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57
칸 영화제, 수상 (2)
칸 영화제의 수상이 결정되던 그 날.
“이 황금종려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다섯 개의 손이 슬며시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미 5대 4. 이렇게만 보면 이 황금종려상을 받아야겠지만, 벨라는 계속해서 물었다.
“의 호빈, 아니 이이정이 남우주연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
아홉 개의 손이 거수되었다.
벨라가 어이없는 헛웃음을 지었다.
“장난할 때 아니거든요?”
“진심인데….”
“어쨌든 이이정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받는 걸로 알겠습니다.”
벨라가 엘리엇을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뭔가 아쉽긴 하네요.”
이견 없이 이정의 남우주연상이 결정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벨라뿐만이 아니었는지 엘리엇 리베리오가 먼저 의견을 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그렇게 해서 나온 의견이 남우주연상을 황금종려상 바로 직전에 부르는 것.
“흠….”
사실, 이건 심사위원들이 쉽게 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칸의 흐름을 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해 보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연기였으니.”
그러나 벨라가 먼저 수긍했다.
솔직히 그녀는 황금종려상이 ‘영화’에 수여하는 상이 아니었다면 이정에게 황금종려상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 * *
그래서 다시 현재.
― 남우주연상. 의 이이정.
“와아아!!”
그 시각 이정의 집.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이정의 집에는 민혁과 지원이 있었다.
“헐 미친.”
속보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칸 영화제 중계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정의 수상이 확실시되자. 민혁과 지원이 소리를 질렀다.
“미친놈… 진짜 미친놈!”
이정이 꽤 태연해 보이는 얼굴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오랜 친구인 그들은 이정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긴장했네.”
“떨리나 봐.”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아도 여유롭게 살아 돌아올 것 같은 친구가 긴장감에 손을 떠는 모습을 보니 이정이 정말로 배우로서 새 역사를 썼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 속보 심사위원상, 배우 이이정 남우주연상
― 사상 최초로 황금종려상 이전에 수상된 남우주연상 그 의미는?
― 벨라 크루즈, 폐막과 동시에 SNS에 이이정을 향한 축하 메시지 남겨.
이정의 수상 뒤로 황금종려상이 수상되었지만, 이미 한국의 관심 밖이었다.
― 이이정 한국 최초 남우주연상!
― 국내 최초 칸 영화제 2관왕!
인터넷, 방송할 것 없이 이정의 남우주연상 소식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그들이 묵고 있던 호텔 근처의 기자회견장.
두 감독과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이 등장하자 웅성거리던 기자회견장이 플래시 세례로 시끄러워졌다.
팀 역시 칸에서 무려 2관왕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마냥 밝은 얼굴이었다.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시작 전에 말씀드립니다. 은 아직 정식 개봉 이전이므로 기자분들께서는 이러한 부분을 주의해 질문해주시길 바랍니다.
자칫 의 내용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이러한 공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최초로 칸 영화제 2관왕에 성공하셨는데요, 일각에서는 황금종려상을 다른 상과 중복 수상할 수 없다는 조항이 아니었다면 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기자의 긴 질문에 대답한 것은 김윤미 감독이었다.
“칸에서의 모든 상이 소중합니다. 물론 언젠가는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게 될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엔 이이정 배우의 연기에 이 업혀 간 느낌이 없잖아 있으니 다음번엔 더 빛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겠습니다.”
김윤미 감독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다음 질문은 이정에게 쏠렸다.
“칸 영화제를 바꾼 배우가 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상 최초로 황금종려상 직전에 시상된 남우주연상.
기자의 말대로 만약 황금종려상과 남우주연상의 중복 시상이 가능했다면 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거라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았다.
“제가 바꾸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정의 대답에 기자들이 바쁘게 그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배우인 제가 할 일은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주어진 배역을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것, 오직 그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정이 티 나지 않게 눈을 깜빡여 환상을 켰다.
환상 대상을 정하지 않았음에도 분명 이 기자회견을 보고 있을 민혁과 지원의 환상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것 때문에 무언가가 바뀌었다면, 그건 주변에 계신 분들이 노력해주신 결과겠죠.”
그가 다시 웃으며 환상을 끄자 무엇보다 기적처럼 찾아온 힘. 환상이 그의 수상을 축하하듯 빛나며 흩어졌다.
그렇게, 칸 영화제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 * *
5월 말, 서울.
은 11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기존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단 6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매스컴에서 6일의 기록은 단순히 상영관에 남은 자리가 없어서일 뿐, 만약 상영관이 더 많았다면 기록이 바뀌었을 거라고 장담했을 정도였다.
“지겨워!”
그리고 촬영을 마치고 이정의 집에 놀러 온 지원이 쾅 소리 나게 맥주를 내려놓으며 짜증을 냈다.
