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e World and Retire RAW novel - Chapter (99)
스노우볼(4)
“필요한 물건은 애들 시켜서 대충 채워 놨는데…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줘요.”
펜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다.
차가 밀렸던 까닭도 있지만, 덕분에 홍석영이 애를 굶길 순 없다며 길가에 있는 낡은 식당에서 대충 밥을 먹자고 했기 때문도 있었다.
우이록은 여전히 두 사람을 경계하긴 했지만 돼지국밥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오히려 내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이구, 잘 먹네.”
홍석영은 흐뭇한 얼굴로 우이록을 보았다. 우이록은 멀뚱히 홍석영을 보다가 국밥에 얼굴을 파묻었다.
“더 먹을래?”
까탈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선짓국을 깔끔하게 비운 이미선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우이록에게 물었다.
우이록의 반응은 홍석영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우이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미선을 노려보다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우이록에게 날카롭게 한마디 할까 하다가 이미선을 보고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연구소에서 우이록을 담당했던 연구원들은 대부분 여성 연구원이었다. 이 당시 나는 남자 어른보다 여자 어른에게 더 적대적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직 말해 주지 못했지만 이미선은 관대하게 웃어넘겼다. 심지어 펜션에 도착하고 나서는 아직 깨어 있는 시범고 아이들의 눈을 피하는 경로로 방으로 안내까지 해 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말과 함께.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미선에게 손짓했다.
“왜요?”
“태우 학생 좀 먼저 불러 주겠습니까?”
“태우요?”
“아는 얼굴이니까 미리 인사시키게요.”
혹시라도 우이록이 다른 아이들 앞에서 강태우를 3호라고 부르면 곤란하다. 내가 3호에게 가진 몇 가지 유감스러운 감정과 강태우에게 가지고 있는 몇몇 안쓰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런 민감한 정보를 부주의하게 공개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내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동생으로 우이록을 대하려고 해도, 저 녀석은 기본적으로 나 자신이다. 작은 나. 미니미. 이십 년도 더 된 어린 시절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게 끔찍하기는 한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옛날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감안하더라도 미니미를 가장 잘 아는 건 나다. 수틀리면 거리낌 없어질 거란 것도.
이런 나의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선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도 아는 얼굴이 있으면 적응하기 쉽겠네요.”
모르는 게 맞다.
“금방 불러올게요.”
이미선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적대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미니미한테 친근히 손을 흔들며.
“여긴 어디야?”
이미선이 일부러 내는 게 틀림없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미니미가 다시 인상을 썼다.
“임시 숙소.”
“임시 숙소?”
얜 알렉스 호프한테 감사히 여겨야 한다. 아니었으면 싸구려 여관에서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홍석영은 아이에게 약한 면이 있으니, 얠 데려오면 숙소 등급을 업그레이드시켜 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래 봤자 다연의 별장만 할까.
“형이… 학교 같은 곳에서 일하거든.”
“학교?”
“일종의 특수학교야.”
“왜 학교에서 일해?”
“…….”
미니미에게 간단하게 상황 설명은 해 주는 편이 좋겠지. 납득하지 않으면 내 말에 따라 주지 않을 거다. 손 많이 가는 녀석.
난 왜 좀 더 착하고 얌전하게 굴지 못했을까?
“아까 일이 꼬였다고 했었지?”
“응.”
“원래는 널 먼저 빼내려고 했는데… 처음에 도와주기로 했던 사람이 발각되는 바람에 이래저래 일이 복잡하게 되었거든.”
김 군은 죽었다.
“나도 위험해져서 너까지 말려들까 봐 어쩔 수 없이 연구소를 나왔어야 했어.”
높은 확률로 김 군을 돕던 원래의 내부 고발자도 죽었다.
홍석영도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내가 얼기설기 대충 끼워서 맞춰도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바깥과 접촉하고… 다시 널 데리러 갈 수 있을 만큼 여력이 생겼을 땐, 연구소가 옮겨지고 난 뒤였어.”
