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Take Responsibility for the Welfare of the Male Lead RAW novel - Chapter 4
(4)
* * *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시녀로서 아이들을 챙기랴, 녹턴에게 애 다루는 법을 가르치랴…….
정말이지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날도 똑같았다.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강아지풀, 강아지풀!”
아이들과 손을 잡고 대공저의 본관과 후관을 잇는 계단을 오르는데, 자네트가 발밑에 집중하지 않고 후원에서 꺾어 온 풀로 장난을 쳤다.
나는 그런 자네트가 실수로 넘어지지 않도록 타일렀다.
“공녀님, 계단을 오를 때는 발밑을 잘 봐야 해요. 자아, 제 손을 잡고…… 아야!”
그런데 그때였다. 내 어깨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산처럼 쌓인 새하얀 종이가 이리저리 휘날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영애.”
“정말 죄송합니다.”
종이뭉치를 들고 오던 두 남자가 내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사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이쪽이었다.
자네트에게 주의를 기울이다가 막상 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아니에요, 저야말로 죄송하죠. 같이 주워 드릴게요.”
나는 얼른 무릎을 꿇고 계단 이곳저곳에 흩어진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대들의 반응이 거셌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숙녀분께 그런 일을 시킬 정도로 불한당은 아닙니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 세계에서 귀족 영애들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모으는 일 같은 건 잘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귀족들은 제 머리도 제 손으로 안 빗고, 제 편지도 제 손으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때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건 저와 부단장님이 주울 테니 걱정 마시고…….”
“부단장님이요?”
그제야 내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두 명.
한 명은 비교적 중갑옷을 입고 있었으나 젊다 못해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나 소지품을 보아하니 하급 기사나 견습 기사 같았고, 또 한 명은 일상복에 가까운 경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제법 귀티가 났다.
눈이 마주치자, 갈색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가진 경갑옷을 입은 남자는 씩 웃으며 인사했다.
“페르닐 테이스벡이라고 합니다. 대공 전하의 보좌관이자 블랙웰 기사단의 부단장이죠. 페르닐이라고 불러 주십쇼.”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내가 지은 이름이라면 기억을 하고 있었을 테니, 내 작품에 등장한 적은 없는 인물일 것이다.
하급 기사 쪽이 앳되어 보인다고 했지만 그건 상대적인 거고, 이쪽도 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블랙웰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니!
내 남주의 기사단인데 블랙웰 기사단이 그리 만만할 리는 없을 거고, 이쪽이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쪽이 합리적이리라.
나는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데 대단하시네요.”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그쪽은…….”
기분 탓일까? 한순간, 그의 눈초리가 나를 읽어내릴 듯 날카롭게 느껴졌다.
“셔우드 영애 아니십니까?”
내가 언제 이렇게 유명해졌담?
하긴, 녹턴의 보좌관이 그의 약혼녀인 나를 못 알아보는 쪽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페르닐은 내 신원을 눈치채자마자 내 곁에서 자네트와 미하일을 찾아냈다.
“공자님과 공녀님도 계셨군요.”
그와 하급 기사는 소공녀와 소공자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어른 두 명이 다섯 살배기 둘에게 과도할 정도의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진지해 보였다.
이해는 됐다.
나와 달리 그들은 나이에 앞서 태어나자마자 주어지는 계급이 지위를 결정하는 세계에서 살아왔으므로.
이 아이들은 이 자리에서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지위로 치면 제일 높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인사를 한 뒤 페르닐이 다시 나에게 말했다.
“영애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공자님과 공녀님의 시녀이시자, 저희 주군의 약혼녀이시라고요.”
녹턴의 약혼녀. 제법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거짓 약혼 선언을 떠올리자 나는 새삼 민망해졌다.
“뭐, 물론 그렇긴 한데요…….”
내가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수줍음의 뜻으로 이해한 건지 페르닐이 알 만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하하! 이거 참, 주군과 백년가약을 맺을 정도로 간담이 큰 아가씨가 대체 누구신가 했더니, 의외네요. 저는 훨씬 강인한 여장부 같은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그러긴커녕 벌레 한 마리 못 잡으실 것 같지 않습니까.”
벌레 한 마리 못 잡아? 그 말에 나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유치원 선생님을 하다 보면 야외수업을 하기도 하고 창으로 벌레가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럼 벌레를 내 손으로 잡은 게 한두 번이겠는가.
위험한 벌이나 지네 같은 걸 애들더러 잡으라곤 할 수 없으니 내가 잡는 수밖에.
“기사씩이나 되셔서는 벌레 잡으실 수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벌레는 그 검으로 베시는 건가요? 용맹하게?”
“아, 기분 상하게 만들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전 그냥…… 예상 밖이라서 말입니다.”
내가 농을 치자 머쓱해졌는지 페르닐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제가 영애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 장차 제 상관, 대공비가 되실 분이신데요.”
나는 살짝 웃으며 아까 주웠던 서류들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시다면야, 예비 대공비로서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예비 대공비님.”
페르닐이 서류를 받아 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마침 하급 기사 역시 서류를 거의 다 주웠는데, 그 양이 심상치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그야말로 ‘일거리의 산’으로 보였다.
대체 어떤 일에 쓰이는 서류인 걸까? 라는 의문이 든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가만, 페르닐이 녹턴의 부관이라면, 설마 이게 전부 녹턴의 일?’
아까 그들이 가던 방향이 녹턴의 집무실 방향이라는 것이 떠오르자 생각은 곧 확신이 됐다.
급작스럽게 녹턴에 대한 동정심이 들었다. 대공은 참 바쁜 일이구나.
‘그런 와중에 애 다루는 법도 배우겠다고 나서다니, 기특하기도 하지.’
사실 그가 자처해서 한 것은 아니고, 내가 반강제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시키면 입으로는 투덜대도 잘 따르는 걸 보면, 그도 내심 이 일에 진지하다는 것 정돈 알 수 있었다.
하급 기사가 서류를 다 줍자 페르닐이 내게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서류 주워 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영애.”
“저도 반가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두 분 다.”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아이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죄송해요, 공녀님, 공자님. 많이 기다리셨죠?”
“아니야. 갠차나.”
착한 미하일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다섯 살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깊은 아이였다.
하나 자네트는 미하일만큼 순순히 내 사정을 이해해 주지 못했다.
자네트는…… 마치 오리라도 된 듯이 입이 댓 발 나와서는, 토라진 얼굴로 꿍얼거렸다.
“라리아는…….”
“네?”
“라리아는 쟤가 더 조아? 우리가 더 조아?”
이건 또 뭔 소리란 말인가.
지나가다 부딪혀서 잠깐 이야기 좀 나눴다고 애들에 대한 내 사랑을 의심받아야 한다니!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자네트의 삐진 얼굴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헤벌쭉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자네트에게 눈높이를 맞추곤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당연히 공녀님, 공자님이 제일 좋죠.”
