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하! 웃기는군. 귀와 눈이 한꺼번에 멀어 버린 것인가?”
키베르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오만하게 굴었다.
황제의 계획에는 키베르크의 처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실패할 시를 대비한 안전장치였다.
어차피 쓸모 있는 후계자는 많았으니 하나쯤 적당히 쓰다 버려도 상관없으니까.
브리칼트의 황제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그걸 알기에 조금 조사를 했더니,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브리칼트는 대공의 참석이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고 잘라 버렸다.
“이 다리나 어떻게 해 봐! 너희들은 신관이 아닌가?! 사람이 다쳤는데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
요이델은 발악하는 그를 보며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세례 마법 시험 통과 직후, 성하에게 했던 말.
‘오르비스 상단에서만 판매하는 특수 마법수가 있어요.’
두 호위기사에게 알아봐 달라고 귀띔한 물건이 바로 이거였다.
‘타 대륙에서 재배되는 독초인 솔리디 풀의 성분을 추출해서 만든 마법수인데, 불순물을 응고시키는 성질이 있어서 잘 흐르거나 퍼지지도 않아요. 오히려 휘저을수록 너울이 역방향으로 흐르죠.’
보통은 초보 마법사들이 마나의 응집을 다루기 어려워할 때, 도움을 받고자 쓰는 마법 보조 도구였다.
겉보기에는 일반 물과 다를 바 없었으나 특수한 성질을 가진 물답게 가격이 굉장하고 희귀했다.
그걸 가장 많이 보유한 게 오르비스 상단이었다.
‘사야 가문은 자긍심이 강하죠. 그리고 혈연끼리의 관계가 단단해요. 미켈레 씨의 사건으로 인해 성하에게 반발심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조금 감형해 준다면 충성심은 이끌어 낼 수 있을 거예요.’
결국 미켈레는 상단을 넘기는 것을 대가로 감형을 받았다.
요이델의 판단은 정확했고, 키베르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파테라를 가득 채운 투명한 물은 일반적인 수로의 물이 아닌, 바로 그 희귀한 마법수였으니까. 상단에서 가져온 전량을 저곳에 쏟아부었다.
‘저대로 두면 다리를 못 쓰겠지.’
하지만 그를 구해 줄 생각은 없었다. 막연히 생각하던 그때, 키베르크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 네 짓이지?! 순서를 바꾸라고 한 이유가 있었어! 나를 엿 먹이려고! 어?!”
눈알을 희번덕대며 부라린 키베르크가 요이델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 순간.
쾅!
발악하던 키베르크가 금제를 뚫고 마법을 날렸다.
“꺄아악!”
공기가 팽창하는 폭발음과 동시에 커다란 빛이 터졌다.
━━━━⊱⋆⊰━━━━
“서, 성하께서…… 많이 위독한 상태이신가요?”
“왔군요, 요이델 군.”
마르셀리나는 잠시 고민하다 성궁의 문을 열어 주었다. 키베르크의 습격 이후 성국 전체가 극도의 긴장감으로 얼어붙었다.
율리시스의 침실에는 치료소를 방불케 하는 수많은 치료 도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몇 시간 전, 폭주한 키베르크는 요이델을 불시 습격했고 율리시스는 그를 막다 내상을 입었다.
요이델에게 향하는 공격을 보고 그답지 못하게 크게 동요한 탓이었다.
세례식은 잠정 중단되었고, 율리시스는 몇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다.
신관들은 초조함과 걱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어떤가요, 하일 원로.”
마르셀리나가 애써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잠드신 것뿐이네.”
“언제 깨어나실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이런 상태일 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하일조차 초조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일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무의식에 접근하는 것이지.”
율리시스는 정신적 내상을 입어 깊이 잠든 상태였기에 의식을 깨워야 했다.
깊은 잠에 빠진 상태가 계속되면 의식은 점차 아래로 가라앉아서 언제 깨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었다.
