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Save This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9)
아빠를 살려보겠습니다 9화(9/105)
할아버지를 본 순간, 나는 머릿속이 백지가 됐다.
기억 속의 나는 할아버지와 독대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피한 것도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나를 탐탁지 않아 하던 탓도 있었다.
큰일은 못 할 아이. 첫 만남에서 내려진 그 평가는 평생을 갔다.
‘응?’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머리가 부서지는 줄 알았는데 쓰다듬어지고 있었다. 이건 살아 있는 먹잇감에 침을 바르는 그런 행동일까.
“…뭐 하세요…?”
“…뭘 하긴!”
내 머리를 몇 번 토닥이던 할아버지는 퍼뜩 정신이 든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 방에서 무얼 하려고 했었는지 자세히 들어 봐야겠다. 따라오거라.”
“넹….”
총단장실이 직계들의 휴식 룸으로 사용된다지만, 그건 할아버지의 묵인하에 이뤄지는 일이었다. 방 주인이 무슨 일을 하려고 했냐고 물어보시면 힘없는 나는 따라가서 해명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시무룩하게 계단을 오르려는데, 테온이 내 옆으로 와 말했다.
“같이 가요.”
테온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테온도 나처럼 할아버지의 기백에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저 결의에 찬 눈은 뭘까.
같이 가기라도 했다간 할아버지에게 ‘사탕을 훔치려던 범인은 저였습니다.’ 같은 말을 할 것 같은데.
“할아버지랑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미래의 조력자를 할아버지에게 밉보일 수는 없지!
나는 테온에게 장난꾸러기처럼 웃어 주고 계단을 올랐다. 벌써 할아버지는 마지막 계단을 앞두고 있었다.
이크, 빨리 안 간다고 혼나겠다.
“뛰지 마라!”
“예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자, 복도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까 천둥 같던 트라벨 가주의 호통 소리를 들은 기사 아저씨들이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아가씨…?”
마리안 고모의 첩자 하녀, 앤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가, 나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인 듯했다. 직계에게 가주와의 독대는 큰 의미였다.
좋은 의미로는 한없이 좋을 수 있으니까. 자칫하다가는 친척들의 경계를-.
– 레이탄 쿼츠 트라벨의 숭고한 희생을….
순간 아빠의 관 앞에서 추모 연설을 하던 신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황급히 달려 총단장실 문에 가까워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하,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뭘?”
“베리가 총단장실에서, 할아버지 사탕을!! 훔치려고!!”
싸아아아아.
내 말에 사람들 사이에 적막이 감돌았다. 특히 렉스 아저씨는 부하에게 뭐라 말하던 자세 그대로 멈춰,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
“시끄럽다! 들어오기나 해라!”
봤지. 앤. 나 할아버지한테 혼나러 가…. 꼭 보고해 줘….
마리안 고모가 박수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와, 너무 좋다.
나는 사자 굴로 전진하는 생쥐의 심정으로 총단장실에 들어갔다.
‘흐잉.’
***
“내, 내 탓이다.”
굳게 닫힌 총단장실 문을 보며 렉스 총부단장의 안색이 머리카락처럼 회색으로 짙어졌다.
문 안쪽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휴식 룸에 있는 간식은 언제 방문할지 모르는 직계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구비해 놓는 것이었지만, 엄연히 트라벨 백작의 개인 물품이었다.
고작 사탕을 먹는 것 정도야, 평소라면 문제 되지 않을 행동이다.
그걸 트라벨 백작이 문제 삼은 게 큰 문제였다.
“제, 제 탓이에요.”
여성의 떨리는 목소리에 렉스가 옆을 돌아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하녀가 보였다.
“제가 아가씨께, 중정 벤치에 꼭 앉아 계시라고 말씀드렸는데. 혼자 훈련소를 돌아다니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급기야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하녀를 보며, 렉스는 눈을 끔뻑였다.
전장에서 포로로 잡힌 적군이 죄를 덜기 위해 하는, 반성 하나 없는 눈물 연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
“돌멩이 하우스의 하녀랍니다.”
“베리 아가씨를 모셔 가러 왔나?”
“아니요. 돌멩이 하우스에서 베리 아가씨와 여기까지 함께 온 모양이던데요. 아가씨께서 다리가 아프시다 하셔서 아는 기사를 찾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부하의 말을 들은 렉스는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다.
베리 아가씨께서는 혼자 오셨다고 하셨는데.
전후 사정은 모르겠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가. 트라벨 백작님께서 노하신 상황에.
또, 레이탄 도련님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렉스 또한 검을 잡는 자였다. 트라벨을 섬기는 그의 자긍심 상당 부분은 레이탄을 보며 키워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막막함에 렉스는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때마침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돌멩이 하우스에 보낸 부하가 돌아온 것이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레이탄 도련님께서 바깥 성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말해 놨으니 베리 아가씨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있지. 큰일.
