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사과할 말이 있어서 왔다, 요이델.”
그걸 믿으라는 말이야?
화부터 불쑥 낼 뻔했다. 자신과 플로를 해치고 모함하려고 했던 사람의 말을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저녁이 훨씬 지난 늦은 시간에 사과를 하러 오다니.
목소리는 제법 미안해 보였지만 표정 연기는 미숙했다.
“내 잘못이 뭔지 조금쯤 알 것 같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선물도 가져왔어. 성의이니 싫더라도 그냥 받아.”
이번 시험에는 테오도 반드시 참여한다. 그런데 경쟁을 앞두고 집 방문을 하다니.
분명히 뭘 하고 있나 파악하려고 온 거겠지.
요이델은 그런 테오의 속마음이 뻔히 보여서 더욱 불쾌해졌다. 게다가 웬 선물 상자?
곰곰이 고민하던 요이델은 밖을 살폈다. 아까 테오의 뒤로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테오가 하는 행동을 기록하는 듯했다.
이제야 알겠다.
‘내게 제대로 사과하는 게 그가 수행해야 할 마지막 일이구나.’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테오는 또 어떤 형태로든 말을 걸러 오겠지. 곰곰이 고민하던 요이델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덜컹.
“무슨 일이야, 테오?”
“말했잖아, 사과라고.”
“정말로?”
“그렇다는데 왜 안 믿어. 손님을 밖에 세워 둘 건 아니지?”
“뭐?”
“아, 내 말은…… 미안하다고. 말이 잘못 나왔다.”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요이델은 기꺼이 테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것도 아주 활짝 웃으면서.
테오는 요이델의 미소를 보고 팍 인상을 찌푸렸다. 금방 복구했지만 떨리는 입꼬리가, 지금 그가 애를 쓰고 있다는 걸 말해 주었다.
그가 가지고 온 선물 상자는 향신료와 과일청, 찻잎이 담긴 평범한 선물 세트였다.
요이델은 테오에게 그가 가지고 온 찻잎을 우려 바로 대접했고, 그러면서 거기에 특별한 독성이나 배탈 유발 물질 따위는 없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테오는 사과와 함께, 정말로 차만 마시고 돌아갔다.
“찻잎은 정말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요이델은 진열해 놓지 않은, 주방의 한구석으로 치워 버린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그건 붉은 과일을 꿀에 절여 놓은 청이었다. 테오가 선물로 주고 간 것.
어쩐지 설탕에 눅눅하게 절인 그 붉은색 과일이 자신의 눈동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생각일까?
혹시나 싶어 테오가 돌아간 후, 자신의 집 곳곳을 살폈다. 수상한 흔적은 없으나…….
요이델은 공부의 흔적이 남은 책상 한 켠으로 다가가 문서 더미를 펼쳐 보았다.
“역시.”
뭔가를 눈치챈 요이델은 테오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의심했던 대로 테오는 사과나 하자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 요이델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화가 났다.
‘어쩌면 좋을까…… 아참, 그렇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테오가 이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
하일의 주장에 따라 시험은 대규모로 치러지게 되었다.
대신전 뒤의 숲과 이어지는 북쪽 끝단의 부지는 공터와 옛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대한 마수 셋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광활한 곳에, 참가 가능한 모든 신관들이 지원하여 이른 새벽부터 자리를 지켰다.
테오는 필기시험 대기장 저 멀리 자리한 요이델을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자신이 준 티 세트를 의심했는지 바로 찻잎을 우려 주었지만, 그가 노린 건 그런 쉬운 게 아니었다.
‘흥, 요이델 같은 놈을 이기는 건 쉽지.’
“틀리면 어쩌지? 아니야, 괜찮을 거야. 충분히 암기했잖아.”
테오는 요이델을 스치듯 지나가며 요이델이 고민하는 소리를 들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남몰래 요이델을 비웃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요이델 따위보다 자신이 훨씬 뛰어나다. 당연한 결과가 될 거다.
그러나 며칠 뒤 받아 본 필기시험 결과는 테오의 생각과 달랐다.
1등 요이델, 2등 테오.
테오는 눈을 뜨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2등이라고? 1등은 요이델? 그가 왜?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잘못된 게 틀림없어. 항의해야 해!’
테오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요이델을 찾았다. 저 멀리, 쑥스러움에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분홍 머리가 보였다.
자신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축하 속에 서 있는 그가.
그 순간 테오는 군중 속에 우두커니 홀로 있는 자신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꼈다. 밀려드는 부러운 기분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듯했다.
심지어 성하조차 요이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톱에 짓눌린 살에서 피가 날 정도로 꽉 쥔 주먹이 눈물 나도록 아팠다.
테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데 체력 시험도 충격적이었다.
요이델은 날렵하진 않았지만 지구력과 끈기가 대단했다.
물론 미소 짓는 얼굴로 가혹하게 굴린 율리시스의 채찍질도 한몫했다.
그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요이델을 움직이게 했고, 마법을 가르쳐 스스로 체력을 회복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 줬다.
대부분의 신관이 할 수 있는 기초적인 마법이었지만, 요이델은 곧잘 습득하여 눈에 띄는 응용력을 보였다.
체력 시험이 끝난 뒤 요이델의 결과를 바라보던 율리시스는 턱을 괴고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래도 저래도 뿌듯해 보이는군.’