“흥! 피료 업써!”
자네트는 미하일만큼은 날 따르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럴 때 보면 티만 안 낼 뿐 속으로는 날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그 솔직하지 못한 점이 너무 귀엽다.
나는 자네트를 끌어안고 그 볼따구를 마구 부비부비 해 버리고 싶었지만, 다행히(?)도 이성을 잃기 전에 아래층에서 메리가 달려왔다.
“아가씨! 시키신 심부름 다녀왔습니다.”
“아, 메리. 마침 잘 왔어.”
나는 아쉬움을 숨기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들과 메리와 함께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어떻게 생각하냐?”
서류 더미에 턱을 누른 채 적막한 복도를 걷던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상관인 페르닐 테이스벡이 자신을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기사는 눈치껏 그가 아까 본 그 영애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대답했다.
“어, 뭐랄까……. 독특하신 분 같았습니다. 순해 보이지만 매우 당차시던데요.”
기사는 아까 보았던 영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늘하늘한 연갈색 머리카락, 둥근 눈매와 청록빛 눈. 전형적인 귀족 영애의 모습.
하지만 그가 아는 귀족 영애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스스럼없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제 손으로 서류를 줍는 귀족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가 하면, 페르닐의 다소 무례했던 농은 시원하게 받아치기도 했다.
어딜 보나 조신한 귀족 영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 아니 오히려 썩 매력적으로까지 보이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페르닐은 그의 대답에 만족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한스. 네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은…….”
그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 영애가 정말로 주군과 사랑에 빠졌을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충격적인 ‘약혼 선언’ 사건 이후로, 주군이 수를 쓴 것인지 언론은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소문은 끊이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블랙웰 대공가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 한복판에 있었으니까.
‘약혼 선언’ 직후에는 블랙웰의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를 근거로 들어 약혼녀가 야심가라는 소문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녹턴 블랙웰은 단순한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손에 넣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광증을 가진 괴물이 아닌가. 제 친부마저 찢어 죽일 정도로.
게다가 그가 사랑에 빠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도 했다.
지금껏 녹턴의 미모, 부, 권력을 탐하여 그를 유혹한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수작에 넘어간 적이 없었다.
많은 여인들이 대공의 애인이라는 얄팍한 지위라도 얻고 싶어 안달했지만 녹턴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한 여성에게 자신의 곁을 내준 것이다.
그것도 블랙웰의 명성이나, 이제껏 그를 유혹해 왔던 수많은 여인들에 비하면 지극히 보잘것없는 여성에게.
그래서 지금 주를 이루는 소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냉혹한 괴물 녹턴 블랙웰이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
괴물 대공은 사교계에서 존재감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백작 영애, 라리아 셔우드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찾아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라고.
소문은 호사가들의 입과 입을 거치며 끝도 없이 낭만적으로 변해 갔다.
용감하고 독특한 매력이 있는 귀족 영애와 괴물 대공의 러브스토리라니, 이 이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이야기가 오죽 인기를 끌었으면, 심지어 일부 극장들에서는 이 커플을 소재로 한 연극을 제작 중이라고까지 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녹턴의 입김이 닿는 신문에는 토씨 하나 나오지 않지만, 외부 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엔 소문을 듣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신문만 읽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라리아가 이 일을 아직 모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찌 됐건, 그 소문처럼, 영애와 주군이 사랑에 빠졌느냐고?
그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었던 기사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 그, 그건…….”
기사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자 페르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럼 내 의견부터 말해 볼까. 일단 내 생각은 ‘아니다’ 야.”
기사는 자기 의견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페르닐이 뜬소문을 넘어 거의 정설이 되어 가고 있는 ‘세기의 사랑설’을 부정하자 깜짝 놀랐다.
“예? 그걸 어떻게…….”
기사가 당황하자, 페르닐이 히죽 웃었다.
“네가 아직도 모르는구나. 난 여태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 중에 주군의 곁에 제일 오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주군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겠지.”
“아, 예…….”
“그런 내가 단언하건대…….”
갑자기 페르닐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군은 사랑에 빠질 인물이 아니야. 결코. 그 인간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믿을 바에는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걸 믿겠어.”
“그…… 그렇다면…… 부단장님께서는 역시, 이 결혼이 정략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에둘러 말했지만 라리아가 부와 권력을 노리는 야심가냐는 질문이었다.
“뭐…… 그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에이…….”
“뭐, 에이? 이봐, 난 주군 전문가지 그 영애 전문가가 아니라고. 오늘 처음 본 영애의 마음속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그쪽이 더 가능성이 있긴 하지. 주군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니까 말이야. 주군은 굳이 여자를 곁에 둔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보다는 야심을 가진 여자를 선택할 사람이야.”
“하지만, 보좌관님……. 소문에 의하면, 셔우드 영애가 주군과 공자님, 공녀님의 관계가 좋아지도록 주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셔우드 영애가 야심가라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결혼한 뒤 남편의 사생아는 새 부인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 당연한데요…….”
백번 맞는 말이었다. 제국의 관습상 친자식도 아닌 사생아를 어여삐 여기는 귀부인은 없었다.
되레 자신 혹은 자신의 자식들의 입지를 걱정해 박대하거나 천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기사의 말에 청산유수처럼 술술 말을 쏟아 내던 페르닐도 말문이 막혔다.
그는 고민하는 듯 끙끙 앓는 소리만 내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그 영애가 시녀이기만 할 때라면 모를까, 장래의 대공비가 될 지금까지도 공자, 공녀님을 진심으로 위할 것 같지는 않아.”
“예?”
블랙웰에 들어온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녀, 게다가 지금은 대공의 약혼녀이기까지 한 그녀가 미하일, 자네트를 정성으로 보살핀다는 소문은 대공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 보이고, 들리는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퇴근조차 하지 않고 소공녀, 소공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약혼 선언이 있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단순한 사용인에서 장래의 대공비로 지위가 오른 뒤에도 변치 않는 그녀의 성실함과 아이들에 대한 정성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는 했다.
기사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짜식. 원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선량하고 순진하게 생겼지만 그 속은 어떤지 어떻게 알겠냐고.”
페르닐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으스댔다.
“게다가 주군과 공자, 공녀님이 가까워지는 건…… 아마 불가능할걸. 주군의 곁에 제일 오래 있었던 나도 주군께서 정색하시면 오금이 저리는데, 그걸 5살이 어떻게 참아내겠어. 테오의 7살 먹은 아들이 주군과 눈이 마주치자 실금했던 일 기억 안 나냐?”
“그건, 그렇지만…….”
“어쩌면 그 영애도 그걸 알고 위장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봐라, 내가 이렇게 노력했다. 내가 이렇게 약혼남의 사생아 자식들에게도 자비로운 대공비다— 라고.”
