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is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4)
아빠를 살려보겠습니다 4화(4/105)
“네 딸은 너무 철이 일찍 들었어.”
몇 주 전. 레이탄이 베리와 함께 시골 마을에서 살 때의 이야기였다.
촛불이 흔들리는 어둑한 방에서, 이종족과 인간의 혼혈인 마샬이 약병의 마개를 닫으며 말했다.
침대에는 막 열이 내린 베리가 자고 있었고, 레이탄은 작은 손을 잡고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40도면 눈앞에 있는 것도 분간 못 해. 아프다고 펑펑 울어도 모자랄 판에 괜찮다고 웃는 일곱 살이 어디 있누? 쪼끄만 게 제 아빠가 걱정할 일 만드는 건 끔찍하게 싫어하지.”
“…마샬, 베리는 무슨 병입니까? 한 달이 멀다 하고 고열에 시달리는 건 병약한 체질 탓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걸 알면 진즉 말해 줬겠지. 전조 증상도 없어, 원인도 없어. 내 약제사 평생 이런 병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대신전에 두고 온 네 검이 저주라도 내린 건 아니냐?”
“윈디스는 그럴 검이 아닙니다.”
마샬은 안경알 너머로 레이탄을 바라봤다.
인연이 뭔지.
약초 캐던 노인네에게 검을 뽑아 들고 물 내놓으라고 협박하던 놈을 6년이나 봐주고 있을 줄이야.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 삶에 대한 의지가 가득한 눈빛, 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
늙으면 측은지심이 많아진다더니. 며칠 밥이나 챙겨 줄 생각에 데려왔건만, 레이탄은 그대로 제 마을에 터를 잡고 눌러앉았다.
바깥세상과 동떨어진 환경이 아주 좋다나.
하지만 이 마을이 아무리 세상과 동떨어졌어도 들어올 소식은 들어왔다.
“트라벨 백작이 널 잡아 오라고 현상금을 걸었다더라.”
“…오늘 시장에서 봤습니다.”
“황제보다 돈이 많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더구먼. 액수가 눈깔이 회까닥 돌게 생겼어. 벌써 신고가 들어갔을 거다.”
“마샬도 신고하셨습니까?”
“아서라. 네놈 팔아서 돈 벌면 그 열 배를 받아 내려고 할 텐데. 너만큼 손해 보길 싫어하는 놈은 내가 보질 못했어. 나도 한 지독하지만, 너는 더한 녀석이다.”
저런 녀석이 마이너스의 손이라니. 기가 차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 트라벨에서 제가 원하는 평판을 꾸며 낼 정도로 철저하게 행동하는 지독한 놈.
그럼에도 레이탄이 밉지 않은 건, 그가 지키고 싶은 것 하나에 절절히 목을 매는 자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마샬은 침대 옆 협탁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도 알겠지만, 현상금이 내려갈 때까지는 쫓기게 될 거다. 베리도 네 딸이라는 이유로 쫓기게 되겠지.”
그곳에는 손때를 수도 없이 타, 종이가 다 떠 버린 책 한 권이 있었다.
레이탄의 애독서였다. <우리 아이 혼자서도 잘 키우기>.
마샬은 말 없는 레이탄의 커다란 등을 향해 말했다.
“애한테 떠돌이 생활은 안 좋아.”
***
또 밤이군.
레이탄은 고요한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본채를 방문했을 때도 밤이었다. 직계들의 눈을 피해 백작을 만나기 좋은 시간.
앞서가는 칼렛은 조용했다.
6년 만에 마주한 소꿉친구는 트라벨 백작의 보좌관이 되어 있었다. 레이탄은 흘러간 세월을 잡기 위해 쭉 날이 서 있었다.
아직 제 편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누구를 곁에 두고 누구를 경계해야 하는지.
곧 떠날 곳이라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백작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칼렛이 걸음을 멈춘 곳에는 닫힌 문이 있었다. 불빛조차 새어 나오지 않게, 그 안에 있는 주인의 어떤 것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 충성스러운 문.
사전에 말이 돼 있었는지, 칼렛은 두 번의 노크 후에 문을 열었다.
천장의 밝은 등 대신, 은은한 조명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멍청한 놈.”
레이탄이 방으로 들어간 때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책상에 앉은 남자의 입에서 매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금빛이 도는 백발을 가진 거대한 노인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락세크 아이언 트라벨.
트라벨 백작가를 역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놓은 장본인.
“애를 키운다고 그랜드 마스터 자리를 내려놓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렇게 손익 계산이 안 되어서 어찌 살아?”
락세크는 방으로 들어오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못마땅한 기색이 미간에 자리한 주름에 여실히 흘러나왔다.
그가 가진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말 한 번에 산을 움직이고 바다를 가를 정도로.
헤이셜 제국 내에서 황제와 대교주 다음으로 입김이 센 자였다. 백작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잘 살고 있었습니다만.”
카펫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멈춘 레이탄이 삐딱하게 말했다.
