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is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17)
아빠를 살려보겠습니다 17화(17/105)
트라벨 내에서 아빠의 평가는 박하지만, 사실 아빠는 외부로 나오면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맡은 가문의 사업은 죄다 말아먹는 망나니, 그런데 검술에 관해선 일인자, 애는 딸렸지만 미혼, 외형 훌륭, 6년 동안 종적 감춤.
정작 본인은 트라벨 부지를 둘러싼 높고 커다란 담 안쪽에서 잠잠하니. 신비주의가 불러온 환상이 커질 대로 커졌겠지.
‘오호. 아빠 수배지에 아빠 서명을 받으려는 건가?’
점장님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으니 지금 상황이 흥미로웠다. 나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상황을 지켜봤다.
‘레이탄 쿼츠 트라벨이 다녀간 의상실이라는 가게 이미지를 만들 수 있으니까-. 홍보 방법으로는 나쁘지 않네. 아빠가 과연 수배지에 사인을 해 줄지는 모르지만!’
아빠의 시야에서는 트레이의 윗면이 보이고 있을 터였다. 점장님의 검지를 따라 움직인 수배지가 트레이의 옆면을 타고 올라가 아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배지 속의 아빠와 소파에 앉은 아빠의 눈이 마주쳤다.
“크, 흠. 레이탄 님,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열정적으로 주스를 마셨다. 긴장감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빠가 전직 그랜드 마스터이긴 하지만 상대는 베테랑 장사꾼!’
산전수전 다 겪고 저 자리에까지 올랐을 점장님이 아빠한테 어떻게 서명받을지-.
“팬입니다.”
콜록.
“베리, 여기 티슈.”
생각지도 못할 일차원적인 접근 방법에 사레가 들렸다. 테온이 주스 잔을 가져가고 티슈를 손에 쥐여 줬다.
고작 저런 걸로 아빠의 사인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나? 정말?
아빠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는지 말이 없었다. 나 또한 약간의 실망을 느끼려던 찰나, 점장님의 이어진 말이 심상치 않았다.
“21년 전. 여덟 살이셨지요. 레이탄 님께서 와인색 넥타이를 허리띠로 사용하시고 히스포트 타운을 방문하셨던 그날.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전까지 누가 그런 상식을 깨트리는 행동을 했었습니까? 모자는 모자로. 바지는 바지로 입어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 사물의 용도가 한 가지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데! 꽉 막혔던 제 관념이 와인색 넥타이에 맞아 산산이 부서진 그때! 그때부터 제 길은 정해졌습니다. 패션! 비록 디자이너가 될 정도의 센스는 없었으나 이 업계에 몸을 담았지요! 레이탄 님께서는 제 인생을 뒤바꾸신-!”
“…….”
나랑 테온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점장님을 쳐다보았다. 정열적으로 아빠의 수십 년 된 팬임을 토로하던 점장님은, 용건이 뭐냐고 묻는 아빠의 말에 그제야 부끄러워하며 수배서에 서명을 요청했다.
아빠의 손이 순순히 펜을 집어 들었다. 그래야 점장님의 말이 끝날 것 같았으니까.
“……사랑합-”
“조용히 하게. 점장.”
“예.”
점장님은 영수증과 서명받은 수배지를 들고 태연하지만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아빠는 티 나지 않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갈까?”
“응!”
“네.”
하지만 아빠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의상실 직원들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깍듯한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타러 나가려던 때였다.
“레, 레이탄 니임-!”
맞춤복의 치수를 쟀을 때 얼굴을 본,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였다. 황급히 아빠를 부르며 뛰어오는 디자이너의 곱슬머리가 솜사탕처럼 붕붕 흔들렸다.
“벌써 가시려고요? 가시기 전에 이것들 좀 봐 주실 수 있을까요?”
“…….”
아빠가 걸음을 멈추자, 디자이너는 다시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몇 가지 증상이 내 눈에 띄었다. 붉게 상기된 볼, 가쁜 숨, 아빠를 놓치면 안 된다는 조급한 말투.
촉이 왔다.
