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찬 바람이 몰아쳤다.
정신이 든 요이델은 기침을 겨우 참았다. 손발이 모두 묶여 있었다.
‘여긴 어디일까? 브리칼트는 현재 폐쇄되어 있으니 아닐 테지? 하지만 메디아도 절대 아니야.’
메디아의 청정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 맡기 힘든 마법 시약 냄새와 쿰쿰한 곰팡이 냄새. 숨 막히는 습기.
‘마법 시약 냄새라면, 황제의 개인 공간이거나 공작 부인의 은둔지겠구나.’
어느 쪽이든 황제가 잘 아는 곳이라는 건 틀림없다.
그는 제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요이델의 앞에 사람의 기척이 나타나 쭈그려 앉았다.
“자는 척하는 거 아니야?”
‘요보힐데 공작 부인의 목소리야.’
곤경에 빠진 요이델은 몸에 힘을 풀고 계속 잠에 빠진 체했다.
―성하, 저…….
‘속마음 전달이 전혀 되지 않아!’
전에 공작 부인에게 당한 이후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마법을 걸어 놓았는데, 무슨 수를 쓴 거야.
요이델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려는 때.
“이보게, 공작 부인.”
황제가 짜증 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대가 한가롭게 어린애에게 말이나 붙일 때가 아님을 망각한 것인가?”
“죄송합니다, 폐하.”
“쯧.”
공작 부인은 당장 일어나 황제에게로 돌아갔다.
요이델은 슬쩍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공작은 보이지 않아. 아마 마법을 못 쓰니까 황제에게 별로 쓸모가 없었겠지.’
그리고 공작도 공작 부인이 낳은 아이가 남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거다.
나름 사이가 좋았던 공작과 공작 부인의 관계도 파국에 다다랐을 거다. 요이델은 탈출을 위해 자신이 있는 곳을 가늠했다.
‘일반적인 공간 같지는 않은데……. 결계를 친 건가? 햇볕 하나 없고 어두컴컴해. 하지만 마탑도 아닌 것 같아.’
다시 눈을 감으니 주변의 감각이 더 잘 느껴졌다. 묘하게 춥지만, 날씨 때문은 아니었다.
졸졸 흘러가는 물소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곳……. 아까 맡았던 묘한 흙냄새.
‘굴이야. 여긴 지하였어!’
하마터면 소리가 나올 뻔했다.
맙소사, 지하에 이런 큰 굴을 파 놓다니.
이런 곳의 지형은 전혀 접한 적이 없었으니 섣불리 탈출하기에도 위험하다.
마법 사용에도 제약을 걸어 막아 놓은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제 와서 나를 데리고 뭘 하려는 걸까.’
그때 우웅 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모르게 불쾌하고, 또 익숙한 오묘한 기운. 생각에 잠긴 그때 요이델의 눈꺼풀 위로 초록색 빛이 번쩍 빛났다.
“크흐흐, 요보힐데 공작 부인이여. 이 빛이 느껴지는가? 하하, 우습지 않은가. 그곳에서 숙여 줬다고 해서 반성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아둔한 것들 같으니. 누가 저들 따위 신경이나 쓴단 말인가? 풋, 푸하하하!”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이게 내 염원을 이루어 주겠지…… 나의 돌.”
그는 애틋한 듯 초록색 덩어리를 감싸 안았다.
“좋은 생각이었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이 나를 모함하려 했지만 어딜 감히! 어림도 없지. 마지막으로 그 당당한 얼굴을 보는 것도 썩 좋지 뭔가! 내가 그들의 나라를 삼킬 때, 복종하는 표정들은 또 어떻겠나?”
“괜찮은 나들이셨다니 다행입니다.”
“공작보다 그대의 덕이 커! 이 일의 공로는 내가 삼대륙의 주인이 되고 나서도 잊지 않겠네.”
“영광입니다, 폐하.”
삼대륙의 주인?
‘……그렇구나. 황제가 이루고 싶던 꿈은 대륙을 통합하는 거였어.’