사실 굳이 말하자면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그 정도로 주군은 두려운 존재였고, 귀부인이 남편의 사생아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체 무슨 연유 때문일까.
기사는 페르닐의 추리에 진심으로 동조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랬다.
그 영애와 마주친 시간은 고작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페르닐의 추리가 틀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보좌관님의 추측이 맞다면, 그건…….’
아니면 그의 추리가 틀렸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공자님과 공녀님이 너무 안쓰럽잖아.’
어린 시절 친부를 잃고 괴물 대공에게 입양된 어린아이들.
사랑을 듬뿍 받고, 그저 행복하기만 해야 할 나이에 사랑도, 행복도 손에 넣지 못한 5살짜리 꼬마들.
그 아이들이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받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이쿠, 늦었네. 야, 얼른 가자. 주군께서 잔소리하실라.”
“예…… 옙!”
안타까운 현실이었지만 자신이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기사인 자신은 그저 주군의 선택을 믿고 충성을 바치는 수밖에.
* * *
“그러시면 안 돼요!”
저녁 시간, 늘 고요하던 녹턴의 집무실에 내 목소리가 빽 하고 울려 퍼졌다.
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서 지른 것이 아니다. 그냥, 너무 놀라서 그랬을 뿐이다.
“아휴, 애를 그렇게 짐짝 들듯 들쳐 업으시면 어떡해요?”
나는 녹턴에게 도도도 달려가 그가 들쳐멘 것을 뺏어 들었다.
녹턴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빼앗겨 비어 버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
요즘 나와 녹턴은 거의 매일 저녁마다 만나고 있었다. 바로, 그에게 아이를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오늘 그가 배우고 있는 것은 바로 ‘아이를 안는 방법’.
나는 녹턴에게 헝겁 인형을 들려 주고 안아 보라고 했는데, 그는 그것을 무슨 짐짝이라도 되는 양어깨에 들쳐메는 게 아닌가!
인형이라 천만다행이지, 저게 자네트나 미하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으으…….
나는 인형을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 이 인형이 짐이나 물건이 아니고 진짜 아이라고 생각하세요! 전하께서 손가락 끝으로 톡 하면 어딘가 부러지는 연약한 아이!”
녹턴은 불만스러운 듯 제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가 투덜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말고 대체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건가?”
그가 아이 안는 법을 잘 모르는 것도 사실 이해는 갔다.
늘 기계처럼 일만 한 그였다. 사교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여자 손 한 번 안 잡아 본 그였으니 언제나 보고 만나는 사람이라곤 기사들 같은 튼튼한 장정밖에 없었을 거다.
‘자기보다 연약한 존재를 볼 일도, 만날 일도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평생 공부와 훈련과 일만 해 왔을 그가, 삶에서 즐거움이라곤 거의 누려 보지 못했을 그가 조금 짠해졌다.
그에게 동정심을 품으니, 내 말투도 자연스럽게 누그러졌다.
“자, 보세요.”
내가 인형을 품에 안아 보였다. 한 팔로는 엉덩이를 받쳐 들고 다른 한 팔은 인형의 등에 안정감 있게 둘렀다.
아이를 달래듯 그 등을 살살 위아래로 쓸어 주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주 능숙한 솜씨였다.
잠시 아이를 안고 어르는 시늉을 하던 나는 인형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셨죠?”
“…….”
내 시범을 본 녹턴은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안는 방법도 있었다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귀엽게 느껴져서 나는 더욱 활짝 웃었다.
“자, 다시 해 보세요.”
녹턴은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곧 인형을 다시 안았다. 흠, 확실히 짐짝 취급하던 아까보단 나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엉덩이를 제대로 받쳐 줘야죠. 등만 안으면 아이가 불편해해요.”
“……이렇게 말인가?”
녹턴이 손을 움직였지만 여전히 위치가 적당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기가 아니라…… 아!”
그때, 자세를 제대로 가르쳐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각 손 위에 내 손을 포갰다.
“자, 한 손은 여기에 놓고요, 다른 손은 여기에…….”
나는 그의 손 위치를 조정해 주곤, 덤으로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까지 흉내 내어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등을 쓸어 주는 거예요. 상체를 좌우로 흔들어 줘도 좋고요…….”
신이 나서 떠들어 대던 나는, 뒤늦게서야 그가 굳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넓은 등이 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늘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희던 그의 귀와 목은 온통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기분 탓인지, 내 몸에 착 붙은 등이 매우 뜨거웠다.
그제야 나는 내가 그에게 지나친 신체 접촉을 해 버린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 모습은…… 누가 봐도 백허그가 아닌가!
“엄마야!”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기겁하며 펄쩍 하고 그의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죄, 죄송해요. 저, 제, 제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요. 저는 그냥 안는 방법을, 아,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가 무슨 반응을 할지 충분히 예상이 됐다.
원작에서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조연 여캐가 녹턴을 유혹하기 위해 그의 팔에 팔짱을 끼는 장면.
그때 녹턴은 주저 없이 그녀의 팔을 쳐 내며 그녀의 노골적인 유혹을 비웃었었다.
그러니 그라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꼬는 말을 다다다 쏘아붙이거나 하겠지.
여성의 접촉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 그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그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
내 예상보다 더 충격을 받았던 걸까?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귀와 목이 붉은색에서 본래의 색깔로 돌아왔다.
그제야 녹턴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머뭇거리고 있던 내가 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하지만…….”
“신경 쓰지 말라니까.”
“네.”
동상 걸릴 정도로 차갑고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태도에도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
원작에서처럼 비꼬거나 비웃지 않다니! 역시 아무리 성격 나쁜 그라도, 일부러 그런 것과 실수로 그런 것 정도는 구분하는 것일까?
“그, 그럼…… 계속할까요?”
나는 그에게 아이를 안는 방법을 계속해서 가르쳤다.
처음에는 애를 무슨 짐짝 취급해서 날 기겁하게 만든 그였지만, 몇 번 연습을 하고 나니 제법 그럴싸해졌다.
“잘하셨어요! 다음번에 공녀님이나 공자님을 안아 주실 때, 딱 이렇게만 하시면 되겠어요.”
내가 아이들을 언급하자 녹턴의 안색이 순간적이지만 어두워졌다.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쓸데없는 수고를 하는군.”
“네?”
“그 녀석들이 달려와 내 품에 안길 리가 없지 않나.”
아무래도 아이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을 내심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아도, 속으로는 아이들을 몹시 신경 쓰고, 아끼고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니에요. 분명 금방 그렇게 될 거예요.”
“…….”
“저번에 공녀님, 공자님과 모여 과자를 먹었던 때 기억나세요? 사실은, 그때 공녀님과 공자님께 반응을 물어봤는데 즐거우셨던 모양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전하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셨는걸요.”