‘저 사람도 우리 아빠 팬……!’
미래의 아빠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나는 다시금 의상실 이름을 확인했다.
트랑 의상실.
혹시 모르니까 기억해 두고 있자.
“새로 나온 디자인의 단추들인데 레이탄 님께 꼭 선택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이 단추는 자수를 넣을 수 있고요, 이 단추는 측면에 들어간 디테일이 환상적이에요.”
“단추의 디자인만 결정하면 되나?”
“여기서 두 개만 골라 주시면 감사하지요. 베리 아가씨의 원피스에 들어갈 거예요.”
아빠는 디자이너가 내민 나무함 속의 단추들을 유심히 살펴보다 손에 들어 보기까지 했다. 저건 아빠의 마음에 들었으나, 결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였다.
“테온, 우리 먼저 나가 있을까?”
“스승님께서 아직 볼일이 있으신 거 같은데.”
“아빠~ 우리 나가 있어도 돼? 밖에 기사 아저씨들이랑 있을게!”
“응.”
아빠는 카운터랑 가까운 곳에서 신중하게 단추의 디자인을 확인하며, 문 쪽에 있는 내게 말을 덧붙였다.
“제일 덩치 큰 기사 아저씨랑 손 꼭 잡고 있어. 금방 갈게.”
“넹. 테온, 나가도 된대.”
나는 테온에게 히히 웃어 보이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의상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섯 명의 기사 아저씨들이 곧장 우리 쪽으로 와서 붙었다.
“아빠가 제일 덩치 큰 기사 아저씨랑 손잡고 있으래요.”
아빠의 말을 전했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손바닥 다섯 개가 내 앞에 내밀어졌다. 그러고는 툭탁거리며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마지막에 남은 손의 주인인 기사 아저씨가 뿌듯하게 말했다.
“제가 덩치가 제일 큽니다.”
내가 기사 아저씨의 손을 잡은 그때였다.
“가까이 오지 마라.”
바깥쪽에 서 있던 다른 기사 아저씨가 날 선 음성을 내뱉으며 누군가를 막아 세웠다.
누구지? 기사 아저씨한테 가려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휴, 기사 나리께서 고생하시네. 그런데 제가 저기에 있는 남자애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테온이랑 아는 사람인가.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테온은 넉살 좋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목소리의 주인이 기사 아저씨의 팔을 피해 옆으로 얼굴을 빼꼼 내미는 데에 성공했다.
푸근한 인상의 평민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테온을 발견하고 급히 말을 걸었다.
“테온, 나 기억하지? 응?”
“여관 주인아줌마?”
테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테온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트라벨 백작가에 들어오기 전에 묵었던 여관 주인아줌마야.”
친절하셔. 테온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그래! 기억하는구나? 물어볼 게 있는데 잠깐 시간 좀 내줄래?”
“네.”
너무 순순히 따라가는 거 아니야? 나는 급히 테온에게 속삭였다.
“멀리 떨어지지 말고 근처에서 이야기해. 테온.”
고개를 끄덕인 테온은 의상실 건물 벽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아줌마와 대화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기사 아저씨들한테 부탁하면 되겠지.
‘그나저나 여관 아줌마 정보가 떠오를 듯 말 듯 하네. 타운 내에 유명한 여관 주인들은 다 떠오르는데.’
나는 테온의 대화에 관심 없는 척 기사 아저씨들과 놀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테온도 목소리가 크지 않은 편이고, 여관 아줌마도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기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레이탄 도련님께서 나오시네요.”
드디어 단추를 고른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데, 여관 주인아줌마가 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어린 것을 내쫓았단다! 그 아픈 애를!”
“무슨 소리지?”
아빠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
소란이 커질까 봐 우리는 옆 골목으로 장소를 옮겼다.
여관 아줌마는 아빠의 개입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 말만큼은 해야겠다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제 목을 치신다고 해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해 봐.”
“제 여관에서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애를 보살피고 있어요. 어제저녁에 트라벨 백작 가문의 땅에서 쫓겨난 아이지요.”
