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can't play soccer, you die RAW novel - Chapter 5
5화 리부트 (4)
“재민아, 오늘도 수고했다!”
“인마, 이따 연락할 테니까 클럽이나 가자. 시즌 개막하기 전에 마지막 불꽃은 피워야 할 거 아니야.”
팀 동료들이 자신을 향해 저마다 몇 마디씩 던지며 지나쳤다.
하지만 정재민의 표정은 어지간해선 펴질 기미가 없었다.
마치 화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짜증이 계속 스멀스멀 피어올랐기에.
‘아직 창창한 20대인데 벌써부터 갱년기가 왔을 리도 없고.’
하지만 몇 분 뒤, 정재민은 이 알 수 없는 짜증의 근원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진정한 남자라면 직진이 좋은 거란다, 꼬마야. 왜, 영국의 유명한 문학가 사무엘 존슨도 그랬잖아? 자신감은 위대한 과업을 위한 첫 번째 요건이라고.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도전해야 하는 거야.”
“형처럼요?”
“그럼! 난 태어날 때부터 노빠꾸였어.”
“노빠꾸?”
“직진!”
눈에 익은 녀석이 허리께까지 오는 웬 꼬마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아닌가.
이내 정재민은 실소를 머금었다.
“하……! 마리우였어?”
정재민은 호마리우를 잘 알았다.
미정이의 친구니까.
정재민이 김광수에게 깍듯이 대하는 이유 중엔 상관이기 때문도 있지만, 진짜 목적은 바로 그의 딸 미정 때문이었다.
약 1년 전 그녀가 훈련장에 방문했던 날, 정재민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때부터 훈련이 끝나면 김광수 몰래 매일같이 미정이가 다니는 학원을 찾아갔을 만큼 정재민은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진전은 없었다.
항상 자신을 방해하는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호마리우 저놈.
‘짜증의 원인이 여기 있었네.’
마치 연인처럼 미정이에게 딱 달라붙어 다니던 호마리우였다.
미정도 그런 호마리우가 마냥 싫진 않은 듯했고.
그때, 호마리우는 벤치 한편에 삐딱하게 서 있던 정재민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기, 축구 선수 한 명 있네. 어서 가서 사인 요청해 봐!”
“네, 형!”
“놉. 형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 해야지?”
“네! 스승님!”
활기차게 대답한 꼬마는 어느덧 정재민의 한 걸음 앞까지 부리나케 달려와 손에 든 사인지를 내밀었다.
오랫동안 쥐고 있었던 듯 흰 여백에 살짝 때가 묻어 있었다.
정재민은 뜬금없는 상황에 살포시 미간을 구겼다.
“……뭐냐?”
“사인 부탁드립니다! 경남 FC의 팬이에요!”
“…….”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밀었으나 이내 빼앗듯 종이를 받아든 정재민은 자신의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적고 다시 꼬맹이에게 건넸다.
어차피 이 모든 스트레스는 저기 서 있는 애송이에게 모두 풀면 그만이었으므로.
“헷,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스승님!”
꼬마는 그새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호마리우에게 인사하곤 급히 자리를 떠났다.
곧 호마리우는 세 걸음 앞까지 다가와 90도로 허리를 숙여 넙죽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어, 그래. 오랜만이다.”
“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네가 웬 축구를 한다고 여기까지 찾아왔냐?”
정재민이 아는 호마리우는 축구를 떠나 운동 자체와 담을 쌓은 녀석이었다.
키는 그 나이대와 비교하면 크긴 해도, 비실비실한 몸만 봐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축구공 차다가 지 발등뼈부터 부러질 것 같구만.’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달리 호마리우는 두 눈에 힘을 팍 주며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2의 호마리우가 되기로 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활기찬 모습에, 제 앞에서 농담까지 하는 호마리우를 어처구니없게 바라보던 정재민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렴 어때.’
프로 선수를 원한다기에 그 대상이 호마리우라고는 아예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호마리우라니.
정재민으로서는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순간이었다.
저놈은 자신의 순정을 지독하게 방해하던 역적 그 자체였으니까.
일순 음침한 생각마저 들었다.
‘샌드백처럼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어디 한 군데 부러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면 미정이랑도 잠시 떨어뜨릴 수 있을 거고.’
파울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도가 튼 사람이 정재민이었다.
수비할 때 상대의 어느 부위를 때려야 쓰러지고, 더 고통을 주려면 어딜 눌러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때문에.
“그럼 당장 시작할까?”
지금 정재민의 두 눈은 먹이를 발견한 맹금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 * *
정재민은 페널티 아크 부근에 자리했다.
그리고 언제 짜증이 났었냐는 듯 살포시 무릎을 굽히며 친절히 설명을 이어 갔다.
“룰은 간단해. 어떤 식으로든 날 제치고 난 뒤에 페널티 존에서 슈팅을 때리는 거야. 골을 넣으면 네 승리. 20번의 기회를 줄게. 알겠지? 그중에 4분의 1 이상, 적어도 6번은 제쳐야 그나마 코치님이 눈여겨볼 테니까 처음부터 전력으로 임하는 게 좋을 거야.”