“상생이 맞지 않으면 성하와 접속자 둘 다 깨어나지 못하는 위험한 방식이라 실제로 행하기 힘든 일이네.”
“하지만 이대로 몇 날 며칠 성하께서 깨어나시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상생…….”
요이델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율리시스를 바라봤다.
‘성하는 나를 감싸 주다 다쳤어.’
요이델의 심장이 긴장으로 두근두근 뛰었다. 그가 자신을 감싸던 순간이 똑똑히 기억났다.
그가 입은 것은 정신적 충격. 마법이 튕겨져 나간 것이 발단이 되어 생겨난 혼수상태였다.
조심하라던 파멜라의 말. 그 말이 실현되고 말았다.
어쩐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죽은 듯이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이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성하라니.
체온은 정상, 맥박도 평소와 같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다를 바 없이 자신이 아는 성하의 모습 그대로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날 수 있다는 게.
아니야, 뭐가 끝이라는 거야.
그들의 페어링은 풀리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혼수상태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를 깨울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상생이 문제라면, 내가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반려 관계인 걸 들킨다면…….
요이델은 의지를 다잡았다.
‘그래도 괜찮아.’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요이델은 그를 살리고 싶었으니까.
“남관의 의료신관이라고 한들 무의식 접속에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네.”
신관들은 침울한 낯으로 방안을 강구했다.
“가장 상생이 맞는 사람은 신수인 플로테스 님뿐입니다.”
“그분은 아직 정신이 미성숙하여 위험이 크네. 하지만 고민되는 것도 사실일세. 비등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신수님이 단연 독보적이니.”
바로 그때, 요이델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할게요.”
그 말에 장내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요이델에게로 모였다.
“아, 아니. 패기는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이델 신관님이 역대 최고치 신성력을 지니셨다는 건 아오나, 무의식에 접근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상생치부터 검사를 해야 합니다.”
“잠깐.”
신관들이 술렁이던 때, 사정을 아는 하일과 마르셀리나는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괜찮겠어요?”
“같이 위험해져, 요이델 씨. 안 돼.”
안절부절못하던 아슈레오는 요이델을 뜯어말렸다.
“제가 제일 상생이 맞을 거예요.”
요이델이 속삭이듯 말한 내용에 마르셀리나는 모르는 척 살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하일은 묵묵히 시선을 맞췄다.
“두 분 다 눈치채고 계셨어요?”
오히려 요이델이 그들의 어색한 태도에 놀랐다. 둘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다녀와서 들을게요.”
요이델의 말에 둘은 그녀의 손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 어쩐지 뭐든 해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
율리시스의 무의식 속엔 녹음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성하의 세계라고?’
의식의 가장 밑바닥이라길래 조금 더 서늘할 줄 알았는데 걱정과 달리 새가 지저귀고 태양이 눈부셨다.
‘그런데 여기, 대신전의 숲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좀 더 춥고 공허한 기분이지만.’
요이델은 누워 있는 상태 그대로 골똘히 생각했다.
정말 낯설지가 않단 말이야. 왜일까?
“넌 뭐지.”
그때 살벌한 목소리가 요이델의 등 밑에서 들려왔다.
“비켜, 죽고 싶지 않으면.”
“엄마야!”
요이델은 부리나케 일어나서 아래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사람이 깔려 있는 줄은 몰랐어요!”
웬 은발의 어린애가 요이델의 등 밑에 깔려 있었다. 성하의 의식 속에 웬 아이지?
다소 사나운 어린이는 요이델이 내민 손을 확 뿌리치고 일어나 불쾌한 티를 팍팍 풍겼다.
“별 멍청한 침입자를 다 보는군.”
히이잉!
숲속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온 조랑말은 어린애의 옆에 멈춰서 친밀하게 발을 굴렀다.
한결 풀린 표정으로 말을 쓰다듬던 어린이는 시선을 돌려 요이델을 먼지 취급하듯 깔봤다.