트라벨 백작이 한 달 전에 제 목에 건 현상금.
그 현상금 때문에 원래 살던 생활을 버린 것은 물론, 제 딸마저 도망자 신세로 만들 뻔했으니.
레이탄의 심기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작님께서는 그러시지 못한 모양이군요. 연 끊은 멍청한 놈은 왜 찾겠다고 현상금을 거십니까? 못 뵌 사이에 기억력이 감퇴하셨습니까?”
“6년 만에 보는 아비한테 그게 할 소리냐? 쯧쯧. 어쩌다 저런 놈을 낳았는지. 죽은 네 어미가 살아서 널 보면 눈물을 흘릴 게다.”
“뭐, 백작님께서 생전에 흘리게 한 눈물만 할까요. 둘째 부인이라고 무시당할 때 잘 챙겨 주지 그러셨어요.”
“저, 저, 저놈이…!”
트라벨 백작이 의자를 박차고 레이탄을 향해 삿대질했다.
노기에 찬 가주의 황금안을 마주하고도 레이탄은 숨소리 하나 변함이 없었다.
다른 자식들이었다면 벌써 후들거리는 다리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애초에 트라벨 백작의 면전에서 대놓고 그 속을 긁으려 하는 제정신 아닌 자가, 레이탄 외에 있기야 하겠느냐마는.
‘망나니 도련님이 귀환하셨군.’
트라벨 백작의 보좌관, 칼렛이 문가에 서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칼렛은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자였다.
그래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고백하자면 그는 요 며칠 아빠 노릇을 하는 레이탄의 행동에 소름이 몇 번 돋았다.
레이탄 쿼츠 트라벨이 누구인가.
‘피의 망나니’나, ‘죽음의 사신’ 같은 낯부끄러운 별명이 잘 어울릴 정도로 늘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살던 자다.
매사에 설렁설렁 행동하는 듯해도 빈틈이 없었고, 태평해 보여도 늘 날이 서 있었다.
더욱이 뛰어난 검술 실력과 성검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타이틀.
기사들 사이에서 레이탄은 감히 말도 함부로 붙일 수 없는, 하늘 위의 존재였다.
그가 기억하는 레이탄은 그랬는데…….
“오오, 칼렛 삼촌은 우리 아빠 친구구나? 과자 먹을래요?”
“베리베리, 드실래요? 라고 해야지.”
“아항. 드실래여?”
“감사합니다. 베리 아가씨.”
“아빠 거는?”
“어, 방금 그게 마지막인데….”
“그렇…구나. 아빠 거는 없구나. 오늘 처음 만난 아저씨 거는 있는데….”
“이구, 속상해하지 마. 다음에 과자 먹을 때 아빠한테 먼저 물어보면 되지!”
“첫 번째로.”
“그래, 첫 번째로!”
쪼잔하게 저를 아저씨라고 은근슬쩍 칭하는 건 그렇다 쳐도, 우선순위를 뺏겼다고 시무룩해진 레이탄이라니.
눈을 의심할 만한 비슷한 광경이, 마차로 시골 마을에서 트라벨 백작가까지 오는 며칠 동안 여러 번 있었다.
세월이 이리도 무서웠던가.
무표정하게 서 있는 칼렛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트라벨 부자의 팽팽한 긴장감은 이어졌다.
레이탄이 제 아버지에게 물었다.
“현상금은 왜 거셨습니까?”
레이탄이 트라벨 백작가에 발을 들인 것은, 담판을 짓기 위함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백작이 차남을 그리워해서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제 생사가 백작님께 10억 코나 값을 할 것 같지는 않고. 그 전에, 제 발로 찾아왔으니 현상금은 제가 받아 가면 됩니까?”
“그걸 네가 왜 가져가? 네놈 키우느라 들어간 돈이 얼만데. 내 돈이나 뱉어 내라. 이놈아.”
“백작님은 전대 백작님께 돈 드리셨습니까?”
쾅! 백작이 커다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바닥까지 진동했다.
한밤중이었다.
아무리 백작의 서재가 방음이 잘 된다고는 하지만 방금의 진동은 아래층의 천장까지 울렸을지도 몰랐다.
칼렛이 급히 중재에 나섰다.
“가주님, 소란이 나면 아래층에서 주무시는 마님께서 깨십니다.”
“…그렇지. 하여튼 간에 아비한테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고얀 놈.”
이 밤에 다른 직계들의 눈을 피해 레이탄을 은밀히 부른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다음 별채 쟁탈전에 크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커다란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건.
레이탄도 짐작했다.
“뭐, 현상금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고. 얼마나 가문에 이익이 되는 일이길래 백작님께서 저를 부르신 겁니까?”
레이탄의 질문에 트라벨 백작은 끙, 하고 다시 의자에 앉아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눌렀다.
“교단 놈들이 난리다.”
대교주. 그자만 아니었다면 자식 놈을 찾겠다고 이 난리를 부릴 일도 없었을 터였다.
“네가 버린 그 해괴한 성검이 다음 주인을 선택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