“아무리! 네가! 칸의 새역사를 썼다고 해도!”
“한 모금 마시고 취했냐?”
“어딜 가던 요즘 너 뭐하냐고 물어보잖아!”
이정이 지원의 말을 끊어봤지만 무시당했다.
역시나, 이들은 이정이 칸 영화제에서 새 역사를 썼던, 한국인 최초의 기록을 썼던 변함 없었다.
“그냥 쉰다고 하지 그랬어?”
“당연히 말했지! 그런데 안 믿잖아!”
“진짜 쉬는 중인데.”
왜 아무도 안 믿는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얼마 전에 우재도 쉰다면서 왜 시나리오를 들추고 있냐고 물었다.
“저기 쌓인 시나리오는 뭔데!”
“시나리오야 그냥 미발매 책들 보는 느낌으로 가볍게 읽는 거고.”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곧 활동기인지라 조용히 옆에서 두부를 먹던 민혁이 이정에게 말했다.
“맞다. 이―정 나 네 사인 뇌물로 써도 돼?”
“뇌물?”
“이번에 뮤비 촬영 맡기고 싶은 감독이 있는데 그 집 아들이 네 광팬이래. 근데 사인 못 얻어서 안달이라고 우리가 RW니까 네 사인 받아오면 생각해 보겠다던데?”
“한 장이면 돼?”
“넹.”
사인이야 닳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인 한 장에 그렇게 거절했던 일을 맡는다는 게 좀 어이없긴 했다.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찾았다.
“아들 이름이 뭔데?”
“김준태.”
이왕 대놓고 뇌물로 쓸 거 꼼꼼하게 사인을 마친 이정이 A4용지를 파일에 끼워 민혁에게 건넸다.
“자.”
“오, 땡큐.”
민혁이 큰절을 하는 시늉을 하며 파일을 건네받아 소중하게 가방에 집어넣었다.
“근데 이이정 사인이 그렇게 귀해?”
“귀할걸?”
“귀한가?”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로의 사인은 원하면 받을 수 있어서인지 별 감흥이 없었다.
“팬들한테 친필 사인해 준 적 있어?”
“가끔?”
“너 사인회 같은 거 거의 안 하지?”
“응. 한 번도 한 적 없어.”
“귀할 만하네.”
민혁이 맥주 대신 물을 들이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잘 쓰겠습니다. 이―정 님.”
“오냐.”
이정이 지원과 맥주잔을 부딪치고선 단숨에 들이켰다.
칸에 다녀온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 * *
“네네. 이이정 배우가 지금 휴식기라서요. 네네.”
“RW엔터테인먼트입니다. 이이정 배우 섭외요? 예. 올해 안에는 이미 정해진 스케줄이 아니라면….”
“RW엔터테인먼트 홍보팀입니다. 네, 아, 네 죄송한데 지금 현재 이이정 배우는….”
다만 이정이 한가하다고 해서 이정의 회사인 RW엔터테인먼트까지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정보다 이정의 칸 영화제 수상을 실감하는 것이 RW 엔터테인먼트였다.
칸에서 돌아온 뒤 평소에도 잘 하지 않았던 광고, 예능은 당연히 거절. GV를 제외하면 그나마 데뷔 초반에 출연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에 출연한 게 전부였다.
라디오 청취자가 점점 줄어드는 세대에 그날, 는 역대 최대 청취율을 기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리 잡아놓았던 GV일정들이 끝나고 비행기 티켓을 끊으려던 이정에게 또 다른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50개국이요? 대단하네요.”
바로 북미를 포함한 50개국에 이 개봉되었다는 것.
은 그만큼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 영화의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 그리고 진짜는 따로 있어요.
“또 뭐가 있나요?”
― 아마 지금쯤 기사 나갔을 텐데. 이 국내 최초로 이천만 관객을 돌파했어요.
“이천만이요…?”
국내 최초 이천만 돌파.
개봉 20일 만의 일이었다.
신기록
개봉 한 달째.
의 흥행은 파죽지세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기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과 관련된 새로운 소식들을 써 내려갔다.
개봉 두 달째.
― 멸망을 가장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으로 그려낸 영화. ★★★★
― 우리는 멸망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할 수 있다. ★★★★★
― 황금 종려 남우주연상이 있다면 주고 싶은 연기. ★★★★★
― 인간은 변하는 것인가? 변하지 않는 것인가? ★★★★
별 세 개만 받아도 극찬이라고 표현되는 외국의 영화 평론 사이트에서도,
[국내 영화 > 평점 9점 이상]― , 이 얼마나 역설적인 제목인가. 9.7/10
― 찢어진 우비가 작은 영웅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수의였음을. 9.8/10
― “넌 나처럼 살지 마.”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언. 9.6/10
― 나도 모르는 새에 늪에 빠져 숨 막혀 죽어가는 듯한 기분. 영화관에서 나오는 순간, 막혔던 숨이 터졌다. 9.1/10
그에 못지않게 까다로운 국내의 영화 평론 사이트에서도 과 이정이 연기한 호빈은 계속해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개봉 석 달째.