텅 빈 수련원을 생각했다. 그만한 규모를 알뜰살뜰 잘도 옮겼다. 아직도 이미선이 그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을 만큼. 내부에서 건질 만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날 못 찾았던 거야?”
“응. 최근에야 겨우 단서를 찾았지. 그동안 연구소에서 의심하지 않도록 신분을 위장해야 했었는데, 그게 학교 선생님이야.”
“…….”
미니미는 인상을 더 찌푸렸다. 못생긴 불독처럼 보였다.
…난 아니고. 쟤랑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잖아. 그렇지?
“무슨 학교인데?”
“헌터 양성 시범 고등학교라고… 각성자 훈련시키는 학교야.”
“…각성자?”
미니미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조그만 게 생각하는 척하고는. 같잖다.
“그럼 3호는 뭐야?”
“여기 학생.”
“…….”
조금 펴지려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진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저 시절의 나는 3호를 더 싫어했나? 음. 3호가 잘 버텨 내길 바란다.
“왜?”
“너 찾으려고 단서를 쫓다가… 3호를 발견했거든. 연구소에 있는 아이들이 옮겨진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데려왔어.”
“걘 모범생이잖아. 형을 도울 리가 없다고.”
도왔다.
그 사이에 몇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보육원 습격이 있고 났을 때는 여동생이 죽은 것 때문인지 다소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런 것도 없어졌다. 가끔 우울한 기색을 보이긴 해도 연구소 시절의 착한 3호에 더 가까웠다. 조용하고, 가끔 수줍게 웃고, 어른들 말 잘 듣는.
습격이니 뭐니 하는 건 애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아 보여서 그냥 짧게 설명했다.
“아니, 도왔어.”
너무 짧았나.
미니미가 으르렁거리는 걸 보고 나는 덧붙였다.
“다른 이유가 있긴 했지만 3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어. 널 찾을 수 있던 건.”
“…….”
“그러니까 잘 대해 줘. 알았지? 형은 이록이를 믿어.”
“…….”
“그리고 여기 학교라고 했잖아. 다른 형, 누나들도 있어. 연구소 이야기는 하면 안 돼.”
“…….”
갑자기 미니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씨발, 진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머리를 마구 헤집다가 침대에 걸터앉은 미니미 옆에 앉았다. 손을 뻗어 어깨를 감싸자 힘없이 끌려와 내 허리를 껴안았다.
“지금 정신없는 거 형도 잘 알아. 형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더 자세하게 설명 못 해 줘서 미안해.”
“…….”
“그래도 형이 이록이한테 안 좋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형 믿지?”
“…응.”
“아까 같이 있던 아줌마 있지?”
“응.”
“그 아줌마가 형 많이 도와줬어. 이록이 이름으로 학교도 갈 수 있게… 혹시 보육원에 있을 때 어떻게 지냈어?”
“…그냥, 계속 보육원에 있었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학교나 뭐, 이런 건 안 가고?”
“딱히? 그 사람들이 그런 데 보내 줄 리가 없잖아.”
미니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던 연구소와 달리 보육원은 바깥과 연결되어 있다. 보육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봉사자나 뭐, 이런저런 외부 사람들도 많이 오갈 거 아닌가. 뭣보다 열 살짜리 애가 학교도 안 가고 보육원에 있으면 의심을 살 게 분명하다.
보육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이미선에게 제대로 확인하라고 하자.
“그래…. 어쨌든 그 아줌마가 학교도 갈 수 있게 도와줄 거야. 당장은 힘들지만 형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면 갈 수 있어.”
“…진짜?”
“형이 약속 어기는 거 봤어?”
“……아니.”
“형은 이록이와 한 약속 꼭 지켜.”
어느새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미니미의 등을 토닥였다.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게 보였다. 피곤할 만하지. 이미선에게 강태우를 괜히 불러오라고 했나. 내일 아침에 인사해도 될 것 같긴 한데.
문득 고개를 드니 방 한쪽에 쌓여 있는 쇼핑백들이 보였다. 아동복들.
…보호자라면 애를 씻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히겠지?
“이록아. 피곤한 건 알지만 지금 자지 말고, 옷부터 갈아입자.”
