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98)
스노우볼(3)
“잘 들어, 이록아.”
흘러내리는 우이록을 추슬렀다.
젠장. 입에 영 안 붙는다. 우이록? 우이록이라니. 내가 얼마 만에 떠올려 본 이름이던가.
육성으로 내뱉어 본 적도 거의 없다. 아니, 이게 처음인가? 연구소 내에서는 당연히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밖으로 나오고 난 뒤로는 형의 이름으로만 불렸다. 내 친부모는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실험체에게 출생 신고를 해 줄 만큼 친절한 성격이 아니다. 출생 신고를 해 봤자 폐기되면 귀찮은 일만 생기지 않는가.
내가 우희재로 살 수 있었던 까닭도 그 덕분이다. 연구소에서 자랐다는 신원이 불분명한 어린애. 심지어 한두 명이 아니다.
납치되었던 아이들이야 문제없지. 실종 신고가 되어 있으니 병원에서 눈물겨운 상봉을 끝내면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이름이 무엇인지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번호를 대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
그중에서 비록 신원은 없지만 그나마 자기 이름이라고 뭐라도 댈 줄 아는 애가 하나 있다면.
그럼… 어떻게 됐겠는가.
내 앞으로 된 모든 서류는 우희재라는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병원에 있을 때 이미 의사와 간호사는 나를 우희재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퇴원하기 전 그 이름이 공식화되었다. 보육원으로 이동하기 전 나는 이미 우희재가 되었다.
그 뒤로 나는 계속해서 우희재였다.
홍석영의 아들 우희재. 각성자 등록도, 주민등록증도, 헌터 라이센스도, 하다못해 운전 면허증까지도.
나는 우희재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이루었다.
약 이십 년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형은 찾아오지 않았다.
“형?”
우이록이 고개를 슬쩍 들어서 나를 본다.
신뢰로 가득한 눈.
얜 왜 아무런 의심 없이 날 자기 형으로 받아들였지? 내가 이렇게 생각이 없었나?
하긴, 형과 자신 둘밖에 모르는 이름을 냉큼 부르고 있는데 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힘들겠지.
“형? 왜 말을 하다 말아?”
…동생이 죽었다고 해야 했다.
동생을 구출하는 게 아니라, 죽은 동생의 복수를 위해 평생 따라온 조직을 배신한 남자. 이쪽이 더 그럴싸하지 않나?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해도 복수에 눈이 멀었구나, 했을 텐데.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더라도 나중에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발견되면 곤란할 거다. 얜 누가 봐도 나처럼 생겼다. 이미선도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확신하지 않았던가. 내 동생이라고.
“형!”
우이록은 주먹으로 내 어깨를 쳤다.
…힘이 묵직하게 실린 게 아팠다. 뭐지, 이 새끼? 내가 각성한 시기가 내가 알던 것보다 일렀나?
“형!!”
어쨌든 우이록이 다시 나를 치기 전에 대답했다.
“음.”
“왜 불러 놓고 말을 안 해!”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엉엉 울던 애가 지금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퉁퉁 부은 눈과 아직도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울었다고는 생각도 못 했을 거다.
나지만 정말 귀염성 없다. 아버지는 용케 이런 애를 키웠다. 어떻게 키웠지?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까 내가 얠 키워야 하는 거 맞지? 어떻게 키우지?
무심코 팔에 힘을 풀고 떨어뜨리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필사적… 사실 필사적으로 찾진 않았다. 대충이나마 찾으려고 했던 동생이잖은가. 아껴 줘야지.
“아… 그래. 잘 들어, 이록아.”
“듣고 있거든.”
버릇없는 새끼.
이게 다 형이 오냐오냐 키워서 그렇다. 나도 안다. 친부모는 귀하신 실험체가 다치는 게 겁나서 연구에 방해가 안 되는 선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었다. 그래서 형도 내게 얼굴을 보여 줬다며 거하게 깨지고서도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나도 그걸 알아서 먹으라는 약은 꼬박꼬박 잘 먹었다.
모친이 연구소장이 된 이후로는 더 심해졌지. 특별관리 대상인 나는 다른 연구원들은 못 건드렸거든. 그래서 친부모가 모두 죽고, 그 뒤에 소장 자리에 오른 남자는 날 싫어했다. 이해는 한다. 나 때문에 당한 게 많긴 했지.
어쨌든 이 버릇없는 애새끼는 내 책임이 되었다. 다행인 건 얜 내가 지 형인 줄 알고 있는 거다. 버릇이 없긴 해도 형 말은 잘 들었으니까… 잘 들었지?
자꾸 누워서 침 뱉는 꼴이 되기는 하는데, 어쩌겠나.
“형! 자꾸 불러 놓고 딴생각하지 마.”
“음….”
기억을 되살린다. 너무 옛날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래도 기억하고 있는 형의 말투를 최대한 흉내 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니?”
“형이 했던 말?”
우이록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시기 우이록이 가장 신경 쓰고 있던 형의 말이 무엇일까.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으니까 내가 범위를 좁혀 주자.
“왜, 연구소에서….”
“…도와준다고 했던 사람?”
“기억하지?”
우이록은 잠깐 내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응?”
“형이 말한 그 사람 순 사기꾼 아냐?”
“…사기꾼?”
얜 또 왜 이래.
“형, 금방… 금방 온다고 했었잖아.”
우이록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근데, 이제, 이, 이제 온 거 보면, 그 사람이… 형을 속여서….”
내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옛날이라니까. 난 지나간 과거 따윈 돌아보지 않는다. 특히 이 시기의 일은.
