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is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
아빠를 살려보겠습니다 1화(1/105)
프롤로그
헤이셜 제국의 대부호 가문, 트라벨 백작가.
집을 나간 차남이 6년 만에 어린 딸과 함께 돌아온 날이었다.
궁전 같은 대저택 앞은 부녀를 맞이하기 위한 이들로 가득했으나, 경사스러운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의 울음이 시끄럽게 공중으로 퍼졌다.
내가 우는 소리였다.
‘무서워…!’
재력의 복을 타고났다는 트라벨 가주의 황금안이 나를 주시했다.
거대한 암벽 위에 맹수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일곱 살이 감당할 수 있는 기백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서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지만-.
– 베리, 친척들을 조심해야 해. 트라벨은 가주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짐승들의 소굴이거든.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이유는 할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 베리 아가씨! 레이탄 도련님께서 전사…하셨다는 소식이…….
머릿속에 이상한 장면들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 아빠, 그랜드 마스터는 그런 작은 전장에서 죽지 않는다며. 아빠를 죽게 만든 범인이 있는 거지? …내가 진상을 밝힐게.
일곱 살, 열 살, 열여섯 살, …….
모두 나였지만, 내가 모르는 기억들.
머리가 쿵쿵 울렸다. 아플 때 울지 않는 건 자신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렇게 무섭고 두려운 건 처음이었다.
그런 날 내려다보던 황금안에 싸늘한 빛이 맴돌았다.
“배짱이 없는 녀석이군. 큰일은 못 하겠구나.”
나에 대한 평가를 마친 할아버지는 거침없이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꽈악, 아빠가 날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넓은 현관 계단에 남은 친척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나를 구경하며 비웃었다.
“한심해. 저게 진짜 트라벨이야? 시끄러운 게 꼭 개구리 같아.”
“개구리? 그러면 가을까지만 보겠네. 겨울에는 구덩이 속으로 기어 들어갈 테니까.”
“엄마 없이 자란 티가 나는구나. 레이탄, 저 한심한 녀석이 혼자서 애를 제대로 키웠을 리가 없지. 유모도 없었니? 저리 우는 걸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누이가 이해해. 애는 자기가 평민인 줄 알고 살았다잖아.”
“으엑. 하티.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들었어? 평민이래.”
멸시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만, 눈빛 속에 섞인 경계는 완전히 가려지지 못했다.
그들에게 우리는 새로운 경쟁자였다. 이 자리에 모인 트라벨의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차기 가주 후보였으니까.
그리고.
‘여기에 있어.’
큰아버지, 고모, 작은아버지, 그 배우자들과 자식들. 저 중에-.
‘아빠를 죽인 범인이…!’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는 흐릿해진 시야로 그들을 바라봤다.
뭉개진 실루엣들이 일렁이며 내게 말하는 듯했다. 도망쳐, 베리 쿼츠. 그렇지 않으면 너를 잡아먹어 버릴 테니까.
기억이 계속해서 떠오르던 중, 강한 인상을 남기며 한 장면이 조명됐다.
할아버지의 서재, 문이 열린 금고, 그 앞에 서 있는 스물네 살의 나.
– …찾았다, 공모자가 범인한테 보낸 편지.
– 남의 편지는 함부로 읽으면 안 되지. 베리 쿼츠.
‘누구?!’
커다란 내가 놀라 몸을 들썩였다. 나도 커다란 내가 된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그 순간, 쏟아지던 기억이 멈췄다. 스물네 살의 내가 정체 모를 남자의 검에 찔려 사망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가 죽는 장면을 본 것만으로 숨통이 막히는 것 같았다.
꺽, 꺽 숨을 몰아쉬는 나를 아빠가 다급히 잡았다.
“베리!”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또렷해진 시야에 한 사람의 이목구비가 들어왔다.
날카로운 푸른 눈. 조바심과 걱정이 어린, 아빠의 눈이었다.
아빠가 살아 있는 현실. 일곱 살의 나.
당연한 그 사실을 깨닫자, 안도감에 모든 긴장이 풀려 버렸다.
나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아빠의 팔을 붙잡았다.
“아, 아빠.”
“베리, 괜찮아. 숨 크게 들이쉬어 볼래? 응? 아빠 따라 할 수 있지?”
트라벨 백작가에 온 첫날.
“미안…해.”
“베리…?!”
트라벨 백작의 막내 손녀딸인 나는, 처음 보는 할아버지와 그 친척들 앞에서 첫인상을 대차게 말아먹고 기절했다.