“와, 간단하네요.”
“뭐, 그렇지.”
어느덧 축구화로 갈아신은 호마리우는 오른발 스터드를 들어 볼을 좌측으로, 우측으로 천천히 굴리다가 뜬금없이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럼 형님, 봐주시는 건 절대 없는 겁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것도 일종의 입단 테스트인걸. 수석 코치님 말씀도 있고 하니까,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상대해 줄게.”
정재민은 콧잔등을 한번 닦으며 말했다.
그러나 호마리우에게 말한 것처럼 전력으로 임할 생각은 쥐뿔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본 포지션은 수비수.
그것도 센터백이다.
축구부에 입부한 적도 없는 생초짜를 상대하면서 본 실력으로 제압한다?
이는 치욕과도 같았다.
대신 온갖 교묘한 파울로 고통을 선사할 예정이었다.
‘두 번 다시 축구 선수 하겠다는 말이 안 나오게 해 주지!’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다르듯 파울로 풀던 정재민은 그간 경기를 뛰지 못해 한가득 쌓인 걸 풀 수 있단 생각에 살짝 흥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삐이이이-!
정재민은 경합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불었고, 상체를 급히 낮췄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호마리우가 인스텝으로 볼을 치고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정재민은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병신이 프로 선수를 상대하면서 뻣뻣이 서서 정면으로 들어오기는.’
소프트웨어도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리숙한 드리블에 찰나지만 진마저 빠졌다.
그럼에도 정재민은 본능에 따라 발을 굴렀고, 호마리우의 움직임을 빠르게 캐치해 나갔다.
‘왼쪽이네.’
입가엔 예의 승리의 미소가 그려졌다.
오른발을 내디딘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기운 게 아닌가?
쳐든 왼발은 당장이라도 발등 바깥쪽을 사용해 볼을 찰 것 같았다.
즉 우측으로 볼을 가져가는 척, 반대 방향으로 파고드는 페이크였다.
‘너무 허술한 거 아니냐?’
프로 선수들만 상대해 오다가 일반인을 상대해서인지, 드리블할 때의 페인트 동작이 너무 커 보였다.
정재민은 묘한 희열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거나 처맞아서 나자빠지라고!’
정재민이 한 발을 힘차게 내디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대로 숄더 차지, 즉 어깨를 들이밀며 가슴을 강타해 자빠뜨릴 생각이었기에.
선수들과 달리 무게를 싣는 것부터 미숙한 녀석이었기에 충분히 패대기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툭!
스윽!
“엇……?”
정재민은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막 옷깃이 닿았다 싶은 순간, 호마리우가 돌연 디뎠던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아웃사이드 턴을 보이며 숄더 차지를 그대로 흘리는 게 아닌가.
그 탓에 정재민의 어깨는 애꿎은 허공만 강타했고, 주춤거렸다.
두 눈이 부릅떠진 건 1초 뒤였다.
철렁-!
볼이 빠졌다고 인지도 못 한 사이에, 골망이 물결쳤으니까.
“오케이! 자, 이제 1 대 0인 거죠?”
머리가 쭈뼛 서는 순간이었다.
* * *
자신이 2036년의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는 존 티토는 예언했다.
어디서든 인터넷 무선 접속이 가능할 시대가 오리라고.
그리고 15회차 인생을 살아가는 절륜한 나그네 한 명도 예언했다.
오늘부로, 눈앞의 정재민이 가진 축구인으로서의 쪽이란 쪽은 있는 대로 다 팔릴 거라고.
지난 회차에서나 지금이나 정재민은 좋은 말로 일반 쓰레기, 나쁜 말로는 썩은 음식물쓰레기였다.
이 녀석은 현역 시절에도 실력보단 ‘더티함’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린 데다, 지난 3년간 선수 두 명의 다리를 아작낸 전적마저 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이놈은 내 미래 와이프인 미정이를 호시탐탐 탐하려던 나쁜놈 중의 나쁜놈.
왜, 영화 건설학개론의 선배처럼 접근해서 술의 힘을 빌려 하룻밤을 보내려는…….
말로는 좋아한다고 해 놓고 딴 여자랑 허구한 날 바람만 피우고 다녔었지.
‘개자식.’
그렇게 내 인생 1회차 때의 첫사랑도 종지부를 찍었고 말이야.
이 부분만은 회차를 반복해도 용서가 안 되었다.
‘서브 미션’이라 생각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내 순정을 짓밟고 미정이를 수십 번이나 울린 죄로. 너는 오늘 좀 탈탈 털리자.’
툭, 철렁!
“와, 5 대 0이네요! 형님! 이제 한 골만 더 넣으면 되는 거죠?”
“……시발!”
처음 한 골을 허용했을 때만 하더라도 정재민은 봐줬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짓는 게 다였다.
