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is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35)
아빠를 살려보겠습니다 35화(35/105)
말을 건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가, 입이 절로 벌어졌다.
“어…….”
“놀라게 하려고 말을 건 건 아니었어.”
하얀색은 너무 많이 봐서, 더는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이 말끔히 날아갔다.
하얀 피부, 어깨까지 닿는 은발, 투명한 은안.
고요한 이른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소복한 눈에 햇살이 비추는 풍경이 절로 떠올랐다.
성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외모를 가진 소년이었다. 헤반트 큰아버지의 장녀, 시엘의 또래로 보였다.
소년이 입은 사제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견습 사제인가?
“찾고 있는 게 있으면 도와줄까?”
“…….”
과연 대신전이었다. 견습 사제한테도 이런 고고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다니.
너무 신성해 보이니까 말을 섞는 것조차 실례라 느껴졌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더 실례겠지만.
“내가 말을 거는 게 불편하구나.”
“아, 아니에요!”
마담 프레아가 그렇게 강조하던 귀족 인사를 해 볼까, 싶어 치맛자락을 주섬주섬 잡던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대신전 전체가 커다란 진동 속에 휩싸였다. 땅이 울리고 건물이 울리고 내 고막도 울렸다.
발밑이 흔들흔들했다. 진동음이 너무 커서 머릿속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진인가?!’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더라?
낙하물이 없는 넓은 장소로 피신하고, 또-.
“조심해.”
처음 겪는 비상 상황에 허둥거리고 있는데, 소년이 내 팔을 잡았다.
“넘어질지도 몰라. 성검이 폭주하면서 생긴 진동이야.”
팔을 잡은 손마저 무척 고왔다. 나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태연한 어조와 달리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잔뜩 굳은 표정은 마치 겁을 먹은 듯했다.
무섭나? 무섭겠지? 땅은 아직도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동의 원인이 윈디스의 폭주라는 걸 안 순간, 내 두려움은 싹 없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소년이 놀란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나는 씩 웃으며 소년에게 말했다.
“우리 아빠가 해결해 줄 거니까요.”
[작은 쿼츠! 너도 나왔구나?]아큠! 나는 재빨리 상체를 틀어 뒤를 돌아봤다. 아큠이 반대편 물받이에 올라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것 봐, 물이 쏟아진다! 가까이 가서 보자!]폭포 위쪽을 가리킨 아큠은, 땅으로 뛰어내려 폴짝폴짝 뛰어갔다.
으악! 또 어딜 가는 거야!
나는 후다닥 아큠이 달리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소년에게 안심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고.
***
혼자 남은 소년은 가만히 서서 베리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뒤통수가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말을 걸어 버렸다. 앞모습도 동그란 아이였다.
누굴까.
‘걱정이라니.’
소년은 제 입매를 매만졌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때마침 누군가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유라하 님!”
홀트 고위 사제였다. 트라벨 백작가의 자선 경매에도 참여했던.
그는 열두 살 소년이 제 상관이라도 되는 양, 태도를 조심하며 제가 찾아온 까닭을 일렀다.
“윈디스가 폭주했습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시죠.”
진동은 멈췄지만, 윈디스의 폭주는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유라하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괜찮다니요?”
“오랜만에 계시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오오.”
홀트 사제는 탄성을 뱉었다.
유라하는 아우바우트 신께 목소리가 닿는 인간이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는다.
계시는 드물게 나타났지만, 단 한 번도 엇나간 적이 없었다. 교단은 유라하의 존재를 비밀리에 보호했다.
소년은 차기 대교주가 되기 유력한 자였다.
“그런데 홀트 사제님. 오늘 방문객 중에 여자아이가 있나요? 키는 이만하고, 분홍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이었습니다.”
유라하는 제 가슴팍 높이의 허공에 손을 눕히며 물었다.
“아, 레이탄 님의 딸을 말씀하시는군요. 혹시 오늘 받으신 계시에 그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홀트 사제가 눈을 빛냈다.
트라벨 백작의 막내 손녀딸.
레이탄이 최하위 가주 후보자라지만, 그건 트라벨 내부의 일. 제국 내에서 트라벨이란 이름이 주는 힘은 그 어떤 귀족보다 강했다.
베리 쿼츠 트라벨이 아우바우트 교단과 연이 생기는 건 달가운 일이었다.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유라하의 대답에 홀트 사제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어진 말을 듣기 전까진.
“귀여워서 여쭤봤습니다.”
유라하. 아우바우트 신 외에는 그 무엇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던 소년이 인간 소녀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어쩌면 트라벨 백작의 막내 손녀딸과 교단이 깊은 관계를 맺을지도.
성인이 된 두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던 홀트 사제는, 자신이 주책맞음을 깨닫고 상념을 떨치려 애썼다.
***
주신전의 지하에는 성검을 보관하는 방이 있다.
방을 둘러싼 천장과 벽과 바닥의 두께는 무려 5m. 몇 겹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방에서 받은 충격을 분산시켜 지면으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했다.
성검 폭주 시에 주신전이 무너지는 참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애초에 성검을 다른 곳에 보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건 신성 모독이었다.
성검은 주신께서 직접 인간들에게 하사하여, 권능의 일부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한 성물.
그러니 교단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에 보관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성스러운 존재가 전 주인을 상대로 상사병에 걸려, 사제들의 귀중한 신성력을 쪽쪽 빨아먹는 중이더라도.