이제야 깨달았다.
제국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을 모두 손아귀에 넣을 요량인 거다.
그중에서도 핵심 목표는 성국이겠지.
‘황제는 대신전의 이름만 들어도 질색하는 사람이니까.’
삼대륙 회의에 참석하고 보니 알겠다. 성하는 황제의 결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원의 돌로 어떻게? 그게 세상의 모든 꿈을 이뤄 준다는 건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 금술서에도 그랬고…….’
요이델은 시야를 가로막은 물건을 피해 살짝 쓰러지듯 실눈을 떴다.
돌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저거, 본 적이 있지 않나?’
요이델의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저 돌과 비슷한 것들을 본 적 있다.
내 어린 시절.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어.’
소중한 것치고는 낡은 흔적이 꽤 있다. 보통 가치가 높은 광물이거나 말 그대로 ‘소원의 돌’이라면 좀 더 온전한 형태일 텐데.
‘……내 환각 반지는, 메디아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었지.’
그렇게 말했었다.
강한 힘이 들어 있고 브리칼트의 힘 외에 메디아의 원석이 깃들어 있다고.
게다가 기이한 녹색 빛과 어두운 기운이 오히려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그럴 리가 없다. 혹시 저건…….
발걸음을 돌리는 소리에 요이델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자네들의 괘씸함을 잊었다는 것은 아니야. 알고 있겠지?”
“……네, 폐하.”
“풉, 푸하하!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아주 좋아. 자네의 영특함은 깊이 사 줄 만하지. 어떻게 메디아의 왕녀를 납치할 생각을 다 했는가?”
“…….”
“이렇게 된 이상 크게 나쁘진 않네. 기왕 제물로 끌어들인 거, 쓸 데까지 써먹어 봐야지.”
황제는 키득 웃었다.
그는 요이델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머리를 걷고 이마를 제 손으로 덮었다.
“성황의 반려라는 증표가 이것이군. 이자를 죽이면 같이 죽일 수 있기에 그토록 없애고 싶었건만― 막상 손에 넣으니 영 탐탁지가 않아.”
“하지만 폐하. 지금 당장 죽이셔야 후환이 없습니다.”
“닥치고 있게. 그대가 아는 걸 내가 모르는 듯하여 나불대는가?”
“……죄송합니다.”
굳은 음성에 공작 부인이 한발 물러났다.
“쯧, 첨언할 정신머리가 있으면 그대의 정신 나간 남편이나 데려오게. 외도 사실 하나로 얼이 빠져 있어서야, 눈 뜨고 보기 한심해서 미치겠군.”
황제의 축객령이 떨어지자 공작 부인이 걸음을 돌렸다.
요이델은 제 앞에서 벌이는 대화에 집중하되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 척 호흡했다.
그러나 황제는 손을 떼지도, 시선을 떼지도 않았다.
……아마, 황제는 알고 있겠지.
요이델은 스르륵 눈을 떴다.
역시.
눈앞에 씩 웃고 있는 황제가 보였다. 요이델은 그를 말없이 노려봤다.
“그대는 그대의 부모만큼이나 영특하군. 눈치가 빨라.”
“…….”
“양부모는 보냈으니 괘념치 말게, 왕녀여. 나도 그대를 해칠 생각은 없어.”
그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쉽게 죽이면 재미가 없지. 성황이 봐야 좀…… 크흑, 재밌지 않겠나? 풋, 푸하하하!”
요이델은 황제의 헛소리를 흘리고 그의 어깨 너머 뒤편을 응시했다.
초록 돌은 계속 기이한 빛을 뿜어냈다.
길고 커다란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돌.
“저 돌이 신기한가 보군.”
“네. 신기해요.”
“음?”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으리라는 걸.
요이델은 그의 물음에 즉답했다.
황제는 그녀의 당돌한 대답이 신기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냥 돌이니까요.”
“……뭐라?”
“어떻게 저런 걸 소원의 돌이라고 거짓말할 수 있는지, 공작가의 뻔뻔함이 신기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벗어나고자 별수를 다 쓰는군!”