하지만 2골, 3골, 4골, 이제는 크로스오버와 같은 개인 기술로 농락하며 득점을 뽑아내자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파울 역시 대놓고 저질렀다.
6번째 시도에서는.
퍽!
처음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무게를 실은 숄더 차지까지 가했다.
내가 백힐로 방향을 틀자, 녀석은 바닥에 드러누우며 슬라이딩 태클도 거침없이 구사했다.
스터드도 무릎 높이까지 올렸다.
하지만 난 자그마치 2,800경기 이상을 소화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9회차 때는 나 역시 반항기에 접어들어 아주 더티한 플레이어로도 활약한 바 있다고.
그래서.
빠각-!
나는 무릎 높이까지 쳐든 정강이를 보고 모른 척 발로 찼다.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혹시 부러지면…… 쏘리.
“아악!”
정재민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두 다리를 감싸 쥐었다.
“헉!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 이 새끼가! 너 일부러 그랬지?”
정재민의 두 눈은 분노로 가득 찼다.
“설마요! 제가 이런 시험은 많이 안 해 봐서…… 죄송합니다. 헤헤.”
“웃어? 이 새끼가!”
“아, 형님. 그럼 이번 판은 무효로 처리할까요? 아니면 5승 1무 0패로 할까요? 선배님 체면도 있는데 무승부 하나는 넣는 게 더 낫겠죠?”
“이, 이……!”
혈압이 끝까지 차올랐는지, 정재민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터질 것처럼 변했다.
욕설을 터뜨리면서도 비틀대며 일어나는 것을 보니 다행히 뼈가 부러진 건 아닌가 보다.
‘쩝, 아쉽네.’
한편으론, 내 실력도 지난 1회차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을 이뤘음을 새삼 실감했다.
회귀 전에는 축구의 축 자도 몰랐던 데 반해, 지금은 체력만 받쳐 준다면 EPL에서도 최정상급 스트라이커로 분류될 만큼 성장하지 않았나.
게다가.
‘아이템도 고작 하나 장착한 상태인데 K 리그 현역을 상대로 이 정도라면…….’
암만 정재민의 재능이 부족히다 쳐도 이 녀석 역시 현역 프로 선수.
그런 녀석을 상대로 나는 유리하다 못해 ‘일방적이다’ 싶을 만큼 농락하고 있었다.
물론 아이템의 영향도 있었다.
‘아이템’이 뭐냐고?
간단하다.
페널티 미션이나 돌발 미션 등을 통해 얻은 능력들.
최대 다섯 종류의 아이템까지 한 번에 착용할 수가 있었다.
‘돌 모아서 무쌍 찍는 마불의 타누스처럼 말이지.’
1회차에선 축구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나마 방콕 리그에서 뛸 수 있었던 것도 아이템 덕분이었다.
하지만 회귀할 때마다 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아이템 대부분을 잃었다.
단 하나, 8회차에서 얻은 귀속 아이템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귀속)
아주 운 좋게 얻은 귀속 아이템이었다.
등급도 낮고, 은퇴한 피터 그라우치 자체가 장신일 뿐이지 피지컬은 우월하다고 할 정도가 아니어서 EPL에선 썩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운동을 등한시했던 18세의 나는 피지컬 자체가 엉망인 상태라 꽤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정재민과의 경합에서도 어지간해선 밀리는 일이 없었으니까.
‘뭐, 이놈도 피지컬이 썩 좋은 놈은 아니니까. 게다가 현역치곤 몸 관리는커녕 술을 밥 먹듯이 먹는 놈이기도 하고.’
다행인 건 내 노력으로 쌓은 실력, 소프트웨어는 회귀 후에도 온전히 내 것이라는 점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빡세게 하드웨어를 단련해야 본 실력이 100% 발휘될 수 있겠지만.
“후우! 시발, 지금부터 안 봐줄 테니까 제대로 덤벼 봐라.”
연달아 먹힌 골에 흥분한 정재민은 이제 테스트건 뭐건 없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스터드로 내 정강이를 찍어 버릴 기세랄까.
‘아니, 이 녀석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하지만 이 녀석과의 테스트는 이걸로 끝났다.
훈련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집무실 창가 너머로, 김광수가 나와 이 녀석의 대결을 똑똑히 확인했을 테니까.
고로, 게임 종료다.
그러니까.
“이제 꺼져, 허접 새끼야.”
“뭐, 뭐?”
“귓구멍을 시멘트로 쳐 막아 놨나. 내 앞에서 그만 꺼지라고. 오줌 지리기 싫으면.”
착한 척하다가 앞통수 때리는 게 더 빡친다는 건 회귀하면서 터득했다.
역시나, 정재민은 붉은 천을 본 황소처럼 흥분해서 눈알이 뒤집힌 채 덤벼들었다.
“이, 이 개호로새끼가아!!”
하지만.
뻐엉-!
나는 백스윙하며 왼발 슈팅을 구사했고.
빠각-!
“어억?!”
정재민은 축구공에 안면을 정통으로 맞아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다.
난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트라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