그렇지만 얘가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 곤란하다. 우린 이미선 펜션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는 급하게 우이록의 말을 막았다.
“아니, 그건 아냐.”
“아냐?”
“…일이 꼬인 건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건 아냐.”
우이록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나를 살폈다.
“그 사람이 날 배신했으면 내가 지금 이록이, 널 데리러 올 수 있었겠어?”
우이록은 가만히 내 얼굴을 보았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 말에 납득했는지 주름졌던 미간이 조금 풀렸다.
“그럼 무슨 말 하려구?”
“지금….”
이번에는 내가 미간을 좁혔다.
“이 앞에 형을 도와준 사람들이 같이 와 있거든.”
“앞?”
“보육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우이록은 꽤 놀랐는지 몸을 뒤척였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건 내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보기 힘들었다.
원래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는 속설도 있지 않았나. 괜히 기분이 찝찝해졌다. 이건 도플갱어 수준도 아니고 나 자신인데.
“혹시 모르니까 형이 없는 데서 절대 연구소 얘기 하면 안 돼.”
빈말로라도 나는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으니 최소한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말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엄마와 아빠에 대해서도.”
“응.”
다행히 우이록은 별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
“저기서 가져와야 할 물건 있어?”
나는 보육원 건물을 가리켰다. 우이록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다정한 큰형이라면 물어볼 것 같아서 물어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자.”
“바로?”
“응. 이제 우린 도망치는 거야.”
“도망?”
“정확히는 내가 이록이를 납치하는 거지.”
“납치?”
“연구소 사람들 눈을 피해야 하거든. 그래서 몰래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이해했어?”
“응.”
“좋아. 그럼 가자. 꽉 잡고 있어.”
우이록을 붙잡고 있는 팔에 힘을 줬다.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과 나무가 타인의 시선을 가린다. 담은 그렇게 높지 않다. 아까 넘어온 것처럼 단번에 넘는다. 그래도 아이가 있으니 천천히 넘는 게 나으려나.
아니다. 난 그렇게 심약하진 않았다.
“아, 그리고 이록아.”
“응?”
“한동안 우리가 지낼 곳에 3호도 있어. 3호 기억하지?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해.”
“삼, 뭐? 형, 잠깐…!”
우이록이 버둥거리기 전에 훌쩍 담을 뛰어넘었다. 순간적으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화려한 동작도 넣었다. 일부러 공중에서 몇 바퀴 돌아서 담 너머에 떨어지니 품속에 있는 아이가 조용했다.
…기절했나? 연구소에서 워낙 곱게 커서 이런 격한 움직임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긴 하지. 3호와 관련해서 귀찮게 굴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귀찮은 일이 벌어질 텐데 딱 5분 만이라도 최후의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래도 애를 확인했다. 홍석영과 이미선이 기절한 아이를 보면 즐거워할 것 같진 않았다.
“이록아?”
“…….”
다행히 아이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긴 했지만.
“우이록?”
“…와! 형, 형. 아까 그거 또 해 주면 안 돼?”
“…….”
걱정 없겠군.
* * *
“어머, 어쩜 좋아. 우 선생님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다, 너! 사진으로 봤을 때도 딱 감이 왔다니까?”
돌아가는 길.
이번에 조수석에 앉은 건 이미선이다. 이미선은 뒷자리에 앉아 있는 우이록이 신기한지 아예 몸을 돌려 의자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보고 있었다.
우이록은 그런 이미선을 피해 내 옆구리에 딱 달라붙었다.
불행히 그 모습이 이미선한테는 더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지만. 보다 못한 내가 이미선에게 한마디 했다.
“안전벨트 매고 똑바로 앉으세요. 사고 납니다.”
“안 다치니까 괜찮아요.”
“다선의 길드 마스터와 홍석영 헌터가 안전벨트도 안 매고 사고 났다고 하면 언론이 참 좋아하겠습니다.”
“홍 헌터님이 운전 제대로 하면 사고 날 일이 왜 있겠어요?”
“사고는 이쪽에서 조심한다고 안 나는 게 아니니까요. 두 사람 다 똑바로 앉으세요.”
홍석영이 억울한 듯 끼어들었다.
“난 제대로 하고 있네. 난 빼 줘.”
“연대 책임 모릅니까?”
“아, 알았어요, 알았어!”
이미선이 몸서리치며 몸을 바로 했다.
그래도 우이록은 내 옆구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얘가 편하게 있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긴 하지.
아까 이 길을 지나갔을 때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싫었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유난이었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사람은 살아진다. 내가 과거로 와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어쨌든 내가 우이록이란 이름으로 살아간 시간보다 형의 이름으로 살아간 시간이 더 길다. 솔직히 우이록이라고 불린 시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렇게 흔들려서는 안 됐다.
내 경험이 부족하다는 말이겠지. 유지은이 알았으면 틀림없이 비웃었을 거다. 그러게 누가 책상에만 앉아 있으라고 했냐, 그러니 그렇게 나약한 정신머리가 된 거 아니냐.
짜증 나는 아줌마 같으니라고. 어렸을 때처럼 순진해 빠졌으면… 그건 그것대로 짜증 났겠지만.
가만히 우이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동생을 찾아 애틋한 형처럼 보이길 바라면서.
이미선은 내 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뒷좌석을 연신 흘깃거렸고, 홍석영도 아닌 척 훔쳐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치 빠른 꼬마애, 우이록 또한 그 시선을 알고 어깨를 흠칫거렸다.
“…….”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은 내 앞날처럼 어두워지고만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