아이들의 반응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살짝 떨리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직시하며, 내가 말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순간 녹턴의 보라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하.”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영애에게는 계속 어리광만 피우게 되는군. 내 꼴이 꽤 우습겠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우린 동지잖아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동지?”
“네! 독신 동지 말이에요. 잊으셨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기분 탓이었을까? 그가 갑자기 움찔 굳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그래. 그랬지.”
녹턴은 몇 초 정도 뒤늦게서야 대답했다.
‘까먹고 있었나 보구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그리고 나는 그의 반응을 그렇게 해석했다.
오늘의 수업도 끝났으니, 나는 평소처럼 그에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문고리를 잡으려고 하는 그때, 그의 손이 내 손을 가로막았다.
놀란 내가 올려다보자 내 눈높이보다 한참 높은 위치에 있는 그의 눈이 보였다.
“데려다주지.”
또다. 지난번, 복도에서 마주쳐서 날 방으로 데려다준 이후로 두 번째였다.
저택 내에 위험한 것이 있을 턱도 없는데 굳이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니. 물론 그의 제안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그를 꽤 좋아하니까. 그는 내 창조물이니, 어떤 의미로는 내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저건 아마 솔직하지 못한 그 나름의 감사 표현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와 함께 걸었다. 내 침실은 그의 집무실에서 한 층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리 멀지 않았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문 앞에서 인사했다.
어쩐지…… 어떠한 감정이 가슴 속을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쉬움이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복도를 걷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도.
그와는 집무실에서 여러 번 만났지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푹 자 두는 게 좋을 거야.”
그가 웃음기라곤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지만,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도 두 번째였다.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전하도 푹 주무세요.”
그런데 그때였다.
이 별거 아닌 인사말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렇게 헤어지면 나는 그의 말대로 침대 위에서 푹 자겠지만, 그는 내 말 대로 잠들지 못할 것이었다.
나와 달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가까스로 잠에 든다 해도 아침까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리라.
그것은 그의 끔찍한 과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렇게 만든 거잖아.’
그래, 그랬었다. 왜냐하면, 상처 입은 남주인공이 좋으니까.
상처 입어 가시를 드러내는 남주인공에게 다정하고 따스한 여주인공이 다가가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 좋으니까.
그리고 남주인공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빛을 보여 준, 행복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여주인공에게 집착하고 함께 파멸하는, 그런 피폐물을 쓰고 싶었으니까.
그래, 고작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인생을 망친 거야.’
내가 쓸 때는 고작 수천, 수만 개의 글자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지금 내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는 이제 글자 따위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숨을 쉬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
그리고 그의 삶을 글자 몇 개로 망쳐 놓은 내게는 책임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저지른 과오를 조금이라도 되돌려 놓아야 할,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책임이.
그 사실을 깨닫자, 뱀과 같은 죄책감이 슬그머니 등골을 타고 기어올랐다.
꽉 쥔 주먹 속에 땀이 고였다.
“저, 전하!”
나는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녹턴을 말로 붙잡았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창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달빛 아래에서 그의 흰 살결이 눈부시게 빛났다.
“뭐지?”
그가 되물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기 위해서 몰래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방긋 웃었다.
“아, 저…… 별건 아니고요.”
“……?”
그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하지만 나도 여기서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는 없었다.
그야, 지금부터 내가 그에게 할 제안은, 아주 이상한 제안이니까!
나는 이 말이 최대한 그의 귀에 이상하게 들리지 않길 빌면서 말했다.
“저…… 제가 전하를 재워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뭐라고?”
이런, 틀렸다. 완전히 이상하게 들린 모양이다.
평소 비웃음 외에는 감정표현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얼굴에는 미심쩍은 기색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내가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영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동교육학을 배운 사람은 아동의 불면증뿐만 아니라, 성인의 불면증도 진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 그건 아니고요.”
나는 잠깐 사이에 생각해 둔 변명거리를 꺼냈다.
“전하께서는 저녁마다 라벤더 차를 드시잖아요. 라벤더는 긴장 완화, 진통 등의 효과가 있어서 숙면을 위해 많이 마시는 차고요. 게다가 전하의 집무실 책장에 불면증에 대한 책들이 있고요. 이것들을 가지고 추측했을 뿐이에요.”
내 말에 녹턴은 한순간 드러냈던 경계를 풀었다.
“추리력이 꽤 쓸 만하군, 안 그래? 어쩌면 영애의 천직은 시녀가 아니라 탐정일지도 모르겠어.”
그가 진심인지 비꼬는 건지 모를 어조로 말했다.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보좌관과 집사 및 제일 가까운 몇 명만이 그의 불면 증상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애가 나를 어떻게 재우겠다는 건지 궁금하군. 제국의 그 어떤 명의도 이 불면증을 고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는 그렇게 빈정거리면서도, 결국…….
“따라와.”
나를 향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옆에 따라붙어 함께 걸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침실에 도착했다. 녹턴이 문을 열고 나를 들여보냈다.
“실례합니다.”
내 눈에는 내가 쓰는 방도 충분히 으리으리한 대궐처럼 느껴졌는데, 그의 방을 보는 순간 그곳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실은 그렇게나 거대하고 각종 값진 가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최고의 관리를 받는지 먼지 한 톨 없었고, 좋은 향기까지 났다.
주인의 취향인지 자주색으로 꾸며져 있는 방은, 장식물은 적은 편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꾸미지 않은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이 느껴졌다.
“잠시 기다리도록.”
녹턴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아마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이리라.
나는 그가 권한 자리에 앉아서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 남자 방은 처음 봐.’
생각해 보니, 그의 집무실은 여러 번 들락거렸지만 침실은 처음이었다. 이유 없이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곧 녹턴이 돌아왔다. 편한 가운 차림이었다.
가운은 편의성을 위해 헐렁하게 만들어졌지만 그의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근육으로 꽉 짜여 있는 몸매는 숨겨지지가 않았다.
그는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디 한번 들어 볼까. 셔우드 영애가 날 어떻게 재울 셈인지.”
그의 낮은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나른하게 들렸다.
의식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심장이 뛰었다.
갓 씻고 나와 편한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취향의 미남이라니…… 정말이지 의식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진정하자, 저 인간이 나중에 여주인공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해 봐.’
나는 나 자신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면이라도 걸듯 그 생각을 계속해서 반복해야만 했다.
떨리던 기분이 좀 나아지자, 내가 말했다.
“노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노래?”
“네. 제가 이래 봬도 자장가 5분이면 어떤 애든 재울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녹턴이 픽 하고 비웃었다. 연습의 결과인지, 그는 비웃는 얼굴조차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가까스로 진정시킨 내 심장을 순간적으로 들었다 놓을 정도로.
“이봐, 영애.”