몇 분 전, 윈디스가 보관된 방.
레이탄과 테온, 대교주와 고위 사제 몇 명이 지하로 내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퍼어어엉-!
오늘은 성검이 얌전하다는 대교주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듯, 5m 두께의 닫힌 문 너머에서 강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우우우웅-!
그리고 이어진 강한 진동.
성검의 폭주였다.
아니, 왜 벌써!
예상보다 빠른 폭주에 사제들은 급히 문을 열었다. 성검을 보관하는 단 외에는 어떤 것도 들여놓지 않은 장소였다.
‘너무 이르지 않은가!’
‘폭주 예정일은 아직 만 하루가 남았는데……!’
‘이제는 폭주 시기도 제멋대로야?!’
주인이 없는 성검은 쌓인 권능을 폭주로 발산한다. 윈디스는 바람의 성검.
거센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신성력으로 소용돌이를 잠재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금 폭주를 시작해….
‘죽겠네.’
‘내 신성력은 오늘이 끝이야. 더는 못 해.’
‘아우바우트 신이시여. 곧 뵙겠습니다.’
변수로 눈앞이 캄캄했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뒷일을 상상한 사제들의 눈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전 주인이 온 걸 알았는지, 오늘따라 윈디스의 지랄 맞음이 한층 거셌다. 소용돌이가 평소의 두 배는 되는 듯했다.
때를 놓치면 소용돌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하지만 레이탄은 아직 윈디스의 주인이 아니었다. 시작된 폭주를 잠재울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윈디스의 폭주는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점점 세졌다. 일전의 폭주는 세 번째 진동이 울리기 전에 가까스로 잠재웠다. 그때의 여파로 신성력이 탈탈 털려 있었지만, 이번 폭주의 규모를 보아하니 신성력을 쥐어 짜내서라도 초반에 잡아야 했다.
자칫하다가는 정말로 대신전이 소용돌이에 날아갈 위험이 있었다.
“위험합니다! 레이탄 님과 제자분은 뒤로 물러나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사제들이 생명력을 걱정하며 신성력을 사용하려던 때였다. 분명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는데, 눈 한 번 깜빡하니 레이탄이 자신들을 지나 소용돌이 속을 뛰어들고 있었다.
“레이탄 님!!”
“안 됩니다! 돌아오세요!”
사제들의 긴박한 외침이 칼바람에 베여 나갔다. 레이탄을 집어삼킨 소용돌이가 몸집을 불리며 거대한 방을 가득 채웠다. 한 사제가 바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윽!”
옆에 있는 사제가 급히 팔을 당겼지만, 바람에 살이 스쳤다.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하얀 사제복의 소매를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신체 일부가 닿으면 잘려 나갈 겁니다!”
아무도 제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소용돌이는 날카로운 바람으로 제 표면을 휘감았다. 뼈조차 쉽게 잘릴 듯한 위력에, 사제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당황스러웠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이런 현상은 처음이었다.
소용돌이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몸집을 더 키우지도, 줄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주변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거셌다. 사제들의 불안한 마음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한 바람이었다.
“더 큰 폭주의 전조일지도 모릅니다. 신성력을 사용해서 폭주를 억눌러야 해요!”
“하지만 안에 레이탄 님이 계시지 않는가!”
“대신전을 지키는 게 먼저지 않을까요? 이러다가 자칫……!”
사제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던 때였다.
“허둥거리지들 마시오!”
대교주가 외쳤다. 사제들의 대화를 멈춘 그의 음성에는 약간의 화가 실려 있었다.
고위 사제라는 자들이 평정심을 잃고 허둥거리는 모습이 유독 실망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레이탄 님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성물에 한번 택함을 받은 자께서 해결하시겠다 말씀하셨으니. 지켜봅시다. 두 번째 폭주가 일어난다면 이 늙은이가 책임지지요.”
대교주가 책임을 진다. 예순이 넘은 노년의 나이지만, 그의 신성력은 고위 사제 다섯을 합친 것보다 강했다.
사제들이 손을 내리고 앞을 바라봤고, 대교주는 곁눈질로 제 옆에 있는 테온을 바라봤다.
스승이 들어간 소용돌이를 보는 시선이 올곧았다.
아이도 저리 침착한데, 평생을 신께 수양했다는 어른들이 그리 행동해서야 쓰나.
‘흐음.’
한데, 테온의 침착함과는 별개로 대교주는 테온에게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이의 훤칠한 외모가 낯설지 않았다.
잘생긴 아이들의 어릴 적 외모가 비슷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아닌 듯했다.
레이탄의 제자라 레이탄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주 오래전, 아마 몇십 년 전의…….
“대교주 님!”
대교주는 또다시 저를 부르는 허둥거리는 소리에 속으로 심호흡했다.
내일부터 교단 전체에 새벽 기도를 의무적으로 시행하라-.
정면을 바라본 대교주의 동공이 커졌다.
“…….”
소용돌이가 심상치 않게 흔들리고 있었다.
퍼엉!
이어진 커다란 폭발음.
‘재폭주인가!’
대교주의 손등 위로 혈관이 불거지며 꿈틀거렸다. 신성력을 펼치려던 때, 흩어진 바람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레이탄 쿼츠 트라벨이 윈디스가 만들어 낸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간 지 몇 분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