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28)
28화
말은 사람의 걸음보다 빨리 퍼진다.
그날의 일은 참석자의 입을 타고 삽시간에 수많은 타국으로 퍼져 나갔다.
“성국에 연이어서 경사가 터졌군요.”
수백 년 만에 태어난 신수만으로도 충분한 축복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신성력을 가진 신관까지 있었다니!
각 나라의 사교계와 골목길을 가릴 것 없이 그들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신관들조차 놀라던데요? 그런데 왜 미처 몰랐을까요. 그 정도라면 진즉에 소문이 퍼졌어야 하는데. 성국에서 꽁꽁 감춰 뒀던 존재일까요?”
“대단한 최종 병기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비처럼 쏟아지는 분수대라니, 성황에 준할 정도 아닌가.”
때아닌 비를 맞은 사람들은 그 순간을 분명히 기억했다.
늘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성황의 얼굴에서조차 웃음이 거두어졌지.
“신수님에 이어 그런 존재를 얻다니. 성국은 날로 위상이 높아지네요.”
그 장면을 회상하던 사람들은 모두 대단함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에 그 분홍 머리 신관이 분수대에 빠졌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마른하늘에 폭우라도 쏟아지는 줄 알았다.
그것은 즐거운 폭우였다.
품위를 잃는 것을 싫어하는, 그 자리에 참석한 숱한 귀족들도 넋을 놓고 바라본 풍경이었다.
앞으로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자신들과 같은 경험을 할 후손은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 비는 한참이나 나중에야 이슬비 정도가 되었다.
“듣기로는 그 신관이 하필이면 그 제국 출신이라던데. 악에 받쳐서 난동을 부리겠어, 아마.”
이 화제를 넘길 즈음이면 사람들은 공통된 의견으로 끝을 지었다.
성국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자동으로 떠오르는 바로 그 사람.
브리칼트 제국의 황제에 관해.
“당장 요보힐데 공작을 불러들여!”
쨍그랑―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추측대로 브리칼트의 황제는 미친 듯이 분노해 집무실 안의 모든 잡기를 깨부수고 있었다.
“빌어먹을 태양 따위! 저 빛은 꼴도 보기 싫어, 당장 모든 궁에 커튼을 쳐라!”
황제는 한참 씩씩거리다가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황궁 지하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갔다.
스산함이 진득이 풍기는 어둡고 음습한 굴.
그 미로 같은 비밀 공간 안에는 빛을 내는 돌이 하나 있었다.
여러 겹의 주술로 봉인된 돌.
괴이한 청록색으로 빛나는 그 돌은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돌에서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기운이 흘러나와, 주변에 어두운 잿빛 구름이 가득했다.
“하아…….”
브리칼트의 황제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거대한 돌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표정이 무서울 만큼 평온해졌다.
아까의 분노는 찾아볼 수 없이,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 스르르 풀어졌다.
“폐하.”
그때 입구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요보힐데 공작이었다.
얼마 전 성국에서 치욕스럽게 쫓겨난 그 요보힐데 공작.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했거늘 공작은 되레 판을 엎어 버렸다.
“요보힐데 공작, 짐이 무엇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는가?”
“……면목이 없습니다.”
요보힐데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나 저거나 다 마음에 안 들어……. 그래, 공. 이 돌은 기억나는가? 자네가 진상한, 금술로 끌어온 귀중한 보배였지. 소원을 이뤄 준다던 돌.”
“…….”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군.”
황제는 토할 듯이 마른기침을 쿨럭였다.
“하아, 하……. 마법 연구엔 진척이 있겠지?”
“물론입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몸을 낮춘 요보힐데 공작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사실 공작은 지금도 요이델의 변화가 믿기지 않았다.
‘그 유약했던 것이 단숨에 바뀌다니. 성황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게 틀림없어.’
성국에 있는 세작들에게 들은바, 요이델은 그 성황과 막역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신임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어떤 거래를 했길래 그런 능력을 갖게 된 거지?’
공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분명히 몇 번을 시험해 봐도 아주 미미한 신성력만 갖고 있는 하잘것없는 아이였다.
보람도 하나 없이 쓸모없고, 백치이기까지 한 실패작. 그런데 요즘의 행보는 기이했다.