“레일루스, 저 인간 치워.”
그런데 이상하다.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초면인 사람에게도 퉁명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이는 저 냉랭함. 그리고 긴 은발에 창공처럼 맑은 파란 눈동자.
잠깐, 레일루스라고? 설마…….
“성하?!”
요이델은 까무룩 기절했다.
━━━━⊱⋆⊰━━━━
여기가 어디지?
아, 푹신한 걸 보니 침대구나…… 가 아니라, 그냥 말랑한 잔디밭이었다.
“일어났나.”
정원의 조각상에 앉아 있던 어린 율리시스는 다리를 꼬며 픽 웃었다.
그는 기절한 요이델을 절대 보살펴 주지 않았다. 알아서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고 지켜봤을 뿐.
‘보통 사람이 기절하면 돌봐 주지 않나? 진짜 한결같은 사람이야.’
크나 작으나 변함없는 그의 일관성에 감탄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성으로 뙤약볕을 피해 그늘로 옮겨 주긴 한 듯했다.
“한 시간이나 처자더군. 아둔하기 짝이 없는 암살자이니 무리에서 버려진 게 틀림없어. 그렇지, 레일루스?”
“저기요!”
성하는 어린 나이부터 사람을 깔볼 줄 알았구나.
그는 요이델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웃듯 입꼬리를 틀었다.
“얼뜨기가 여기까지 굴러들어온 건 박수 쳐 줄 만한 일이군. 그 어벙한 실력으로 살아남은 걸 축하한다.”
“그 얼뜨기가 혹시…… 저 말하는 거예요?”
“생각만큼 멍청하진 않군.”
“성하, 어렸을 땐 못됐었네요.”
“뭐?”
요이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얄밉기도 한데 솔직하고 귀여웠다. 작은 체구하며, 쉽게 뾰로통해지고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까지.
옛날의 성하는 이랬구나. 하지만 역시 기분 나쁘다.
“지금의 성하가 훨씬 정제된 성격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어요.”
“자꾸 성하, 성하, 하는데 무슨 말이지?”
“무의식이 이렇게 무서운 건가 봐요. 지금이 몇 살인진 잘 모르겠지만…… 일곱 살? 아홉 살?”
그의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 들어온 건 확실한데.
“건방진 침입자 주제에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군. 너야말로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여기가 어딘데요?”
“한심하군. 저런 것도 암살자라고 보냈나.”
“제가 누굴 암살해요! 전 암살하러 온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니면 네가 내 손에 죽을 텐데. 상관없나?”
왠지 모르게 이 어린애한테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린 성하는 지금의 성하보다 훨씬 더 사납고 날카로워서 정말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요이델을 힐끔 바라보고 레일루스를 쓰다듬었다.
“됐다. 너처럼 한심한 침입자를 죽이면 외려 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직접 처리할 것도 되지 못하는 자여.”
살려 준다는 말이 기분 나쁠 수도 있구나.
“여기가 성하의 집이에요?”
“성.”
그는 다리를 꼬고 요이델을 힐끔 쳐다봤다.
그의 주변을 잘 살펴보니 녹음 진 숲뿐만 아니라 성까지 펼쳐져 있었다. 얼음처럼 투명하게 느껴지는 새하얀 성.
한눈에 알았다. 저 외롭고 냉정해 보이는 성에 율리시스보다 더 어울릴 사람은 없다는 걸.
‘저 오래된 나무는 대신전에서도 본 적이 있어.’
이천 년은 족히 넘은 고목은 끝을 추측할 수도 없이 높았다.
대신전에도 이런 숲이 있지. 설마 여긴 과거의 대신전인 건가?
‘부모를 제 손으로 다 죽인 주제에 고고한 척―’
키베르크는 그렇게 나불댔다.
그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면, 여기가 성하가 과거에 살던 곳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