그가 낮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어떤 노력까지 했는지 영애가 반의반이라도 알게 되면, 감히 그런 제안을 하진 못했을 거다.”
반의반이라도 알게 되면? 아니, 당연히 안다.
모를 리가. 그야, 내가 바로 그에게 불면증 설정을 준 장본인이니까!
‘잠에 들기 위해 최고의 명연주자나 오케스트라 악단까지 섭외해 봤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는 장면이 있었지, 아마.’
그의 반응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명연주자와 오케스트라 악단의 아름다운 연주에도 잠들지 못했는데, 고작 평범한 귀족 영애의 자장가에 잠에 들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그야, 나는 이 소설의 원작자니까.
그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자신보다도.
“그럼 기왕 노력하시는 김에 제 노래도 한번 들어 보시는 게 어떠세요? 딱 5분만요. 5분만 들어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저를 쫓아내시면 돼요.”
내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말하자,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마음대로 해. 어차피 시간 낭비겠지만.”
결국, 녹턴은 허락의 뜻을 표했다.
그렇게 해서 녹턴은 침대에 눕고 나는 그런 그의 곁에 앉았다.
마치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처럼.
나는 침대에 길게 누운 녹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몰래 심호흡했다.
내가 어떤 애든 자장가 5분이면 재울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한 건 맞지만(유치원 낮잠 시간마다 아주 쏠쏠하게 덕을 보았다.), 정말로 오로지 이 능력만을 믿고 그를 재우겠다고 덤벼든 건 아니다.
그가 애도 아닌데 고작 이 정도의 능력으로 어떻게 재우겠는가?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그 능력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었다. 바로, 원작자로서의 그에 대한 지식.
‘지금부터 쓸 방법은 모 아니면 도야.’
나는 생각했다.
‘성공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망하거나.’
“그럼, 시작할게요.”
내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녹턴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별빛에 그의 긴 속눈썹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헛기침을 한 뒤, 떨리는 마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내가 고작 두 소절을 부른 찰나, 녹턴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곧장 몸을 일으키곤 내게 으르렁거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부릅뜬 눈과 어금니까지 드러날 정도로 양옆으로 찢어지는 입술. 누가 봐도 명백히 분노를 담은 얼굴.
하지만 나는 그의 눈에서 분노 외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경악과 공포였다.
자장가 두 소절을 듣고 이렇게 화를 내다니. 과민반응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가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 그의 트라우마를 정면에서 헤집어 놓았으니까.
녹턴은 동요를 숨기지 못하며 제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시퍼런 안광이 형형한 눈동자가 드러나 나를 쏘아보았다.
“영애가, 어떻게 그 노래를 알고 있는 거지? 아니, 그 노래를 지금 내 앞에서 부르다니…… 대체 의도가 뭔가?”
그런 그를 나는 그저 담담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많이 아팠겠지. 두렵겠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건드렸으니까.’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어.’
녹턴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이 노래는 바로…… 자네트, 미하일의 친부와 관련되어 있다.
녹턴의 트라우마 그 중심에 있는 인물, 아이들의 친부.
그는 어린 시절 가까운 사이였던 녹턴에게 이 노래를 몇 번이나 들려주곤 했다. 음유시인에게서 배웠다면서 말이다.
‘녹턴의 불면증 역시 ‘그 사람’과 관련된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니……. 내가 지금 녹턴에게 이 노래를 불러 준다면, 확률은 반반이야. 녹턴이 ‘그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려 푹 잠들거나, 아니면…….’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주먹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트라우마가 오히려 자극되거나.’
이것은 도박이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원작자인 나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박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도저히 그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여주인공이 와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 전까지 괴로움에 몸부림치도록 내버려 두는 일 같은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나는 의도를 숨긴 채, 최대한 순진한 얼굴을 가장하며 말했다.
“의도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건 그냥 저희 영지에서 유행하던 민요일 뿐이에요.”
“민요…… 라고?”
“네. 어른들이 아이를 재울 때 흔히 불러 주곤 했어요. 매혼 지역에서 온 음유시인이 퍼뜨렸다고 들었는데, 전하께서도 그 음유시인에게 이 노래를 들으셨나요?”
차분한 내 태도에 녹턴은 조금쯤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그는 기억을 되짚는 듯 제 이마를 짚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제길…….”
나는 안도의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녹턴은 제 앞머리를 다시 헝클어뜨리곤, 도로 자리에 누웠다.
“어쨌든 그 노래는 부르지 마라. 나는 그게 싫으니까.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이야…… 역시 실패인 걸까?
그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공략해서 불면증을 해결해 보겠다는 내 계획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쉬움과 시무룩함을 숨기지 못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신가요…….”
실망한 내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누운 채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실패한 것 같으니 일어날까, 그의 불면증을 고쳐 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어울리지 않는 꼴을 하고 있군, 영애.”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눈앞으로 톡 떨어졌다.
“5분이면 누구라도 재울 수 있다고 했던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녹턴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팔베개를 하곤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서 약간의 희망을 느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록 10살 미만의 어린이 한정이긴 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얘기는 굳이 지금 꺼낼 필요 없겠지.
내 얼굴이 밝아지자, 녹턴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결심이라도 한 듯이 말했다.
“딱 5분 주겠다. 5분 동안만 마음대로 해 봐라.”
믿을 수가 없었다. 녹턴은 지금 내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것도, 인생의 트라우마를 자극당한 직후에…….
내게 자신의 상처를 헤집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이다.
틀림없이 고통스러웠을 텐데. 두려웠을 텐데. 고통도 두려움도 감수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나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전하!”
나는 감격에 겨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누워 있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할 테니까요!”
“……5분 뒤엔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이런 시간 낭비 따위 그때는 정말 끝이야.”
내 반응이 부끄러웠는지, 그가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5분이면,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그 결과가 드러나기에는 충분할 테니까.
나는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해 큼큼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지만 잠깐만 참아 주세요. 이 노래가 정말 재우는 데엔 직빵이거든요.”
녹턴은 누운 채로 한쪽 팔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숨결의 움직임을 따라, 그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건 알고 있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노래를 시작했다.
녹턴의 어린 시절,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자네트와 미하일의 친부가 그에게 몇 번이고 불러 주었던 노래.
위로와 위안을 담은 평온한 곡조의 이 노래가, 녹턴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지치고, 괴로웠을 그를 위해, 나 나름의 위로의 마음을 담아서. 그가 이제는 진정한 평온과 행복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내가 그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의 뜻을 담아서.
이런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나는 누워 있는 그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같은 노래를 몇 번을 불렀을까, 나는 마침내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소절을 뱉어 냈다.
5분 동안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서 그런지 목이 칼칼하고 뻑뻑했다.
나는 작게 기침하며, 속삭였다.
“전하……?”
나는 녹턴을 내려다보았다.