1. 이게 대체 무슨 기억이야?
주신 아우바우트는 말했다.
네 개의 성검이 인간계를 구원할 것이라고.
실제로 성검은 일정 경지에 오른 검사 중에서 주인을 찾아 3천 년 동안 활약했다.
그리고 네 명의 그랜드 마스터.
성검의 주인, 소드 마스터들의 정점,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스러운 신의 기사…….
“성스러운?”
트라벨 백작가의 집사장, 세르베르는 손에 든 현상금 수배서를 보며 중얼거렸다.
10억 코나라는 거액과 함께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미남의 초상화가 있었다.
전직 그랜드 마스터이자, 트라벨 백작의 차남인 레이탄 쿼츠 트라벨이었다.
수배서는 한 달 전, 대부호 트라벨 백작이 집 나간 차남을 찾겠다고 전역에 뿌린 것.
전직 그랜드 마스터답게 레이탄은 6년 동안 꼭꼭 숨어 있었지만, 돈 앞에서 버틸 장사는 없었다.
결국 그를 봤다는 목격자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레이탄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
‘도련님과 성스러운이 양립할 수 있는 단어인가.’
눈빛만으로 사람을 위축시키는 이에게 붙는 표현은 아닌 듯한데.
집사장은 수배서를 고이 접어 품 안에 넣고 시선을 올렸다.
검은색 현관문 위, 트라벨을 상징하는 독수리 석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석을 눈에 박은 다른 별채의 석상들과 달리 차가운 회색빛의 눈.
‘별채도 주인을 똑 닮았군.’
백작의 자식들 중 후계자 순위 최하위에게 주어지는 별채, 통칭 ‘돌멩이 하우스’.
집사장은 장남의 명을 받고 이곳을 정찰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세르베르, 자네도 알다시피 아버지께서는 쓸데없는 일에 돈을 쓰지 않으시지.”
10억 코나. 수도에 저택을 세 채나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 거액을 내걸면서 트라벨 백작이 레이탄을 찾을 이유가 뭔가?
6년 동안 레이탄을 죽은 자식처럼 생각했으면서?
트라벨은 실적으로 가주 후계자를 뽑는 가문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라이벌의 재등장에 직계들의 신경이 곤두선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와서 레이탄이 후계자 쟁탈전에 참여할 필요는 없지. 레이탄과 그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아버지께서 왜 레이탄을 불렀는지 알아내란 말이다.”
집사장은 한숨을 삼키고 돌멩이 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때마침 하녀들이 로비로 나오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베리 아가씨, 너무 귀여우셨지?”
“봤어? 그 쪼끄만 미간을 심각하게 접으시면서, ‘…언니는 열여덟 살?’ 이러시잖아. 아-. 꽉 껴안아 드리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네.”
하녀 한 명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품에 안은 빨랫감을 꼭 끌어안았다. 옆에서 같이 걷던 하녀가 몸을 가까이하며 살갑게 물었다.
“신기하지 않아? 어떻게 우리 이름이랑 나이를 다 외우셨을까. 또래보다 똑똑하시-.”
“앤, 그게 뭐가 신기해.”
뒤따라오던 갈색 머리 하녀가 앤의 말을 듣고 말했다.
“레이탄 도련님께서 물어보신 걸 몰래 들으셨다가 바로 말씀하신 거잖아. 일곱 살이면 충분히 할 수 있으시지.”
“셰리 씨도.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앤과 셰리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일자, 빨랫감을 든 하녀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베리 아가씨 말이에요. 질문을 하실 때보다 대답을 들으셨을 때가 더 귀여워요. 물어보신 게 맞는다고 하면 울상을 지으신다니까요. 왜지?”
“그게 무슨 소리냐?”
“끼약!”
울상을 짓는 어린 아가씨의 표정을 따라 하던 하녀는, 예상치 못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말이 안 통하기로 유명한 본채의 집사장이었다.
“지, 집사장님?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레이탄 도련님과 작은 아가씨를 뵈러 왔다. 그보다 아가씨가 뭘 어쩌셨다고?”
집사장의 질문에 하녀들이 뒤쪽에 있는 셰리를 힐끔거렸다. 그녀가 돌멩이 하우스의 하녀 중 최고 선임자이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셰리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올라가 보시면 알아요.”
***
트라벨 백작의 막내 손녀딸을 위해 꾸민 방.
방 주인 대신 소파를 차지한 남자가 집사장을 응시했다.
“베리를 만나고 싶다고?”