‘금술을 쓴 게 분명해. 조사를 해봐야겠어.’
게다가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제 부모에게 알려 줘야지, 감히 혼자 능력을 독식하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이제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사방팔방 공표를 했으니,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게 됐다.
요보힐데 공작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황제는 시야를 들어 뿌옇게 흐린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성국은 말일세…….”
“네. 폐하.”
“짐의 말에 대답하지 말게, 공작. 목소리가 거추장스럽게 귀를 긁는군.”
그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황제는 초록빛으로 감싸인 잿빛 돌에 손을 댔다. 그 안에서는 무한한 힘이 뿜어졌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공작은 입을 열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성국의 주인을 바꿔 줄 기적의 돌이지.”
“…….”
“이 지상 대륙에서 가장 큰 브리칼트 제국도 나의 것인데, 그 창공 대륙도 당연히 내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별안간 그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핏물이라도 곧 토할 듯 기침을 뱉은 황제는 웃으며 뒤로 돌았다.
“고고한 성국의 위상도 땅으로 떨어지게 될 걸세. 제아무리 신의 핏줄이라고 한들 고작 하나의 기둥. 대단한 건축물도 기둥이 수십 개씩은 필요하네. 그런데 고작 혼자서 그 나라를 몇 년이나 더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벌써 천 년의 세월이 지났네. 이제 주인이 바뀔 때가 되었어.”
황제는 모종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자가 반려를 맞이해서 두 개의 기둥이 되지 않는 이상, 성국의 몰락은 반드시 온다.’
그 반려의 역할을 할 이를 찾기란 쉽지 않을 터. 그 정도로 비등한 능력자가 있을 리 없다.
딱 한 명, 역대 최고의 신성력을 가졌다는 그 분홍 머리 신관 빼고는.
“자네의 딸은 오래전 죽었다고 했지. 확실한가?”
“……틀림없습니다.”
만일 그만한 능력을 가진 여자아이가 있다면 곤란해진다.
하지만 그 소문의 신관인 요보힐데 공작의 자식은 남자였다. 성황과 원로원이 남자를 반려로 들일 일은 결코 없었다.
‘죽이는 건 시일을 두고 해도 늦지 않다. 가장 들떴을 때 없애는 게 오히려 좋겠지.’
황제는 그것에 그나마 안도하며 빛을 뿜어내는 녹색 돌을 바라보았다.
━━━━⊱⋆⊰━━━━
“요이델 님이다!”
“맙소사, 눈 마주쳤어! 히이익!”
처음 대신전을 청소했던 날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면 몸을 웅크리고 바르르 떠는 사람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으니.
“시력이 좋아진 것 같아! 하, 한 번만 더 눈 마주쳐 주셨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았다.
요이델이 호의나 선의로 한 행동도 질색하며 꺼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호기심과 설렘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묘한 선이 둘려 있었다. 일단의 신관 무리가 요이델과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졸졸 따라다녔다.
“저어…… 요이델 님의 눈처럼 예쁜 딸기 쿠키인데, 받아 주실 수 있나요?”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신관이 쭈뼛 다가와 꾸러미를 내밀었다.
말도 안 돼. 나한테 이런 걸 준다고?
요이델은 놀라움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휘스테론과 라이오스가 앞을 막아서자 어린 신관의 눈은 금세 울먹울먹하게 바뀌었다.
“어허, 곤란해, 꼬마.”
“아냐, 난 딸기가 제일 좋아. 고맙게 받을게.”
요이델은 과잉보호 중인 호위기사를 저리 밀고 선물 꾸러미를 받아 챙겼다.
그때, 틈을 보고 있던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기! 그럼 제 것도! 저도 안 받아 주시면 울어 버릴 겁니다!”
“여기도 있어요!”
“아, 정말. 델, 네가 자초한 거다? 꽉 붙잡아.”
인파가 그녀를 조이려던 때. 휘스테론이 요이델을 번쩍 들고 성큼성큼 내달렸다.
추격전을 오랫동안 찍고 나서야 요이델과 호위기사들은 겨우 사람들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가까스로 성하의 집무실에 다다랐다.
“와, 하아…….”
“델 완전 유명 인사네, 푸하하! 근데 너 밥 안 먹고 사는구나. 왜 이렇게 가벼워? 남자들은 보통 너 같은 체격이어도 이 정도로 가볍진 않던데. 이상하네.”
