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is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84)
아빠를 살려보겠습니다 84화(84/105)
테온은 검을 차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는데, 방향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훈련장에 가는 듯했다.
시엘은 분명 테온을 보는 중이었다.
“칼립스 도련님! 앞에 말이 있으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시엘 누나가 거북이처럼 걷고 있으니까 그렇지!”
칼립스가 시엘의 옆을 지나쳐 달려서 선생님한테 혼날 때도, 시엘의 고개는 테온이 걷는 뱡향을 따라 자석처럼 움직였으니까.
‘왜지? …어, 테온이 인사한다!’
나를 발견한 테온이 내쪽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나도 양팔을 들어 테온을 향해 흔들었는데, 시엘이 한쪽 팔을 어정쩡하게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나를 봤다. 나는 시엘과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이건 또 왜지….
머릿속에서 촉이 찌릿하고 왔다.
‘설마!’
시엘이 테온한테 반했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내 기억 속 테온 황태자는 인기가 많았다. 비록 당시 시엘은 결혼한 상태였기에, 테온 황태자에게 호감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지만 시엘이 결혼 전에 테온을 만났더라면,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면 우리 테온은-.
‘상냥하고 잘생겼으니까!’
거기에 머리도 좋고 운동 신경도 좋았다. 또래 여자애들에게 인기 많은 남자애의 조건을 다 갖췄단 말이지.
‘…한번 알아볼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승마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시엘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칼립스랑 쌍둥이가 울타리를 붙잡고 있는 나를 동정하다 떠났고, 승마 선생님이 미안하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그냥 승마장 구경하는 거예요~”
“죄송합…. 꼭 백작님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오잉…….”
의도치 않게 사과를 받았다.
때마침 시엘이 승마장 밖으로 나왔다. 나는 승마 선생님한테 급히 인사한 뒤, 교육관으로 돌아가는 시엘을 뒤쫓아갔다.
“시엘 언니! 같이 가자!”
“아, 베리.”
평소와 달리 선뜻 곁으로 다가간 내 행동에, 시엘이 잠시 놀란 눈을 했다가 이내 상냥하게 웃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시엘의 금발이 눈부셨다. 쌍둥이의 외형이 천사 같다면, 시엘은 공주님 같았다.
“아까 칼립스한테 이야기 들었어. 키 때문에 말을 못 탔다며? 이렇게 귀엽게 입고 왔는데. 내가 다 아쉽다.”
과연. 누구에게나 친절한 시엘다웠다.
다른 내 기억에서도 시엘은 늘 착하고 상냥했다. 맡은 일에도 성실해서 임해서 다들 시엘을 좋아했다.
시엘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가문의 일을 잠시 돕다가 22살에 후작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런 시엘이 헤반트 큰아버지의 장녀라니. 믿을 수 없다니까.’
나도 헤실헤실 웃으며 시엘에게 말했다.
“괜찮아! 언니 타는 거 보면서 대리 만족했걸랑. 나도 몇 년 뒤에는 그렇게 잘 탈 수 있겠지?”
“그럼. 베리는 잘할 거야.”
“우와.”
어린애들이 친해지는 데에는 과장된 리액션만 한 것도 없었다. 나는 시엘의 말에 맞장구치며 때에 따라서는 박수나 엄지도 내밀었다.
그랬더니 시엘이 급속도로 내게 경계를 허물었다. 내 손은 어느샌가 시엘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시엘이 원래 이렇게 살가운 성격이었나?’
시엘은 상냥하지만, 다른 나는 시엘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칼립스와 쌍둥이한테 괴롭힘을 당할 때 시엘이 말려주는 정도의 관계.
그런데 지금은 시엘이랑 팔짱까지!
교육관에 도착할 때까지, 시엘은 나를 살갑게 대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아버지께서 개발하신 신약 평판이 좋지 않아서 힘드신가 봐.”
헤반트 큰아버지의 근황이라든지.
“베리는 케인 오빠 본 적 없겠구나. 오빠는 뭐든 잘해.”
아카데미에 있는 큰아버지의 장남, 케인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이 정도면 시엘한테 테온 이야기를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았다.
“오오. 그러면 시엘 언니는 테온 본 적 있어?”
“테온?”
“응~ 우리 아빠 제자! 내 친구야. 흑발에 잘생긴 애!”
내 말을 들은 시엘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걔 이름이 테온이었구나.”
어라?
그런데 시엘의 반응이 영 아니었다.
부끄러워한다거나, 적어도 테온에게 호감 있는 티가 날 거라 생각했는데.
시엘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건방지더라.”
“…테온이?”
우리 테온이 건방지다니? 순간 움찔했지만, 일단 말을 아꼈다. 시엘이 그런 의도로 말을 할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베리, 걔랑 친하게 지내지 마.”