푸른 눈이 좌우로 길게 뻗은 시원한 눈매였으나, 그 속의 눈빛은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날카로웠다.
레이탄 쿼츠 트라벨.
그저 무감하게 보는 것뿐인데도, 뱀 앞의 쥐처럼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레이탄이 상체를 슬쩍 움직이며 무릎에 양손을 얹었다. 집사장의 입 속에서 짧은 감탄사가 맴돌았다.
솔직히 고유의 흉흉한 분위기를 빼고 본다면, 그는 무척이나 귀족적인 미남이었다.
거기에 완벽하게 세팅된 밀밭 색 머리카락이나, 먼지 하나 없이 윤이 나는 밤색 구두, 단정해 보이면서도 디테일한 포인트가 살아 있는 정장.
검술로 다져진 몸에 타고난 패션 감각까지 갖춘 미남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문을 잘못 태어났어.’
레이탄은 트라벨 백작가에서 이상한 위치에 있었다.
검술에서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음에도, 상술에 있어서는 마이너스의 손.
그가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엄청난 빛을 봤겠지만, 안타깝게도 트라벨은 광물 산업과 무역업으로 대성한 가문이었다.
덕분에 레이탄의 실적은 연일 하한가를 쳤고, 후계자 순위에서는 늘 최하위를 유지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직위라도 유지하셨으면 신전에서 평생을 호의호식하셨을 터인데. 안 좋은 말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야.’
6년 전에 육아 퇴직을 한다고 성검을 대신전에 반납해 버렸으니, 지금 레이탄에게 남은 건 ‘덜떨어진 트라벨’이라는 평가뿐.
“세르베르.”
“예, 옙.”
흉보던 마음의 소리가 들렸나 싶어, 지레 찔린 집사장이 급히 대답했다.
“자네가 올해 마흔셋이지?”
“그렇습니다.”
“자식으로는 아들이 있고, 본채에서 집사장으로 일하고, …또 뭐가 있지?”
“예…?”
갑작스러운 신상 털기에 집사장은 당황했지만, 저 좁혀진 미간을 보니 뭐라도 말해야 할 성싶었다.
“희, 흰머리가 늘었습니다.”
“안타깝군.”
레이탄은 몸을 일으키며 따라오라는 듯 한쪽을 향해 턱짓했다. 멀지 않은 곳에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작게 솟은 이불 아래로 꼼지락거리는 무언가.
…설마?
두 사람이 침대 옆에 도착하자, 레이탄이 이불을 휙 들쳤다.
“인사하게. 베리베리 수사관님이시지.”
정전기에 부스스하게 뜬 분홍 머리카락, 동그란 두상,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쌍꺼풀이 있는 녹색 눈. 아빠를 전혀 닮지 않은 귀여운 여자아이가 집사장을 올려다보았다.
뭔가를 닮았다.
푸들? 몰티즈?
아, 어린 비숑.
“세르베르?”
똘망똘망한 녹안을 깜빡인 어린 수사관이 집사장에게 물었다.
“네.”
“올해 마흔셋이십니까?”
데자뷔 같은 질문에 집사장이 눈을 끔뻑였다. 레이탄이 팔짱을 낀 채 힌트를 주었다.
“베리베리 수사관님은 뭐든 아시지.”
“아, 아. 그러시군요.”
집사장은 상황을 파악했다.
레이탄 도련님과의 대화를 아가씨께서 이불 속에서 엿듣고 있다가 그대로 말씀하시는 거군?
아이의 장단을 맞춰 주는 건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트라벨에는 베리 쿼츠 말고도 다른 아가씨들과 도련님들이 있으니까.
“어린 수사관님께서 통찰력이 대단하시군요. 이러다 제 자식 수까지 맞추실까 염려되는데요.”
집사장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이 조그만 아이의 호감을 얻으면 돌멩이 하우스를 감시하기가 수월할 테니.
다음에 나올 말이야 빤했다. 슬하에 자식이 한 명, 그리고 본채에서-.
“최근에 폭삭 망할 잉크사 주식을 다량 사셨습니까?”
“그건 절대 안 망한다고 몽트 남작님께서 약조를……. 예? 제가 주식을 산 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하는 거지.”
레이탄이 딸의 입을 가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르베르, 자네는 이만 가 봐.”
가 보라는 축객령에 집사장은 찜찜한 기색을 쫓을 새도 없이 물러났다. 멀어지는 집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베리는 울상을 지었다.
‘끄앙. 이것도 맞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