야. 어머, 김 선생님. 괜찮으세요?”
문을 열자마자 이미선과 부딪쳤다.
자신이야 컨디션이 별로이니 그럴 수 있지만, 이미선은 도대체 뭘 하느라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가.
김채민은 부딪친 어깨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 헌터. 무슨 일 있어요?”
이미선이 여기서 다소 편안하게 하고 있는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편안하게, 이지 흐트러졌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선이 어떤가. 블라우스의 단추를 두 개 푸르고, 단정하게 정리했던 머리도 엉켜 있다. 혹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나 싶어 얼굴을 살폈지만 다행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이미선은 한 손에 파일을 구겨질 듯 들고 있었다.
“급한 일이라도?”
“네? 네! 급한 일이긴 한데, 좋은 소식이에요!”
“좋은 소식요?”
이미선은 환하게 웃었다. 이 헌터가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이미선은 자신이 쥐고 있던 파일을 펼쳤다.
“우 선생님 동생을 찾았어요!!”
* * *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까만 머리카락. 한껏 찌푸린 이마. 살짝 내리깐 눈. 혈색 좋은 뺨과 오뚝한 콧날. 쭉 내민 입술.
“보는 순간 알았어요.”
이미선은 사진을 펼쳐 두고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며칠 동안 조사한 거 다 폐기 처분 했어요. 얘가 우 선생님 동생이 아닐 수가 없다구요!”
그랬다.
김채민도 사진을 보는 순간 납득했다. 그야말로 우희재의 축소판이 거기에 있는데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름은요?”
“박정민. 11세. 이름과 나이가 둘 다 달라요. 혹시 몰라서 비슷한 나이대 애들을 찾아보라고 해서 찾았지, 그냥 넘겼으면 어쩔 뻔했어요?”
“어이고, 진짜 빼다 박았구만.”
홍석영은 사진을 들어 올려 우희재와 비교했다. 찌푸린 얼굴마저 똑같다.
“그래서 얜 어디 있다고?”
“대전이요.”
“가깝잖아?”
홍석영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건 다 미뤄 두고, 우 선생 동생부터 데리고 오지.”
“…아뇨, 저. 그, 걔가 있는 보육원은. 괜찮습니까? 방주와 관련이 있을 텐데. 다른 아이들은요?”
“그 와중에 다른 아이들도 걱정돼? 알렉스 호프가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아이들도 보호할 생각이긴 했어. 이 헌터가 준비한다고 했었는데…. 근데 그건 대놓고 움직이면 오히려 티가 나니까 잠깐 미루고.”
“…네? 미룬다고요?”
“오늘은 자네 동생만 슬쩍 빼 올 거야. 다른 말로는 납치라고도 하지.”
“네?”
“자, 얼른 가자고!”
홍석영은 우희재를 억지로 일으켜 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
“…홍 헌터님이 더 흥분하셨네.”
“…….”
“김 선생님? 왜 그러세요?”
“아뇨…….”
김채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흔들었다. 동생 소식에도 불구하고 우희재가 썩 기뻐 보이진 않는데.
착각이겠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