“어…?”
시엘은 나를 보고 생글 웃으며 살갑게 말했다.
“우리는 친척이잖아. 걔는 남이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아는 시엘은 이런 편 가르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모두가 시엘을 좋아했는데…….
‘설마…….’
아니겠지?
갑자기 시엘과 팔짱을 낀 왼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
테온이랑 시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했다.
수업이 끝나고 돌멩이 하우스로 돌아가자, 테온과 제프리가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제프리는 상체를 숙이고 테이블 위 신문에 이마를 대고 있었지만.
“다녀왔습니다~!”
“베리 누나?!”
“베리, 왔어?”
제프리가 이마를 번쩍 들었고, 테온이 웃으며 나를 반겼다.
‘하나도 안 건방진데?’
시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테온은 이불을 널기 좋은 날의 포근한 햇살 같은 애였다.
“베리 누나~! 살려 줘어-. 테온 형이 누나가 하자고 한 건 끝까지 해야 한다면서-.”
제프리가 시름시름 앓으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제프리 옆으로 가서 테이블에 펼친 신문을 봤다. 이마를 박고 있던 지면에 지폐와 사과를 주고받는 남녀의 그림이 있었다.
“오! 제프리, 경제 용어 삽화 보고 있네? 멋있다~!”
“그, 그래? 멋있어?”
“응~!”
“에헴. 더 봐 볼까?”
붕붕. 다시 상체를 세워 앉은 제프리의 꼬리가 흔들렸다.
역시 당근이 최고다.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게 중요하다니까~
그보다. 지금 내게는 목적이 있었다. 나는 테온의 옆자리에 앉았다.
“테온, 테온.”
“…….”
그런데 테온이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 할 말이 있나?
“하고 싶은 말 있어? 먼저 말할래?”
“아니야. 무슨 일인데, 베리?”
테온이 고개를 저었다. 제프리가 삽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테온 형도 경제 기사 보고 있었는데.”
“오~ 테온도 경제 기사 봐? 재밌지? 그것보다 테온, 있잖아.”
“……응.”
“나만 들었다.”
다시 제프리가 키득거렸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나는 그냥 질문을 이어 갔다.
테온에게 최근 시엘을 만났냐고 물었는데, 테온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난 주말에 오전 훈련을 하고 돌멩이 하우스로 돌아오던 중이었다고 했다.
“갑자기 ‘얘’라며 나를 불러 세우곤,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 달라고 했어.”
“시엘 언니가?”
“응.”
“어, 그때 그 누나?”
제프리가 테온의 말에 아는 척을 했다. 오전 훈련이 끝난 뒤였으니까 제프리도 함께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프리도 봤어?”
“어어! 이상한 누나더라! 테온 형이 떨어트린 것도 아닌데, 막 주워 달래! 옆에 하녀도 있었는데!”
제프리가 성을 내며 말했다. 테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구체적인 목격자 진술까지.
“그래서? 테온이 손수건을 주워 줬는데, 시엘 언니가 뭐라고 했어?”
“어? 테온 형은 안 주웠는데?”
“엥?”
목격자 진술에 대한 신뢰도가 약간 하락했다. 시엘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테온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니까.
테온이 당연히 손수건을 주워 줬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테온을 돌아봤다.
“안 주웠어.”
“진짜? 왜?”
“주워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가 추궁한다고 생각했는지, 테온이 말끝을 흐렸다.
“베리 누나, 계속 들어 봐봐? 그래서 테온 형이 가던 길 갔거든? 나도 그냥 따라가고? 그랬더니!”
제프리가 흥분하면서 성을 냈다. 이럴 때는 앤이랑 똑 닮았다.
“신분도 낮은 게 건방지대!”
“끄악.”
나는 제프리의 말에 좌절했다.
제프리가 말하는 시엘은 내가 아는 시엘이 아니었다.
“…베리, 왜 그래? 주워 줬어야 했어?”
“아니이.”
테온이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엘은 내가 친척 중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었다. 시엘만은 다른 친척들 같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베리야, 내가 ‘절대’란 건 없다고 했잖느냐.”
할아버지가 내 모습을 보고 웃으시는 것만 같았다. 끄잉.
***
요셀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장실에 들어섰다.
며칠 새 그는 무척이나 수척해졌다. 어제는 마리안이 사업 이야기를 하러 에메랄드 하우스를 찾았다가, 요셀의 모습에 혀를 차며 나갔다.
“그러면 그렇지. 위자금은 의상실 지분 30퍼센트로 내놓으렴. 뭣하면 경영권을 넘겨도 좋단다. 내가 잘 키워 줄 테니까.”
드르륵. 드륵. ……철컥.
책상 아래 금고가 열렸다.
“……훌쩍.”
끄읍, 끕.
요셀은 휑한 금고 속을 보고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