“응?”
휘스테론과 라이오스는 이상한 데에서 날카로울 때가 있다. 요이델은 어깨를 크게 펴며 짐짓 몸통이 큰 척을 했다.
“일단 데려다주지만, 성하가 뜯어먹으려고 하면 휘스! 라이! 하고 불러. 언제든 달려갈게.”
두 호위기사는 당부하고 떠났다.
혼자 남은 요이델은 플로테스를 위한 연회 날, 그 분수대 사건 이후의 상황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 분수대가 고장 났던 거야.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 성하랑 측정도 했었잖아?’
그래서 요이델은 지금 받는 호의가 도저히 제 것 같지 않았다.
사용자가 많은 날이라 잠시 분수대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마침 자신의 차례 때 오류가 났을 뿐.
쾅!
고민하며 집무실 앞에 서 있던 그때, 손대지 않았는데도 거세게 문이 열렸다.
“성하! 저는 성하를 믿습니다. 이 성국을 위해 후손을 남겨 주실 것을요, 성하!”
오늘도 후사 압박을 하러 온 하일이 거센 바람에 등을 떠밀려 나오고 있었다.
의지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는 성하의 결혼에 진심이었다.
‘성하도 엄청 화났나 봐. 지금 들어가도 되는 걸까?’
요이델은 눈을 데구루루 굴려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맡은 바 일만 하는 문지기들은 요이델을 향해 손짓했다.
“요이델 님 오셨습니다, 성하.”
“들어오십시오.”
쿵.
요이델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율리시스는 손으로 얼굴을 쓸고 긴 한숨을 뱉었다.
지금 그는 요이델의 능력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대로 성국에 살았던 집안 출신이라면, 희박한 확률이었지만 그 힘을 설명할 길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지금은 미지의 땅인 메디아 대륙의 출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이델은 브리칼트의 대귀족 출신이었다.
대대로 신성력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가문. 걸출한 신관을 배출해 낸 적도 없다.
‘도대체 저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대단한 힘이었다. 원로들도 요이델만큼의 신성력을 지니지는 않았다.
그러니 알아야 했다. 요이델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미래를 보는 데다 동물을 길들이는 이례적인 능력을 지닌 신관.’
율리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옆을 바라보았다. 금지되는 주술, 금술을 썼다면 성황인 자신이 기운을 못 느꼈을 리가 없다.
금술은 신성력과 정확히 반대되는 힘이니까.
‘게다가 그날 이후로 하일의 결혼 압박이 더욱, 더욱 심해졌다.’
요이델 신관의 대단한 능력이 하일의 어떤 점을 자극이라도 한 것일까.
‘혹시 요이델이 반려가 됐음을 눈치챈 건가.’
그가 봤을 때 하일은 그 정도로 눈치가 있는 신관이 아니었다.
요이델이 자신의 반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절하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어쩐지 그 꼴을 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능력치는 역대 최고. 원로조차도 넘볼 수 없는 힘이다. 다루는 법을 몰라 억눌려 있을 뿐. 하일이 말하는 대로 성국을 위해서라면 저 소년이 내 반려가 되어야 하지 않나.’
정말로 이 창공 대륙을 위한다면 말이다. 그에게 동반자가 생긴다면, 그렇다면 비슷한 능력치를 가진 상대여야 맞다.
“저…… 성하?”
지끈거리는 두통에 초점이 흐려졌다.
흐린 시야 사이로 분홍색 머리카락, 붉은색 눈이 존재감을 강하게 뽐냈다. 그러고 보니 평소와는 달라 보인다.
“성하, 괜찮으세요?”
율리시스는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요이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헛것이 보이나, 뭐가 평소랑 다른 거지.
요이델에게 시각을 교란시키는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토끼 같은 눈망울, 물기 어린 붉은 입술.
목젖이 튀어나오지 않은 평평한 목과 보다 부드러운 선.
‘무슨……!’
율리시스는 자신의 생각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쿵, 하고 세차게 가라앉았다.
크게 뜨인 두 눈이 충격으로 감기지도 않았다.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와 눈을 감쌌다.
이상했다.
‘왜 요이델 신관이 여자의 모습으로 보인 거지?’