긴장한 듯 보였지만, 어쨌든 저 햇병아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게 기쁜 듯했다. 물론 율리시스로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턱걸이나 하면 다행일까, 진심으로 그 정도의 기대만 걸었다.
하지만 요이델은 기대 이상을 해냈다.
결과는 요이델은 3등, 테오는 2등이었다.
필기시험에 이어 그녀가 우수한 성적으로 관문을 통과한 것에 사람들의 놀라움은 커져 갔다.
하지만 하일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더 뿌듯한 얼굴로 요이델의 성과를 지켜보았다.
‘마음에 들었나 보군.’
율리시스는 옆에 앉아 있는 하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세 원로 중 가장 활발한 하일은, 약초와 의약 연구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잔소리가 심하고 지식을 알려 주려는 경향이 심해 그와 대화하려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요이델이 그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게다가 자신에게조차 생소한, 희한한 쓰임새를 알고 있으니 마음에 쏙 들 수밖에.
요이델이 쌓아 온 명성 탓에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 듯했지만, 율리시스의 눈에는 보였다.
그가 요이델이 성과를 올릴 때마다 굳게 다문 입을 씰룩거린다는 걸.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이상한 인간투성이군.’
한편 율리시스의 예측은 정확했다.
하일은 청렴한 신관. 맹세코 단 한 번도 유흥을 즐긴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도박에 판돈을 거는 부랑자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1차 필기시험 때도 마음이 들썩였다. 그는 총괄 감독관으로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결과를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가장 먼저 심사위원들의 채점표를 빼앗아 확인하고 싶었지만 품위와 직위가 있으니 참았다.
그는 가시가 말끔히 빠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웃었다.
엄살이 심한 그에게, 요이델은 거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는 완전히 인정하지 않지만.
머리와 마음이 격렬히 다퉜다.
하일은 허리를 숙이며 시험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닿지 않을 응원을 누군가에게 열심히 보냈다.
‘그런데 저 소년에게서 이상하게 율리시스 님의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지. 허허, 나도 참. 나이가 들긴 했군. 기본적인 걸 혼동하다니.’
요이델을 바라보는 하일의 시선이 어느덧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
휴식 시간, 요이델은 저 멀리 유리관 안에 있는 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플로랑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알은 고요했다.
그날 이후 멀리 떨어지게 된 친구였다. 절대 테오 같은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물론 율리시스도 안 된다.
요이델은 마지막 시험 전, 마구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조용한 곳으로 와 나무 그늘에 앉아 쉬니 조금 나은 것 같았다.
‘라크라스 산맥에 있는 것.’
요이델은 자신이 생각하는 보물의 윤곽을 잡았다. 성공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도전하는 수밖에.
그런데 통과를 해도 문제였다. 그럼 성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잖아? 거기엔 성하가 있고.
그녀는 끙끙 앓았다. 이러나저러나 좋은 선택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성하를 습격한 죄는 사면되었다고 하나, 율리시스의 의구심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약속대로 1년 안에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완전한 믿음을 얻고 나면, 그때는…….
‘아, 맞다. 페어링.’
요이델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페어링을 푸는 방법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어쩌면 자애로운 게 맞을지도…….’
시체들이 가득하던 기괴한 장면 속에서 빛나던 형형한 푸른 눈이 떠올랐다. 율리시스는 아직 자신을 살려 두고 있었다. 물론 생과 사를 함께하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신수 관리직도 주고, 거절하고 싶지만 중앙 직속이 된다는 건 명예로운 일이었다.
생각하다 보니 이상하네. 꽤 친절한 건가?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렸다.
“바보처럼 계시는군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치고 들어왔다.
율리시스는 성황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할 때나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입는 깔끔하게 수놓인 예복을 입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마지막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냉정한 말을 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맞다. 드디어 마지막이었다. 이변이 없다면 자신은 무사히 통과할 것이다.
하지만 통과를 넘어 우수한 성적을 받는 게 중요했다. 체력 시험을 못 보긴 했으나, 사실 가장 배점이 큰 건 마지막 시험이었으니까.
요이델은 산맥의 지도를 펼쳤다.
마지막 관문은 산맥 어딘가에 있는 ‘보물’을 찾아오는 거였다.
무엇을 보물이라 생각하든 자유였다. 다만 누가 생각하기에도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어야 했다.
그 가치가 클수록 높은 점수를 주겠다고 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라크라스 산맥의 문지기나 다름없는 괴수를 피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였다.
요이델은 참가자 모두가 미리 분배받은 산맥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 지도, 누군가의 모함이 들어 있습니다. 위험 지대로 유도하도록 되어 있군요.”
율리시스는 이상한 점을 한눈에 발견하고 싸늘한 투로 말을 흘렸다.
그 말에 요이델은 조금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어요. 테오가 주고 간 선물이에요.”
언뜻 침울해 보이던 요이델은 가방에서 멀쩡한 지도를 하나 더 꺼냈다.
‘테오는 내가 깜빡 속아 넘어간 줄 알겠지.’
테오가 정말 사과를 하러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기엔 타이밍이 너무 이상했다.
그가 가고 나니 역시나, 지도가 미세하게 바뀌어 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요이델은 새로운 지도를 펼치며 씩 웃었다.
“그래서 저도 테오의 지도를 바꿔치기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