이 단순하지만, 여러 해석을 할 수 있는 영화이니만큼, 영화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났어도 여전히 온라인상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꿈도, 희망도 없는 영화의 제목이 이라는 점에서 이와 관련된 추측들이 가장 많았다.
누군가는 그저 영화의 상황을 정반대로 표현하는 반어법이라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호빈이 죽었어도 결국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는 거점만이 유일하게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호빈이 죽음으로서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꿈동산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공식적인 설명이 전혀 없었기에, 국내외 인터넷상의 모든 말들은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 그래서, 너 어디라고?
“나 지금 한국 어딘가.”
― 집에 여권이 굴러다니니 해외는 아니겠지 당연히.
그렇게, 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이정은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휴식의 시작이었다.
“너 또 내 집에서 자고 갔냐?”
― 아니 빡민 미국 갔다 왔지 않아. 내가 면세점에서 뭐 좀 사 오라고 시켰거든. 그거 두고 간다고 해서 잠깐 들렸지.
“참나.”
모자를 눌러 쓴 이정이 혀를 찼다.
어차피 이정도 없겠다, 지원이나 민혁이나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정의 집을 아지트로 활용하고 있었다.
― 그래서 어디냐고. 너 벌써 두 달째잖아. 2학기 복학 안 해?
“해야지. 신청은 이미 했어.”
5월 말에 이 개봉하고 벌써 꽉 채워 석 달.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만큼 조금 길게 쉬어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동안 미뤄뒀던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너도 진짜 징하다. 난 너 자퇴 할 줄 알았어.
“내가 미쳤어? 그 고생을 하고 들어가서 자퇴를 하게?”
회귀 전에는 했다.
그 고생을 하고 들어간 학교를 제 발로 걸어 나왔었다.
―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다. 너 한의학 하겠다고 집 나온 거였는데 원래.
“그랬었지….”
“아빠! 버스 왔다! 뛰어!”
“그러다 넘어진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정의 옆으로 한 가족이 지나갔다.
가장 먼저 뛰어가는 아들, 그리고 그의 뒤를 쫓는 엄마와 아빠.
결국 버스를 잡는 데 성공한 이들이 버스를 타고 떠났다.
버스 창 너머로 숨을 고르는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야. 류지원. 만약에 내가 집에서 나오기 전에 한의학이 아니라 배우 하겠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 갑자기?
의미 없는 가정이라는 것은 알았다.
단순히 집을 나오기 이전으로 회귀한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모든 것들이 없는 일이 된다고 해서 가족과의 골이 메꿔질 리 없었다.
‘그렇다기엔 내가 겪은 일이 너무 많지.’
그래도 한 번쯤은 그를 제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만약 만약 이정이 집을 나오기 전,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이전으로 회귀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까마득하긴 하지만 평화로웠던 가족관계가 아예 생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 좀 솔직히 말해줘, 아님 좋게 말해줘?
“둘 다 해봐.”
이정이 버스가 오는 시간을 알려주는 상황판을 곁눈질 하며 대답했다.
― 좋게 말하면 집에서 쫓겨났을 거고, 솔직하게 말하면 집을 나왔겠지.
“뭐야. 지금이랑 다를 게 없잖아.”
― 너네 집이 의사 말고 다른 길을 용납할 집이었으면 애초에 네가 집을 나오지도 않았을걸?
결국 결과는 같았다.
“역시 그렇지?”
― 혼자라서 쓸쓸하냐? 왜 그런 걸 물어봐?
지원이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 야, 근데 너 이번에 복학하면 스트레이트로 졸업할 거야?
“못할걸?”
― 왜?
“나 군대 갔다 와야 돼. 계속 일 때문에 미뤘으니까.”
― 헐. 맞다. 너 군대 가야 하지. 헐…. 그러고 보니까 빡민도 안 갔다 왔네? 미친….
지원이 정말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듯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 잘… 갔다 와라. 할 말이 그거밖에 없네.
“지금 가는 거 아니거든?”
다소 격한 지원의 반응에 이정이 오히려 그녀를 비웃었다.
“나 활동 쉬는 동안 잘 좀 커 보시던지. 그래봤자 내 기록은 못 깨겠지만.”
― 와 나, 너 딱 기다려라. 너 쉬는 동안 내가 적어도 너보다 상은 많이 받는다.
이정이 지원을 놀리는 사이 그가 기다리던 버스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 다음 도착 버스는….