길게 누운 그의 몸 아래로 잔뜩 주름진 시트가 보였다. 그가 괴로움을 참아 내기 위해 애썼던 흔적들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가운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한 식은땀이 배어들어 축축했다.
침대 시트에서 그의 몸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녹턴의 검은 속눈썹은 편안히 내려앉아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쌔근쌔근하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올라왔다가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에 든 것이다. 아무런 두려움도, 괴로움도 없는 듯한 편안한 얼굴로.
내가 한 일임에도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흥분감으로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성공했다.’
내가, 아니, 나와 그가 함께 노력한 결과였다.
내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른다 해도, 그가 과거의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행여 그가 깨어날까 봐, 나는 숨소리마저 작게 낮추었다.
나는 두 손으로 손과 입을 가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서, 까치발로 그의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침실 문을 닫기 직전,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는 듣지 못할 인사말을 속삭이며, 나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 * *
그날부터, 나는 매일 밤마다 녹턴의 침실로 불려 가게 되었다.
“잘 자요, 공녀님, 공자님.”
나는 매일 밤마다 아이들을 재운 뒤, 녹턴의 침실로 향했다. 아이들을 재운 다음에는 그를 재우는 것이 나의 당연한 일과가 되었다.
그 어떤 명연주자의 연주를 들어도, 어떤 명의의 약을 먹어도 잠에 들 수 없었던 녹턴은 이제 내 자장가를 들으면 5분 만에 숙면을 취했다.
“좋은 밤입니다, 대공 전하.”
침실에 들어선 나는 제국의 예법대로 치마폭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오늘도 가운 차림으로 날 기다리던 녹턴은 턱을 괴고 있다가 툭 내뱉었다.
“두 시간 전에도 만났는데, 쓸데없는 예법에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맞는 말이다. 고작 두 시간 전에만 해도 그를 집무실에서 만나 아이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어쩐지 점점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애들을 메리에게만 맡겨야 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메리는 흔쾌히 이해해 주었다.
“주인님의 부르심이 우선입니다. 어서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아이들을 보살피던 메리의 뒷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오늘의 일을 더 열심히 할 힘이 생겨나고는 했다.
녹턴이 침대에 누웠고, 나는 그의 곁에 앉았다.
처음 그의 방에 들어서고 그의 침대에 앉았을 때는 꽤 가슴이 떨렸던 것 같은데, 그것도 몇 주를 반복하니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내가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하던 찰나였다.
“셔우드 영애.”
녹턴이 눈을 감은 채 나를 불렀다. 갑작스런 부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요즘 근무 시간이 지나치게 길지 않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원래 내 업무는 아이들을 깨우면서 시작하고, 아이들을 재우면서 끝났다.
하지만 요즘은 거기에 녹턴을 재우는 일까지 추가되었다. 더군다나 그에게 아이 돌보는 법을 가르치는 일까지.
일반적인 시녀가 하는 업무 수준은 이미 넘은 지 오래였다.
녹턴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뇨, 전 원래 잠이 적어서 괜찮아요.”
이건 사실이었다. 나는 원래 잠이 적은 편이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항상 무언가 일을 해야 하는 타입이었다.
아마 아이 돌보는 법을 가르치거나 녹턴을 재우는 업무까지 담당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알아서 다른 일을 찾아서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녹턴은 내 대답에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헛소리.”
톡 쏘아붙이면서, 그는 감은 눈을 뜨곤 나를 바라보았다. 미간에는 불만을 뜻하는 깊은 주름이 팬 채였다.
“블랙웰에서 사용인을 과로시킨다는 오명이 생기는 건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찌하란 말인가.”
‘내가 과로할까 봐 걱정하고 있구나.’
그의 곱지 않은 말에도 괜히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입가에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녹턴이 말을 이었다.
“영애의 현재 공식 출근 시간은 오전 7시였지.”
“네.”
그렇다. 아이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오전 7시로 정해져 있으니까.
참고로 7시에 일어나게 되어 있는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나는 매일 5시 30분에 일어나곤 했다.
그래야만 씻고 단장하고 아침을 먹은 뒤 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녹턴이 말했다.
“앞으로는 두 시간 더 늦게 출근하도록.”
그건 내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었다.
24시간 아이들의 옆에 착 붙어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게 내 일인데, 아이들이 일어나는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늦게 출근하라니!
“하, 하지만…… 그럼 공녀님과 공자님의 조찬은 어떻게 도와드리죠?”
“오전 7시부터 9시까지만 아이들을 돌볼 하녀를 두 명 더 고용하도록 하지.”
녹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 정도면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 영애.”
나는 깜짝 놀랐다. 사용인이 휴식을 충분히 취하도록 인력을 더 고용하는 고용주라니!
제국은커녕, 현대 민주주의 사회인 한국에서도 이런 고용주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일반적인 고용주들이란 임금을 아끼기 위해 소수의 사용인을 과도하게 부려먹는 것을 선택하기 마련이니까.
우리 유치원은 초등학교에 딸린 병설 유치원이었기에 형편이 그나마 나았지만, 사립 유치원에 취직한 과 동기들은 언제나 지나친 업무 강도에 고생하곤 했다.
나는 놀라 입을 벌리고 그를 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전하.”
“그만. 대공의 명령이다. 감히 불복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씨알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생각했다.
‘물론 나야 고맙지만……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녹턴은 행동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일이 있은 뒤 고작 이틀 만에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파트타임으로 아이들을 돌볼 하녀 두 사람을 고용했다.
덕분에 2시간이나 늦잠을 잘 수 있게 되긴 했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늦잠을 자 보려고 해도 늘 일어나던 시간에 눈이 떠졌다. 말똥말똥 뜬 눈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자니 몸이 근질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고, 부산스레 움직여야 할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애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없어서 울거나 밥투정하면 어떡하지? 뛰다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결국 나는 언제나와 같은 시간, 7시에 출근했다.
“아니, 아가씨!”
7시에 맞춰 아이들의 방에 나타나자 파트타임 하녀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가씨의 근무 시간은 9시부터인 줄 알았는데요…….”
하녀들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맞아. 그렇긴 한데, 쉬려고 해도 침대가 가시방석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일찍 나오기로 했어.”
“아가씨…….”
놀라는 하녀들을 뒤로하고, 나는 자네트와 미하일을 깨우러 갔다.
“자, 공녀님, 공자님. 일어나셔야죠? 벌써 아침이에요.”
“우웅, 라리아…… 나, 5분 마안…….”
그렇게 해서, 별달리 변한 것은 없었다. 밤에 조금 더 늦게 자게 되었다는 것을 빼고는.
‘이 정도쯤은 괜찮아. 난 체력이 좋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정 피곤하면 애들이 낮잠 잘 때 같이 자면 되는 거고.’
다만, 메리는 정해진 대로 9시부터 출근해도 좋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면서 나와 같이 원래대로 7시에 출근했다.