닳아빠진 청바지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 둘 다 색이 바랬다. 방주에서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면 제대로 돌봐 줬을 것 같지 않다. 특히나 외부 시선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미니미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다선의 헌터들이 가져다 놓은 쇼핑백을 뒤지자 잠옷과 깨끗한 속옷이 나왔다. 나는 방을 보았다. 이미선이 바로 안내해 준 곳이라 내가 원래 지내던 곳도 아니었다.
욕실이 딸린 커다란 방. 이래저래 배려해 준 게 느껴지긴 했다.
“자, 가서 씻고 옷 갈아입자. 형이 도와줄까?”
“아니! 내가 할 수 있어!”
“정말?”
미니미는 졸음이 다 가신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손에서 옷을 가져갔다.
“나 이제 다 컸거든? 형 없어도 다 해!”
“그랬어? 분명 내 기억에는….”
…이렇게 애를 놀려 봤자 나한테 돌아오잖아. 결국 내 어린 시절 이야기인데.
갑작스러운 자각에 말을 멈췄다. 그 사이에 미니미는 홀라당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 * *
똑똑똑.
“선생님. 저예요.”
미니미가 씻고, 내가 쇼핑백의 내용물을 정리하는 동안 강태우가 왔다.
“어, 들어와.”
“그, 12호를… 선생님 동생을 찾았다면서요?”
“그래.”
강태우는 긴장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 추, 축하드려요.”
“…고맙다. 어쨌든 너와 아는 사이니까 먼저 인사하라고 불렀어.”
“네, 네. 이 헌터님한테 들었어요.”
“내가 동생에게 말해 놨으니까 다른 아이들 앞에서 널… 3호라고 부르진 않을 거야.”
강태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가, 감사합니다. 근데 전 상관없어요. 그렇게 불러도.”
“괜찮아?”
“네, 뭐….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어, 막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걸 숨기면 제 동생도 숨겨야 하잖아요.”
내 생각보다 강태우는 훨씬 어른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네가 말하는 게 아니라면 말하지 않는 게 맞는 거지. 잠깐만, 얘가 다 씻었을 텐데.”
욕실을 확인하려는 찰나, 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미니미가 사나운 눈빛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 똑바로 말려야지.”
아직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손이 너무 많이 간다. 나는 욕실에서 새 수건을 가져와 미니미의 머리를 덮었다.
내가 그러든 말든 미니미는 강태우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강태우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오랜만이지?”
“…….”
“무사해서 다행이다.”
붙임성도 좋지.
이건 지금의 나도 따라 하지 못할 넉살이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제 이름 가르쳐 줄 수 있지? 연구소가 아니잖아.”
“…….”
“너도 내 이름을 부를 수 있겠고.”
미니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강태우를 노려봤다. 아무리 어린아이가 노려보는 거라고 해도 화가 날 법도 한데 강태우는 순박하게 웃고만 있었다.
“내 이름은 강태우야.”
“…….”
“넌?”
“…….”
막상 3호가 눈앞에 있으니 이름을 가르쳐 주긴 싫다. 하지만 연구소가 아니니 이름을 가르쳐 달라는 저 논리를 이길 수 있는 다른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그냥 이름 가르쳐 주기 싫다고 할걸.
…라고 생각하는 게 내 눈에 빤히 보였다.
어쩔까. 내가 끼어들까? 저렇게 고집 피우기 시작하면 꺾인 적이 별로 없던 것 같은데.
그러나 내 생각보다 강태우는 훨씬 강했다.
“안 가르쳐 주면 12호라고 부를 거야.”
“…….”
“난 네가 3호라고 불러도 상관없거든. 너도 상관없어? 그럼 됐어.”
나는 드물게 할 말을 잃고 강태우를 보았다. 미니미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12호라고 불리기 싫어할까 봐 물은 건데…. 괜찮다면야.”
“……록.”
“뭐라고?”
강태우는 생글생글 웃었다.
“…우이록이라고.”
“아하, 우이록? 안녕, 이록아. 앞으로 잘 부탁해.”
……강태우는 내 생각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