“끊어. 버스 왔어.”
― 할 말 없으니까 끊냐?
“진짜라고.”
그가 전화를 뚝 끊고 버스에 올라탔다.
끊어진 전화를 붙잡고 있을 지원이 성질내는 모습이 저도 모르게 그려졌다.
― 환승입니다.
오늘만 세 번째 갈아타는 버스의 환승 음이 그를 반겼다.
버스 기사님께 습관적으로 살짝 인사한 그가 버스 가장 뒷좌석에 앉았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 버스는 많지 않은 승객과 이정을 태우고 정해진 노선을 향해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다음 정류장은….
걸으면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바깥 풍경을 한참을 쳐다보자 어느새 이정이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 하차입니다.
카드를 찍자 두 달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지겹게 들었던 하차 음이 들리고 버스의 뒷문이 열렸다.
이정과 승객 몇 명이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다시 정해진 노선으로 움직이는 버스와, 같은 곳에서 내렸지만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흩어졌다.
― 이―정!
“왜.”
이정이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에는 지원과 통화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민혁이었다.
― 어디야?
“왜.”
여행하는 두 달 동안 틈틈이 연락은 했어도 이렇게 끈질기게 위치를 묻는 모습은 처음이라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너네 설마….”
여유로웠던 이정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경보하듯 걸어간 이정의 걸음이 멈춘 곳은, 여행했던 기간 만큼이나 비워두었던 그의 집이었다.
“박민혁. 너야말로 어디냐?”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이정이 도어락을 열었다.
― 덜컹.
분명 당연히 열려야 할 제집의 문이 무언가에 걸려 열리지 않았다.
― 아오, 내가 아까 분명히 이 근처 버스 번호 들은 거 같다고 했지!
민혁을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정체와 원인을 짐작한 이정이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문 열어라.”
― 뭐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부산이었잖아!
“뭐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부산이었잖아!”
“내가 부산이었던 건 또 어떻게 알았어.”
― 너 목격담 올라온 거 봤지! 왠지…. 오늘 올 거 같긴 했지만….
“너 목격담 올라온 거 봤지! 왠지…. 오늘 올 거 같긴 했지만….”
“문 안 여냐?”
스피커 소리와 진짜 목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번졌다.
문을 열 생각은 안 하는 민혁의 행동에 이정이 다시 한번 문을 덜컹거렸다.
“으악! 잠깐만 기다리라고!”
전화가 끊겼는지 이번에는 돌림노래 같은 스피커 소리 없이 민혁의 목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화장을 지울 시간도 없었는지 무대용 메이크업이 그대로 남아있는 민혁이 그를 반겼다.
“어서오세… 요?”
“내 집이거든. 안에 누구누구 있어?”
이정이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민혁이 나름대로 막아보고자 노력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아오… 하루만 더 늦게 오지.”
이정이 거실의 플래카드와 민혁, 지원을 번갈아 보고선 물었다.
“이제 와서?”
[축! 이이정 칸 남우주연상 수상&꿈동산 2000만 관객 돌파!]칸 수상이야 그렇다 쳐도, 이 이천만 관객을 돌파한 지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이천만 관객 기념 GV가 끝나자마자 여행을 떠났으니 기억이 잘못됐을 리도 없었다.
“파티할 시간은 줬냐 네가?”
서프라이즈에 실패한 지원이 살짝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넘기며 대꾸했다.
“케이크나 먹자.”
깔끔하게 포기한 지원이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왔다.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케이크까지 사놨어?”
“두 달 동안 부산 빼고 다 돌아다녔더만. 오늘 아침에 부산 목격담 떠서 내일 비행기 타고 오겠거니… 했지.”
부산을 마지막으로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약간 어긋나고 말았다.
“뭐… 일단은 축하니까.”
지원이 케이크 위에 초 대신 주문 제작한 토퍼를 끼웠다.
토퍼에는 짧게 ‘축 수상&신기록!’이라고 적혀있었다.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느라 엉망인 거실과 허술하게 매달았는지 그사이 떨어진 플래카드, 그리고 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지원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케이크.
“하하하하.”
너무나도 변함없이 두 사람다운 모습에 이정이 크게 웃었다.
“야 빡민, 이이정 미쳤나 봐. 이 꼴을 보고 웃네?”
“빡친 거 아니야…?”
이정이 케이크를 받아들었다.
“한참 늦긴 했지만, 축하 고맙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가족관계를 그리워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더 열심히 할게.”
그의 가족은 예전에도, 지금에도 이들이었다.
이정이 포크도 없이 케이크를 베어 물었다.
그의 콧잔등에 크림이 묻어났지만, 이정은 그저 환하게 웃었다.
민혁과 지원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환하디환한 웃음이었다.
《연기하면 딴세상》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