메리는 정말 좋은 하녀이자 친구였다.
게다가 녹턴이 단잠을 자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잠이라도 잘 자게 된 게 어디야.’
그가 ‘그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다.
6년 동안 무슨 짓을 해도 고칠 수 없었던 불면 증상을 고쳐 준 것만으로도 나는 무척 뿌듯함을 느꼈다.
‘그의 삶을 망쳐 놓은 것은 바로 나니까, 내가 그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해.’
원래라면 앞으로 9달 뒤 나타날 여주인공이 그를 구원해야 하지만…… 나는 도저히 9달 동안이나 그와 아이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녹턴은 분명 여주인공을 사랑하게 될 거야. 그만큼이나 여주인공은 아름답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니까.’
이 로맨스 소설을 쓴 내가 보증하건대 그들의 사랑은 트루럽이자 세기의 사랑이었다.
사건 몇 가지가 바뀐다고 이 작품의 근간인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이 변할 리는 없으리라.
‘또 여차하면 내가 큐피트처럼 두 사람을 이어 줘도 되는 거고.’
게다가 정신적인 뿌듯함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만족감도 한몫했다.
“…….”
보통 녹턴이 잠들면 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바로 방에서 나가 주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그의 자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녹턴이 깊은 잠에 들었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노래를 멈추고 몸을 숙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별빛 아래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속눈썹. 창백하게 빛나는 흰 피부. 새하얀 이마에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 반듯한 콧대와 유려한 턱선…….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단 말야.’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하여간에 성격도 엄청 더럽고, 신사는 못 되는 인간이지만…… 그의 외모는 정말 근사했다. 그를 보는 매 순간순간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게다가 그냥 잘생긴 것도 아니고, 내 취향의 정곡을 찌르도록 잘생겼다.
‘당연하지…… 내가 내 취향대로 설정했으니까!’
흑흑, 새삼스럽지만 여주인공이 너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피폐물이다. 이 인간은 곧 다가올 미래에 여주인공에게 무지막지하게 되먹지 못한 짓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양심이 맹렬히 아파 오기 시작했다.
‘여주야, 힘내. 그래도 얘가 얼굴 뜯어먹고 살아도 될 정도로 잘생기긴 했잖아.’
이제 슬슬 자는 사람 얼굴은 그만 구경하고 그의 방을 나서려고 하던 그 순간이었다.
내 시야에…… 그의 앞섶이 들어왔다.
느슨하게 입은 가운의 앞섶은 무방비로 벌어져, 꽉 짜인 복근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의 복근은 새하얀 별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여섯 개로 갈라진 그 뚜렷한 윤곽은 당장이라도 손을 가져다 대보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고 색정적이었다.
“…….”
나는 홀린 듯이 그의 복근을 보다가…… 내 뺨을 한 대 찰싹 때렸다.
“내가 미쳤나 봐!”
어딜 보는 거야, 어딜! 그것도 파렴치하게 무방비하게 자는 사람을 상대로…….
아무리 그가 내 취향 그 자체이기로서니, 잠자는 사람을 상대로 순간적으로나마 파렴치한 마음을 가진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짝, 하는 뺨 때리는 소리와 나도 모르게 내뱉은 비명 같은 말에, 녹턴이 불만스러운 잠꼬대를 했다.
이크, 겨우 재웠는데, 이러다가 깨우겠다. 나는 얼얼해져 오는 내 뺨을 부여잡고,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레 그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매일 밤마다 녹턴의 방을 들락인다는 사실이 어떤 소문을 초래하는지 말이다…….
주변의 태도 변화를 느낀 것은 그의 침실을 들락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부터였다.
“아가씨, 혹시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시장하지는 않으세요? 이 스콘을 드셔 보시겠어요?”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주무시기 전에 안마를 해 드릴게요.”
어쩐지 하녀들의 태도가 몹시 친절해졌다.
물론 다른 사용인들과 나의 관계는 기존에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같은 블랙웰의 사용인으로서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였다면, 지금은 나를 윗사람으로 모시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것 같달까.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네들이 그러는 연유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냥 그들이 몹시 친절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더라도, 내가 녹턴의 약혼녀이니까 미리 잘 보이려고 그러는가보다 정도?
“다른 건 괜찮고, 공녀님과 공자님을 위한 특별한 간식을 만드는 걸 도와줄래?”
“아니야, 고맙지만 사양할게. 공녀님과 공자님을 두고 나 혼자 먹을 수는 없잖아.”
“난 괜찮아. 너나 나나 같은 사용인인 처지에 안마는 뭘.”
그래서 더더욱, 그네들의 제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녀들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셔우드 영애.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저택에서 이웃 나라 시에나 왕국에서 온 손님을 맞이할 예정입니다만, 만찬의 구성에 대하여 영애의 고견을 구하고 싶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집사 시몬은 내게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의견을 구하러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가 묻는 대로 대답을 해 주곤 했지만, 그런 일이 자꾸만 반복되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비록 귀족이긴 하지만 블랙웰 대공저에서는 한낱 시녀일 뿐이다.
따지자면 집안일과 집안의 모든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집사인 시몬보다 아랫사람인 건데, 그가 왜 내 의견을 물으러 온단 말인가?
심지어 시몬은 어느샌가 저택을 꾸미고, 가구를 새로 들이는 일에까지 내 취향을 묻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녹턴의 약혼녀, 장래의 대공비이기 때문에 벌써 마님 대접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곤란했다.
내가 녹턴과 진짜 결혼을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벌써 저택을 내 취향으로 꾸며 놓는 건 너무 일렀다.
내가 내 취향대로 대공저를 꾸며놓고 파혼을 하면, 다음에 들어올 이 자리의 주인이 내 취향의 인테리어들을 보며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아무리 현재의 약혼녀가 나라지만, 그건 너무했다.
그래서 나는 내 취향을 묻는 시몬의 질문에 이렇게 직언했다.
“집사님, 저는 아직 약혼녀일 뿐 대공비가 아니에요. 만에 하나 대공 전하의 마음이 바뀌셔서 이 약혼이 파기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벌써 저택 내부를 제 취향으로 꾸미는 건 너무 이른 일이 아닌가 싶네요.”
설마 이런 돌직구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시몬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면서 제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그렇지요. 물론 영애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 하지만…….”
그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시몬은 가구 취향을 듣지 못한 채 축 처진 어깨로 떠나야만 했다.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노인 공경의 마음으로, 굳이 억지로 캐묻지는 않았다.
하나 시몬의 놀라운 행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번에 이미 한 번 거절한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번이나 내게 훨씬 크고 넓은 방으로 옮길 것을 권했다.
거의 녹턴의 침실에 필적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침실이었다.