“바깥에서 살던 아이인가 보군.”
‘바깥’은 트라벨 백작 저의 담 사이 생활 공간을 뜻했다. 아빠의 말에 여관 아줌마가 속상한 말투로 상황을 이어 설명했다.
“맞습니다. 여섯 살인데 병을 앓고 있던 아이라 하더군요. 직접 보시면 도련님께서도 제가 이러는 이유를 아실 거예요. 걔 누이가 아무리 백작 마님의 물건을 도둑질했을지도 모른다지만….”
앤이다……!
여관 아줌마의 말에 내 머릿속이 번뜩였다.
마리안 고모가 아픈 남동생을 빌미로 앤을 협박하고 있나?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뀐 미래가 실마리를 주고 있다니.
‘테온 덕분이야.’
아빠랑 나만 나왔으면 여관 아줌마를 만나지 못했을 거다. 이번 사건의 연결 고리는 테온이었다.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도, 아직은…….”
아줌마는 점점 감정이 격해졌지만, 아빠가 앞에 있기 때문인지 화를 꾹꾹 억누르는 듯했다. 그러다 울분에 찬 목소리로 호소했다.
“하녀로 일하는 누이가 아직 트라벨 백작가에 있는데, 오한으로 벌벌 떠는 애를 흙바닥에 던져서 쫓아내는 게 말이 되는 일이랍니까?”
“던져?”
“예…! 기사님들이 그 작은 것을 끌고 나와서 힘껏 땅에 던져 버리더라고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 말에 아빠와 나와 테온이 같이 이야기를 듣는 기사 아저씨들을 바라봤다.
“…….”
나는 잡고 있던 기사 아저씨의 손을 슬그머니 놓았고, 테온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여섯 살….”
“아닙니다!”
“그 구역은 4 기사단 담당입니다. 아주 악질이네요. 그 녀석들.”
“저라면 사비를 써서라도 의사에게 데려갔을 겁니다.”
“자네도? 나도.”
기사 아저씨들은 제4 기사단과 빠르게 선을 그으며 손사래를 쳤다. 오늘 호위로 나온 기사 아저씨들은 제2 기사단 소속이었다.
아빠는 여관 아줌마에게 말했다.
“그렇다는군. 우리랑은 관련이 없는 일인 것 같은데, 어쩌지.”
“도련님, 도와주세요. 이 동네 의사는 아이의 병을 몸살이라고만 하고, 처방받은 약은 쓸모도 없어서 증상만 심해지고 있어요. 게다가 그 아이의 누이가 도련님의 별채에서 일하던 하녀랍니다. 그러니-.”
“그러니까 내가 함부로 도와줄 수가 없다는 거지. 백작 부인께서 앤의 가족을 내쫓으라 명령하신 걸지도 모르잖아? 하녀들의 처우는 내 관할이 아니라서. 이쪽은 차기 가주 자리 때문에 자기 권한을 침범하는 일에 꽤 민감하거든.”
“…….”
아빠도 귀족이었다. 평민에게 굳이 설명해 줄 필요 없는 사정까지 말하며 거절하니, 더는 아이를 도와달라 부탁할 수 없을 터였다. 여관 주인아줌마는 탄식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테온을 핑계로 아빠의 도움을 어떻게라도 받으려던 것이, 아줌마가 앤의 남동생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었을 테니.
“그 어린 것이…. 불쌍해서 어떻게 한담….”
고개를 떨군 아줌마의 입 속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맴돌았다. 체념과 원통함이었다.
지금 들은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닌 듯한데.
‘처음 본 아이를 돕겠다고 귀족 앞에 나서는 사람이 있네. 고모나 작은아버지한테 그랬으면 좋은 꼴은 못 봤을 거야.’
우리 아빠가 인상이 사납지만 제일 상냥하다니까.
그런데 역시 저 얼굴, 기억이 날락 말락…….
아빠가 아줌마한테 물었다.
“자네는 어디 여관 주인이지?”
“…달맞이꽃 여관이에요. 히스포트 타운 중심지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3층짜리 여관이지요.”
아!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