뒤로 홱 돌아 버린 황제가 이리저리 서성였다. 불쾌감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믿기 싫으시면 그래도 좋아요. 어차피 제 말이 맞겠지만요.”
“증거는 있나?”
“있어요.”
과거, 율리시스는 요이델에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요이델은 그를 믿었다. 그는 언제든 해결책이 되어 줬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해내고 말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구치는 이유였다.
율리시스가 있으니까.
꼭 살아서 다시 만나고 싶기에.
‘황제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요이델은 그의 말을 떠올렸다.
과연 황제는 당혹하고 분노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창피를 당하실까 걱정되어 반드시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를 걱정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예상대로 황제는 쉽게 넘어올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잘됐다. 요이델은 씩 웃었다.
“하지만 제 말을 들어 주고 계시네요.”
황제는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서 요보힐데 공작가도 믿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 알아 왔든, 그런 것은 황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말발굽을 갈듯 사람을 쓸모에 따라 언제든 닳도록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반대로 전혀 신뢰 관계가 없는 자신의 말도 어느 정도 들어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자격지심을 자극하십시오. 멍청하다는 뜻을 내포할수록 당신의 말을 따르고 증명하려 들 것입니다. 황제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도 일순간 잊어버릴 수 있는 자입니다.’
요이델은 녹색 돌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최대한 비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 돌은 사실, 메디아의 한낱 묘비에 불과하니까요.”
“묘비? 지금 하!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감히 소원의 돌이 죽은 자의 명패 따위밖에 되지 않는다고?!”
황제가 핏대를 세우며 격노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을 이용했다면…….
이번엔 요이델이 요보힐데 일가와 브리칼트를 써먹어 줄 차례였으므로.
“공작 부부의 말과 행동은 처음부터 온통 거짓투성이였어요.”
요이델의 말에 황제는 침묵했다.
“그것을 어떻게 믿나?”
“제 말을 못 믿으시겠나요?”
“당연한 소리 아닌가. 그대의 재주는 훌륭하네. 언변도 나쁘지 않지. 그러나 그대의 수는 뻔해서 내게 읽혀.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자 공작가를 얽는 것 아닌가?”
요이델은 안타까운 듯 눈을 찌푸렸다. 다행히 황제는 반쯤 정신이 혼란한 듯했다.
“어떻게 해야 제 말에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어림도 없지.”
황제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메디아의 왕녀여. 그대의 말은 흥미롭지만 나를 설득할 만큼은 되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믿어 주실 건가요?”
요이델은 최대한 몸을 낮추는 척했다.
냉정한 황제는 요이델을 비웃었다.
동시에 고개 숙인 요이델도 웃었다.
“증거를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신수는 제 말이 진짠지 거짓인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신수?”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도 부화시키지 못한 신수를 깨운 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 돌은 과거 메디아에 잠든 신수님의 비석이기 때문입니다.”
“신수의 비석이라고?!”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다.
키시아가 말해 준, 어린 시절 자주 갔다던 왕가의 무덤. 신수의 비석이 놓인 자리는 유독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현재는 왕가의 무덤에서 사라지고 없는 그 돌.
“녹색 빛은 그 잔재일 뿐이고, 신성력을 기반으로 하니 마법에 전지전능하신 폐하께서 섣불리 손을 대셨다간 큰 재앙이 생길 수 있는 위험한 것이지요. 공작가는 알려 주지 않았나요?”
요이델의 물음에 황제는 답하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 쓸모도 없는 돌이에요. 같은 힘을 지닌 신수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겠지요.”
황제는 성국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 성국과 달리 브리칼트에는 신수가 없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물론 앞으로도.
“신수는 제 말만 따릅니다. 알에서 깨운 저를 가족처럼 알기에, 제 부탁이라면 폐하를 섬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증명은?”
“……증명은 간단합니다.”
역시.
요이델은 묶인 팔을 내밀고 총명한 눈빛으로 황제를 직시했다.
“제가 신수를 부를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