렉스는 눈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보이는 건 그의 미래였다.
5. 작고 예쁜 거
총단장실에 들어온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고는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앉거라.”
“네….”
나는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 앉는 부분에 두 손을 짚었다.
흐읍. 높은 소파에 올라가려고 낑낑거리고 있자니, 칼렛 아저씨가 날 들어 앉혀 줬다.
등받이에 바짝 붙여 앉힌 탓에,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두 다리를 소파에 쫙 펴고 앉은 꽤 건방진 자세로 트라벨 가주와 독대했다.
으. 소파가 아니라 무거운 공기에 파묻힌 거 같아.
“칼렛, 저거나 갖다줘라.”
“네.”
할아버지가 내 뒤쪽을 가리키자, 칼렛 아저씨가 무언가를 집어 내 옆자리에 올렸다.
사탕이 잔뜩 든 유리 단지였다.
“사탕…?”
“몇 살이냐?”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맞은편 소파에 앉은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분명 아까 계단에서 일곱 살이냐고 혼잣말하셨던 것 같은데.
알면서 물어보시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한낱 생쥐에 불과한 내게 그런 발언의 자유는 없었다.
“이, 일곱 살인데요….”
“한데 왜 이리 작아? 나이를 속이면 못쓴다.”
“정말인데요…!”
쯧! 할아버지가 혀를 강하게 찼다.
“먹는 게 시원찮았으니 크질 않았나 보군.”
“아, 아뇨. 아빠가 매일 성장하는 어린이한테 맞춘 영양소가 풍부한 식단을….”
“그 헛똑똑이 놈이 뭘 안다고.”
“…잘 아는데요….”
“허, 쪼끄만 녀석이 말 한번 지지 않는구나. 제 아비를 똑 닮았어.”
할아버지를 언짢게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빠의 노력이 무시당하는 건 싫었다.
우리 아빠가 혼자서 날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할아버지도 아빠의 레시피 북을 보면 헛똑똑이 같은 소리는 쏙 들어갈걸! 억울해!
“한데.”
할아버지의 시선이 소파에 파묻힌 내게 박혔다. 안광이 도는 황금안은 보는 사람에게 절로 긴장감을 유발했다.
꿀꺽.
나는 조용히 침을 삼키고 손을 슬그머니 말았다. 그새 손바닥에 땀이 나 있었다.
– 당신 할아버지의 금고에 내가 찾는 것이 있다는군.
머릿속에서는 기억 하나가 맴도는 중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있고 난 뒤, 테온 황태자가 스물네 살의 나를 찾아온 기억.
황태자의 손에는 황궁으로 배달된 서신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자신이 죽은 후에 발송되게끔 한 서신이었다.
– 정황상 레이탄 쿼츠 트라벨의 죽음을 사주한 당신 친척과 공모자가 결탁했다는 결정적 증거일 가능성이 커.
– …할아버지께서 아빠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걸… 알고 계셨다는 건가요?
– 확인해 봐야지. 내가 움직이지.
– 아니요. 제가 할게요. 오늘 오후에 할아버지의 유언장 발표가 있어요. 그 시간에 제가 어디에 있는지 신경 쓸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다들 차기 가주가 누가 될지에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금고를 열고, 증거인 편지를 찾은 뒤, 정체를 모르는 사람의 검에 찔려 죽었는데….
‘할아버지는 왜 테온 황태자한테 그런 서신을 보냈을까?’
여전히 의문이었다.
친척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건 확실했다. 테온 황태자가 주운 범인의 소지품에서 트라벨 직계의 문양이 나왔으니까.
왜 할아버지가 테온 황태자한테 편지를 보냈지? 그러면 할아버지 자식 중 한 명이 아빠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텐데?
‘게다가 할아버지는 아빠가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셨잖아.’
할아버지는 아빠의 죽음이 수상하다는 다른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때는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아빠를 쓸모없는 망나니 자식이라며 볼 때마다 화를 냈으니까.
‘혹시 할아버지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았나?’
미워하는 자식의 죽음이니까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빠의 죽음에 대해 할아버지도 알아보고 있으셨다니. 그것도 다른 나와 테온 황태자보다 진실에 더 가까이 가 계셨다.
‘황태자에게 중요한 증거를 알려 준 건… 범인을 처벌해 달라는 의미…?’
나는 생각에 골몰했다.
그래서 불쑥 가까워지는 황금안을 보면서도, 저 눈이 아빠를 어떻게 봤는지, 그것을 고민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몸을 일으켜 테이블을 짚고, 가까이에서 눈을 맞춘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번에는 울지 않는구나.”
“…넹?”
“너, 이 할아비가 그리 무섭지 않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