파혼하고 퇴직금으로 유치원을 차릴 생각인 내게는 도저히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그 방은 대공비의 방으로 예정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의 열성적인 권유를 족족 거절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지만 셔우드 영애, 아무래도 영애의 방을 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용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시몬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분간은 임시 방을 써 주시길 바랍니다. 짐은 영애를 대신하여 전부 옮겨 두었습니다.”
뭔가 수상쩍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썼던 방이다. 수리할 곳이 어디가 있단 말인가?
나는 시몬을 슬쩍 떠보았다.
“그런가요? 방의 어느 곳을 수리하시는 건가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요.”
“어…… 흠흠, 처, 천장 대들보에…… 쥐를 먹어서 말입니다. 큼, 아무튼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그 방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이 양반, 거짓말 참 못하는구만!
그래도 일단 속아 주기로 했다. 유교 국가에서 2n년 동안 살아와 DNA 깊은 곳까지 뿌리박혀 있는 노인 공경의 마음 때문이기도 했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시몬이 안쓰럽기도 해서였다.
식사를 마친 나는 ‘임시 방’을 안내받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임시 방을 본 나는 한숨을 삼켰다. 바로 그 방이었다. 시몬이 내게 몇 번이나 옮겨 주려고 했던, 호화로운 대공비의 방!
‘방 수리를 핑계로 내 방을 여기로 옮기려는 거였구나.’
자신의 계략이 전부 간파되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듯한 근엄한 얼굴로, 시몬이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그렇게 된 고로, 앞으로는 이 방을 써 주십시오, 영애. ‘당분간’ 말입니다.”
“‘당분간’이요.”
“네. ‘당분간’.”
댁 얼굴에 써 있는 ‘뿌듯함’ 세 글자나 지우고 말하시죠, 이 양반아.
아무리 봐도 나를 영원히 이곳에서 재우려고 하는 속마음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것 같았다.
“시몬,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 방은 제겐 너무 과분해요. 좀 더 작은 방은 없어요?”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빈방 전부 수리 중이라서 말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어디 있나! 이 저택에 빈방이 몇 갠데!
“하지만, 시몬.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녹턴의 약혼녀이기 이전에 한낱 사용인일 뿐이에요. 이 방은 제가 모시는 공녀, 공자님의 방보다도 훨씬 크고 화려한걸요. 시녀인 제가 이런 분에 넘치는 방에서는 잘 수 없어요.”
“영애의 뜻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어쩌겠습니까? 현재 대공저에 빈방이 이곳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최대한 빨리 수리를 끝낼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이곳에 묵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몬의 눈에 승리의 빛이 비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나를 대공비의 방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나도 물러나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무리 노인 공경을 한다고 해도, 약혼녀 자리를 빙자하여 저택의 안주인 자리를 꿰차 권력을 휘두르다가 도망가는 혼인 빙자 사기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녹턴에 대한 의리이기도 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눈에 안 띄고, 애들이나 정성껏 돌보다가 퇴직금만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아니에요, 빈방은 있어요.”
내 말에, 시몬이 정곡을 찔린 듯 눈을 부릅떴다.
“여, 영애. 서, 설마 그 말씀은……?”
그날 나는 방을 옮겼다. 바로…….
“안녕, 메리? 이젠 룸메이트가 됐네. 앞으로 같은 방에서 잘 지내 보자! 내 방이 수리될 때까지 말이야.”
나와 룸메이트가 된 메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 아가씨……! 아니, 아가씨께서 어떻게 천한 저와 같은 방을…….”
“그런 말 하지 마. 같은 사용인끼리.”
내가 상큼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빈방이 전부 수리 중이라는데 어쩌겠어? 그쵸, 집사님?”
내 말에 메리는 문가에 서 있는 시몬을 돌아보았다. 시몬은 ‘이게 아닌데’라고 쓰여 있는 듯한 얼굴로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 내가 선택한 방은, 바로 사용인 숙소였다.
‘저택 본관에 빈방이 없다고 했지 사용인 숙소에 빈방이 없다고는 안 했으니까.’
사용인 숙소는 저택 본관과는 다른 건물을 쓰고 있으며, 4인 1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메리와 친하기 때문에, 메리가 쓰는 방이 한 자리 비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몬은 귀족인 내가 설마 자처해서 평민들과 같은 방을 쓰겠다고는 생각도 못 했으리라.
‘전에 쓰던 방보다는 시설이 별로긴 하지만, 이만하면 양호하지. 빙의 전에 지내던 원룸보단 훨씬 나은걸.’
흘끗 봤더니, 시몬은 목뒤라도 잡을 것 같았다. 약간 불쌍해질 정도였다.
“아, 아니, 영애. 진심이십니까? 이런 방에서 천것들과 살을 부대끼며 주무신다고요?”
“네, 진심이에요. 그리고 이 애들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세요. 그렇게 치면 저도 한낱 사용인일 뿐이라고요.”
“하, 하지만……! 아니, 셔, 셔우드 백작가의 고명딸이신 분이, 장차 블랙웰 대공가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 어떻게……!”
고혈압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그가 말했다. 그는 어느샌가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로 목뒤를 잡고 있었다.
약간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미안해요, 시몬. 그러니까 모든 방이 수리 중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마셨어야죠.’
시몬이 법석을 떨자, 어느샌가 옆방의 하녀들까지 전부 몰려나와 이 방을 흘긋거리며 수군거렸다.
결국 시몬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이, 이 방만은 안 됩니다, 영애!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원래의 방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제발!”
“네? 하지만 원래의 방은 수리 중이었던 것이 아니었나요?”
“그…… 그, 그건…… 순식간에 수리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수리가 다 되었을 겁니다. 셔우드 영애, 부탁드립니다! 부디 원래의 방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거짓말로 내 방을 옮길 생각을 못 하도록 세게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역시 난 노인에게 약하다. 게다가 이 이상 법석을 떨면 이 방의 원주인인 메리와 다른 하녀들에게 폐가 되기도 하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미안해, 메리. 아무래도 룸메이트는 못 하겠네.”
“무, 물론 괜찮습니다, 아가씨.”
그렇게 나는 원래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 원래의 방을 보자마자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우면서 혼잣말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이 방만으로도 너무 훌륭한데 말이야.”
다시 말하자면 이 방은 내가 셔우드 백작가에서 쓰던 방보다 3배는 좋고, 빙의 전 원룸과는 아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퇴직하기 전까지 이 방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말도 못 하게 호화로운 대접이었다.
여담으로, 시몬은 내가 얼마든지 사용인 숙소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사용인 숙소에 대규모 개축을 했고 시설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졌다.
수도의 그 어느 귀족저, 아니 황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시설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블랙웰 대공가는 모든 사용인들에게 최고로 선망받는 직장이 되었으며, 언제나 인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녀들과 시몬이 내게 대체 왜 그렇게 했는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